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스바움은 인간의 삶에서 강력한 '감정'의 체험이나 미리 대비하기가 불가능한 '운'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와 역할을 대변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노년에 이른 사람들이 자주 사로잡히게 되는 회고의 감정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어째서 노인의 자아 정체성에서 중요한 요소인가를 설명한다. 우리는 어차피 과거를 바꿀 수 없으므로 기억을 되살리고 음미하려는 시도를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그녀는 그러한 일에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사용하는 일이 바람직한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또 가령 그것이 불합리한 일이 아니고 의미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그녀는 고전 전문가로서 고대 작가들의 글들을 섭렵하면서 과거나 현재의 사건들 또는 미래에 일어날만하다고 여기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감정, 예컨대 기쁨, 희망, 걱정 같은 감정에 대한 고대 사상가들의 태도를 분류한다. 예컨대 스토아 사상가들은 과거와 관련된 감정들인 “죄책감”이나 “후회” 같은 감정들을 감정의 분류에서 누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철학이 감정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또 만일 “스토아 사상가들이 과거에 초점을 두는 태도에서 인간 삶에 크게 위협이 되거나 중요한 혜택을 주는 요소를 발견했더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 같은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스토아 사상가들이야말로 과거에 관한 부정적 감정에 현재적 삶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을 가장 경계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남긴 개인적이거나 비공식적인 글들에서 그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오래전 과거를 분석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반해 현대 사회에서는 과거를 감정을 분류하는 아주 중요한 범주로 여긴다고 한다. 또 과거와 직접 연관된 감정들이 그 개인의 현재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몇몇 중요한 요인들로 너스바움이 주목하는 것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영향, 정신분석 이론 그리고 소설 문학의 등장 등이다. 특히 소설의 경우, 독자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등장 인물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과거와 연관된 다양한 감정들이 대단히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 즉 서사를 구성하는 작업은 자신의 현재적 삶을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펼쳐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너스바움은 이렇게 적는다.
“우리 자신의 성격에 대한 서사적 연구(소설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연구)와 회고적 감정들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소중한 자료다.”
고령자들이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때, 그들이 비록 무언가 대단히 귀한 것을 성취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서사(self-narration)를 구축하는 것을 과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감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 예컨대 고통이라 할지라도 너스바움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과거를 향하는 여러 가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은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녀는 감정의 전문가 답게 과거에 관한 다양한 감정들을 분류하며, 그러한 감정들에 에너지를 소비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녀에 따르면, “슬픔은 우리 삶에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감정”이고, “애착(헌신)의 증거”가 되며, 애착의 대상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본성을 증명한다. “슬픔은 우리 자신에 대한 감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온전하고 강력하게 표현한다”고 한다. 회한이라는 감정에서 강조되는 부분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인데, 예컨대, “내 아이들이 그날 고속도로의 그 지점에 있지 않았더러면, 그래서 부주의한 운전자의 차에 치여 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야”라는 느낌이나 생각을 의미한다. 비록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소망은 우리 감정에서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하겠지만, 회한은 슬픔과 유사하게 현재 시점의 책임과 관심사에 대한 인식을 표현해준다. “그 사건이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거야”라는 인식 말이다. 죄책감 역시 회한처럼 현재를 표현하는 역할을 하면서 그 표현을 통해 미래의 여러 가지 선택을 지시하기도 한다. 과거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곧 그 행동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자기 신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런 나쁜 행동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따르게 된다. 이런 종류의 죄책감은 도덕적으로 좀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너스바움에 의하면, 회고적 감정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우리가 무엇에 책임이 있는지를 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자기 변화를 위해 유용한―을 던지게 만든다. “나는 내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고 과거에 우리가 사랑했던 것과 우리가 했던 일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에도 회고적 감정이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단, 회고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면 자기 자신을 벌하려는 “무익한 행위의 덫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고 부연한다. 과거에 대한 회상 작업에 할애하는 시간에 한도를 정하고 현재와 미래를 풍요롭게 해주는 회상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충고한다.
너스바움은 이상에서 서술한 경우와 대조적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 작업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현재적 삶에 대한 몰입을 과장하려는 사람은 “삶과 사랑을 연기하면서도 그 어떤 것도 진실되게 사랑하지 않는”, 그래서 “변화를 거부하는”, 어떤 의미로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적으로 성찰하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은 자아성찰의 가치를 지니는 일이며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주장한다. 그녀는, 현재와 미래를 모두 과거에 종속시키는 것이 실수라면, 현재와 미래를 선호한다는 이유로 과거를 폐기처분하는―그리하여 현재와 미래를 빈약하게 만드는―행동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똑같은 실수라고 말한다. 그녀는 고급 실버타운에 거주하는 다수의 노인들이 고통을 느낄 것이 두려워서 과거보다는 현재로 주의를 돌리는 행태―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기보다는 예컨대 골프, 음식, 섹스에서 얻을 수 있는 일시적 쾌락을 탐닉하는―를 지적하면서, 이 같은 “현재지상주의”(presentism)가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과업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책망한다.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고난, 슬픔, 실패에 직면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지상주의적 삶은 대다수 동물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 이외의 동물들에게는 그런 삶도 나쁘지 않겠지만, 인간은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슬픔의 감정은 사랑을 받아들이게 해주며, 회한의 감정은 도덕적 실패와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해준다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자기 서사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너스바움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가 인생의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서사를 만들거나 발견하는 작업에 종사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 회고적 성찰은 유의미한 방식으로 수행될 경우 의미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미를 구축하는 수단이 된다. … 우리 삶은 우연한 사건들의 무작위적인 축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무작위적인 삶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종교 교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삶의 형상, 그리고 삶의 발전 또는 퇴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외부적 서사를 제시한다. 만약 우리가 종교 서사를 기준으로 의미를 판단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그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삶의 무작위적인 조각들을 가지고 온전한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회고적 성찰은 그저 과거와 직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형상화를 통해 원래는 우연만 있던 자리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일이다. … 과거를 향하는 감정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의 일부다. 그 감정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빚어내 인생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자기 서사의 구축에서 서사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려는 “사회 주류의 기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런 기대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고서 자기 서사라는 과제에 착수하는 일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예컨대 남성에게는 “영웅적 서사”를, 여성에게는 “사랑과 헌신의 서사”를 요구하는 기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주 자유롭게, 비전통적이고 엉망진창인(모든 의미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됐을 경우에만 서사를 구축하는 작업을 하라”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충고를 전한다. 그녀는 인생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거꾸로 살 필요”가 있다면서, 이때 그 목표란, “자기 이해하기”, “자기 변화시키기”, “그리고 현재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라고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위험 또한 요령껏 경계할 필요가 있는데, “현재지상주의와 과거지상주의”뿐만 아니라, “순전히 미학적 입장에서 혼란스러운 것과 불규칙한 것을 거부하는 유미주의적 인간 혐오, 삶에 대한 증오, 자아에 대한 증오도 마땅히 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녀의 결론은 다음 문장들로 대신해도 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우리 모두 두 번째 아동기에 들어선다. 이 시기에는 자아의 절박한 요구와 육체의 본능적 요구가 그동안 형성했던 좋은 습관들을 방해하고, 우리를 넓은 세상의 가치와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도덕적 위험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최선을 다해 그 위험과 맞서 싸워야 한다. 되도록이면 품위와 유머와 겸손을 보여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