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물자체 (Ding an sich)

Kant 2014. 12. 5. 10:57

 

 

그림 출처: http://kd.htw-berlin.de/studienprojekte/editorial-und-corporate-design/logoentwicklung/

 

 

1. 칸트는 공간, 시간, 지성 개념, 지성의 원칙 등은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타당성을 가지는 것들이라 한다.

1.1 그것들은 감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이다.

1.2 그것들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대상의 촉발로 인해 감관에 주어지는 감각 자료(내용)가 있어야 한다.

1.21 그리고 그 감각 자료의 근거, 즉 현상의 근거(이유, 원리)가 있어야 한다.

1.3 칸트는 감각 현상의 기초에 놓여 있어야 할, 즉 주관의 감관에 감각 표상을 야기할 대상을 물자체로 부른다.

1.4 일상적인 경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물자체란 예컨대 각도에 따라서 타원형으로 보이는 원형의 접시 그 자체일 것 or 물속의 굽어 보이는 막대기와 대조되는 곧은 막대기 등등.

1.5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인 의미의 물자체란 오히려 원형 접시의 모습이나 실제로 곧은 막대기 자체가 아니라 이것은 현상이다 그 배후의 어떤 것이다.

 

2. 칸트는 물자체를(“가상체noumena”, “Etwas”, “X”, “선험적 객체등으로도 표현)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소극적 의미: 감성적 직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지성적 이론 인식의 한계를 나타내 주는 개념으로 사용

적극적 의미: 현상의 규정 근거로서 비감성적인(예지적/지성적) 직관의 대상이라는 것 물론 인간의 직관에는 해당 .

 

3. 왜 물자체 개념인가?

3.1 이 개념은 칸트가 자연 과학자였다면 불필요한 개념이었을 것 현상의 원인은 늘 또 다른 현상에서 찾기만 하면 되니까.

3.2 반면에 형이상학은 그 자체로는 현상의 원인을 현상이 아닌 것으로서 추구한다 결국 경험의 한계에까지 도달하게 됨(물자체 개념의 필요에 대한 일반적 이유).

3.3 칸트 인식 이론의 구조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고도 불가피하게 그러한 구분을 필요로 했다.

3.31 만일 인간 인식 주관이 완벽하거나 인식의 객체까지도 스스로 산출할 수 있다면 그러한 구분은 필요 없게 될 것(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물 그대로에 대한 인식일터이니까).

3.32 그러나 인간에게 인식되는 대상은 주관의 제약에 의해 (아프리오리한 조건들: 시간과 공간, 범주 등) 주어지는 것으로서 도저히 물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적 조건에 의해 제한된 대상으로서 주어질 뿐.

 

4. 물자체에 관한 문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물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현상의 원인이 되나?: 분명한 것은 인과 범주에 의해서는 아닐 것(인과 범주는 현상에게만 타당한 것이므로) : 칸트는 물론 며느리도 모른다!

칸트는 그저 물자체를 현상의 존재 근거(이때 현상을 현상으로서 가능케 만든다는 의미에서이지, 범주적 원인의 의미에서는 아님 도식화 되지 않은 원인 범주? Alfred Cyril Ewing)로 보고, 현상은 물자체의 현존에 대한 인식 근거로까지 생각한 듯하다.

 

Idealism consists in the assertion, that there are none but thinking beings, all other things, which we think are perceived in intuition, being nothing but representations in the thinking beings, to which no object external to them corresponds in fact. Whereas I say, that things as objects of our senses existing outside us are given, but we know nothing of what they may be in themselves, knowing only their appearances, i. e., the representations which they cause in us by affecting our senses. Consequently I grant by all means that there are bodies without us, that is, things which, though quite unknown to us as to what they are in themselves, we yet know by the representations which their influence on our sensibility procures us, and which we call bodies, a term signifying merely the appearance of the thing which is unknown to us, but not therefore less actual. Can this be termed idealism? It is the very contrary. (Prolegomena, 13.2 = A 62f.)

 

물자체도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그 자신 역시 어떤 또 다른 원인을 가져야 할 것이니, 현상의 원인에서 다시 물자체의 원인 원인으로 소급하다 보면 결국 사물의 최초 원인 제공자, 즉 신에 이르게 될 수 있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시 신의 원인?)?: 역시 가능한 질문이지만 무의미한 논쟁. 물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내용도 알려지는 바가 없다고 보기 때문. 이 개념 자체가 이미 우리 인간 사고가 인식 원리에 따라 이를 수 있는 최종 개념, 즉 인간 지성이 그것을 넘어 나아갈 수 없는 한계 개념이니, 그 배후나 그 너머를 묻는 것은 무의미.

물자체와 선험적 이념들(실체로서의 자아, , 인과 계열의 완결체로서의 세계 내지 우주와 자유)의 관계는?: 칸트는 이념들 역시 물자체로 간주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현상적(경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이론 인식 불가)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물자체는 시간, 공간 속에서의 현상들의 근거를 주지만, 신이 어떤 식으로든 시간, 공간 속에서 현상한다고 말하기는 (스피노자에겐 가능?) 어렵다. 또 자유라는 것도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도덕적 의식 속에서 분명하게 파악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물자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자체는 기본적으로 한계 개념이지만, 이념들은 오히려 통일적인 이성 사용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위해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개념들이다. 또 이 이념들은 이성적 추론(삼단 논법)의 산물이다. 선험적 변증론에서 해체 작업이 이루어짐.

 

- 정언삼단: 궁극적인 주어에로의 소급. 이성이 정언삼단논법의 무한한 계열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판단의 궁극적 주어, 즉 그 자신은 술어일 수 없는 개념인 궁극적 실체인데, 이성의 이러한 본성이 나의 모든 판단을 수반하는 나의 의식을 그 판단의 절대적 주어()이자 다른 사물의 규정으로는 사용될 수 없는 실체로서의 ’(영혼)라는 개념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주장처럼 들린다. 정언삼단논법의 상승 계열이 도달하는 궁극적 주어로는 존재가 더 적절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코플스톤은 칸트가 여기서 표상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관계들이라는 생각을 일종의 보조적인 사고 노선으로 도입했다고 해석한다. 그 첫 관계가 주관에 대한 관계인데, 모든 표상들을 수반하는 내가 생각한다는 순수 통각이 말하자면 그 표상들로 이루어진 판단들에서 결코 술어의 위치에 올 수 없는 궁극적인 주어의 역할을 하는 실체인 ’(영혼)로 간주되었다는 것.

 

- 가언삼단: 궁극적인 전제의 추구. (장미에 물이 없으면 시들 수밖에 없다. 이 장미에는 물이 없다. 고로 이 장미는 시들 수밖에 없다.) 인과 계열의 끝 내지 전체(총체)를 추구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세계 내지 우주를 의미? 인과 관계는 경험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 틀이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 선언삼단: 모든 선언지(술어)의 총체를 추구 (장미는 빨갛거나 희거나 노랗다. 이 장미는 빨갛지 않다. 고로 이 장미는 희거나 노랗다.) 술어의 총체성이란 경험에서 주어질 수 없는 개념인데 이것을 실재화 하고 (즉 사고하는 주관 밖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실체, 인과성, 필연성 등의 범주를 귀속시키는 것. 그러나 이 이념 역시 실재화의 오류를 범한 것일 뿐 아니라 경험의 대상에게만 적용 가능한 범주를 잘못 사용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