개별 차원에서 철학실천을 선구한 사례들을 제외한다면,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철학상담이 이 땅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는 아직 채 십 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철학상담은 학계와 우리 사회에 만만치 않은 파장을 던지며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철학상담 인구의 증가나 활동 영역의 다양성 확대 등 외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이와 평행해서 내적인 실질적 논의의 심화 과정 역시 속도를 더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김석수교수(이하 “논자”)의 발표문은 철학상담이 그 동안 통과해 온 여정에 대한 자기 성찰적 진단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시기 적절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자기 비판적 성찰은 성숙한 사고만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자는 철학상담(철학실천)의 내재적인 문제를 직접 문제 삼기보다는 그것을 한국철학계의 위기 극복 방안 내지 대안의 하나로서 바라보고 평가한다는, 좀 더 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논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국내 철학계가 처한 위기 상황을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격” 탓으로만 돌릴 수 없으며, 그렇다고 국내 철학과(계)의 “특수한 사정”이 모든 사정을 다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만 발표문에서 논자는 “후자에 더 비중을 두고 논의”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한국 철학계의 위기를 한국 철학자들의 “‘철학함’의 활동 양상과 더 많이 연관을 지어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함의 활동에서 논자가 중점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철학실천 활동이다. 지난 십년 남짓 기간 동안 국내 철학실천 분야에서 행해진 활동에 대한, 말하자면 철학실천가의 자기평가와 그 평가에 근거한 건설적인 제안이 오늘 발표문의 근본 취지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하 “평자”)는 논자가 제시한 국내 철학계의 위기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 원인 분석, 또 철학실천 활동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해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평자는 여기서 발표문의 내용에 대해서 특별히 대립각을 세울만한 논쟁거리를 찾을 의도가 없다. 다만 논자가 발표문에서 제반 사정상 직접 거론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짐작되는 몇 가지 관점들을 ― 국내 철학계의 상황에 대한 진단에 관한 것이든 철학실천 활동에 관한 것이든 ― 보충하고 함께 생각해보는 선에서 간단히 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특히 논자의 의도가 한국철학계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려는 데 있다고 보면, 우리 철학계의 역사를, 굳이 비유하자면, 니체의 ‘비판적 역사’의 시각보다는 ‘기념비적 역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 평자의 의견이고 이하의 논평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자는 “2. 한국 현대철학에서 ‘철학실천’의 전개 양상”에서 우리의 현대사를 “국민국가 시대”로부터 “시민국가 시대”에로, 다시 말해 “과다 명령사회”에서 “과다 경쟁사회”로 이동해 왔다고 진단한다. 이때 헤겔 법철학은 200년의 시대적 거리를 넘어 별 무리 없이 논자의 진단 논리에 기초를 제공하는 듯하다. 다만 평자는, 과다 명령사회든 과다 경쟁사회든 “사유하기 자체를 억압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2)는 진단의 이면에는, 그 진단에 선뜻 동의하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논자는 그러한 진단으로부터 국내 철학자들(논자는 “철학자”나 “철학 교수” 또는 “철학 전문 종사자” 등의 표현 대신 그저 “철학”이라 지칭하고 있다.)이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3)던 사정을 헤아리고자 한다. 철학은 과다 명령사회에서 “실천적 운동에 치중”하다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는 경향”을 띠었고, 과다 경쟁사회에서는 “현실에 무관심한 채 순수 학문적 탐구 내부로만 침잠해 들어가거나 … 현실 권력에 밀착되어 지배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 역할”(3)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사유의 공허”를, 후자는 “사유의 상실”로 인해 “모두 비판적 사유의 역할을 놓아버린 비철학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된다. 다른 한편 이른바 제도권 바깥의 철학 역시 “학문적 엄밀성”을 대가로 지불한 “정치적 투쟁 운동”으로 나아가 “이론 빈곤”이라는 또 다른 취약점을 노정시킨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 현대사에서 철학은 일반인에게 “현실과 부단히 엇박자를 내는 불행을 거듭”한, 또 “현실의 아픔을 외면한 무용한 학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 같은 진단에는 별로 이견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논자는 여론조사 자료까지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자는 이 같은 진단, 즉 현대사적 흐름에 대한 철학의 부적응 내지 무기력한 대응을 지적하는 일이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자칫 철학함 자체의 무능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염려스럽다.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철학 전문 종사자의 무능함이 곧 철학함 자체의 무용함으로 오해되지는 말아야 한다. 논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현대사뿐 아니라 유럽의 현대사에서도 “같은 상황이 20세기 중반에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그 시대의 철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유럽의 현대철학은 그렇다 쳐도 어쨌든 국내 철학계만 하더라도 1세대부터 최소한 1.5세대 내지 2세대까지는 가혹한 평가를 피해가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세대 철학자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현세대 철학 종사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보다는 그 반대일 것만 같아 더 불안하다. 과다 경쟁사회를 살고 있는 철학자들이 철학실천이라는 카드로 제 아무리 “현실과의 엇박자 문제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해서 그러한 불안감이 근절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만 같다.
평자는 아헨바흐가 주도한 철학실천 운동에 대한 역사적 또는 사회철학적 배경의 분석 못지않게 철학함의 활동 자체가 보여준 자기 반성적 능력, 자기 치유적 능력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철학실천의 모토가 “Doing Philosophy!”, 다시 말해 본래의 철학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 아닌가? 그런데 평자는, 그 정신이 적어도 진지하게 철학하려 했던 “깨어 있던” 철학자들에 의해서는 수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철학의 무용론을 극복하는 데 더 바람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논자가 적절히 언급하듯이 아헨바흐 이전에도 “유럽학문의 위기”, “인간 삶의 위기”를 고민한 후설(4)도 있었고, 실존주의도 있었고, 그런가 하면 “실천철학의 우위”와 “세계개념으로서의 철학”을 “학문개념으로서의 철학”(7)보다 우위에 두었던 칸트도 있었다. 어쨌든 일급 철학자들은 어느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철학함의 본래 정신에 충실했던 것 아닌가? 그들은 예컨대 고대에서든 현대에서든 어느 시대에서나, 미시적으로는 ― 논자는 “미시혁명”(10)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 개인의 고통을 철학함의 힘을 통해 덜어주고자 했고, 거시적으로는 “부당한 권력구조”(5)에 대한 비판을 통해 국가나 시장의 “과다지배가 낳은 생활세계의 붕괴”(10)를 회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더 적극 발굴해 내고 중시하자는 말이다.
철학이나 인문학 무용론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는 물론 현실에 엇박자 대응밖에 못한 철학자들을 비롯한 인문학자들의 책임도 클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책임은 적어도 한국의 현대사에서는 가장 낙후된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정치와 그 핵심 권력층이 역시 후진적이고 허점투성이의 제도를 동원하여 학문의 논리까지 강압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데에서 찾아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평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따라서 권력 집단에 대한 ―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대학의 동료 지식인 집단도 포함되는 것 같다 ― 계몽 활동이 철학도에 주어진 더 시급한 과제라고 믿는다.
논자는 “4. 한국 철학상담의 전개 양상”에서 역시 철학상담 분야에 대한 국내 철학계 일반의 “소극적” 태도에 대해, 그리고 나아가 철학상담 분야의 국내 전개 양상에 대해서까지 일침을 가한다. 평자는 전자에 대해서는 무조건 동감한다. 철학실천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단순한 학문이론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가능하다는 것이 평자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철학적 앎(에피스테메)은 필시 개인의 개종(conversion)과도 같은 의식 변화를 전제로 하여서만 제대로 매개될 수 있다. 순수 인문학의 위기를 지방의 그저 그렇고 그런 대학의 위기와 동일시하고 따라서 그에 대한 처방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찾으려는 관습적 사고가 남아 있는 한, 철학실천에 대한 동료 철학교수 집단의 관심은 앞으로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평자는, 국내 철학상담 활동의 전개에 대한 논자의 비판, 즉 철학상담이 “수입학이나 … 시비학의 수준을 넘어서 … 창조학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아직 채 10년도 넘기지 못한 국내 철학상담계의 활동,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가 이제까지 보여준 성과를 고려할 때 지나치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논자 자신이 국내 철학상담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에 날릴 수 있는 ‘돌직구’일 것이라고 이해한다. 여하튼 아직까지 국내 철학상담 학계는 비판보다는 격려와 관심과 참여를 더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 평자의 견해이다.
평자는 발표문의 요소요소에서 국내 철학계의 체질 개선에 관한 논자의 애정과 깊은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논자의 발표문은 한국 철학계의 미래를 위하여 큰 그림을 제시하려 한 의도의 산물이라 판단하며, 경의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