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사이보그의 소외인가 인간의 소외인가? (영화 “할로우맨”의 허상과 진실)

Kant 2007. 7. 28. 14:48
- 이진우 교수의 발표문 “사아보그도 소외를 느끼는가?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정체성”(사이버시대와 철학, 새한철학회 정기학술대회보, 2000. 11, 33-50)에 대한 논평

                                                             

저는 최근 저희 학교에서 치루어진 한 학회에서, 인문학 관련 학술대회들이 매우 현실지향적인 주제를 앞다투어 다루고 있는 풍토에 대해 우려의 뜻을 표시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계만 하더라도 “대중매체 문화의 허위성과 진실성”, “경제위기와 철학적 대응”, “새천년을 위한 철학적 전망. 생명, 정보, 문화” 등 보기에 따라서는 철학이 아주 긴박한 현실의 문제에 다가가려는 긍정적인 시도로 생각되는 주제들이 다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기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인문학이 처해 있는 자신감의 결여 상황에서, 즉 여타 학문들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학회의 주제인 “사이버 시대와 철학”도 그런 의미에서 너무 저널리즘적인 주제가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번에 논평문을 작성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은 것도 그러한 제 평소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진우 교수의 발표문을 읽고 처음 받은 느낌을 세 마디로 표현하면 ‘신선하다’, ‘앞서간다’, 그리고 ‘못 따라가겠다’였습니다. 5, 6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의 많은 철학논문들은 현실과 꽤 먼 고담준론을 담고 있어서, 즉 너무 높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너무 빨라서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일차적인 원인은 논평자의 아둔함이나 조로증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발표문을 읽으면서 자주 인문학, 특히 철학에서 이뤄지고 있는 첨단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저널리즘과 구분해 주는 황금의 중간 지점이나 경계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갓 버무려 내어 온 겉절이의 아직 신선한 배추 맛도 좋겠지만, 적절히 발효되어 숙성한 김치의 맛이 철학에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상현실이나 디지털 문명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학자들 - 그들 중 일부는 ‘뉴미디어 학자’로 분류되거나 ‘미래학자’라는 아직 제게는 조금 생경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이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매우 성급한 일반화의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과 그것에 힘입어 새롭게 등장한 현실의 의미를 너무 신속하고 일괄적으로 규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논평자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이러한 성향이 가상현실이면 가상현실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내리는 쪽에게서나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쪽에게서나 거의 비슷하게 확인된다고 봅니다. 물론 어느 한쪽의 일괄적인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진리가 반드시 중간에만 놓여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적어도 그러한 성급한 일반화에 대하여 어느 정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발표자는 “디지털 정보 기술의 이중성”을 소개하면서 “디지털 정보기술은 가상현실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공포와 열광의 이중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하고 소박한 실재론에 기초한 반기술주의의 입장과 “미래지향적 이상주의자” 모두 디지털 기술의 이중성이 만들어 내는 소외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37-41쪽). 그러나 양쪽의 입장을 비판하는 발표자의 근거들은 논평자가 보기에는 각각 상대방의 주장들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박한 실재론자들의 잘못은 순수한 외부현실과 매개되어 만들어진 현실 사이의 “근본적으로”(39쪽) 명확하지 않은 차이를 오해한 데에서 비롯되었고, 이상주의자들의 한계는 가상현실이 “구체적 생활세계를 대체”(40쪽)할 수 있다고 본 데에 있다는 식입니다. 논평자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발표자가 디지털 문명이나 가상현실 등에 관한 기존 학자들의 성급하고도 일괄적인 규정을 소화하여 자신의 안을 만들어 내려한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평자는 바로 앞에서 “근본적으로”라는 단어를 강조했습니다. 발표자의 발표문에서는 바로 이 ‘근본적으로’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부딪히게 됩니다. 예컨대 “[디지털 문명과 함께]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34쪽),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와 기술이 예전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35),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하였다”(같은 곳), “디지털 정보시대는 근본적으로 포스트휴먼 시대이다”(36쪽),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미 ... 근본적으로 이상과 현실이 겹으로 중첩되어 있는 가상현실”(37쪽)이다. “도구와 기술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 실재와 현실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도구와 기술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몸을 확장하는 것이다”(39쪽) 등등의 표현은 제가 오늘까지 찾아 낸 것만 해도 열여섯 군데 이상이 됩니다. 여기에다 “아무런 [또는 “어떤”, “전혀”, “완전히”] ... 도 아니다 [또는 “없다”]” 등과 같은 표현까지 고려한다면, 발표자 역시 기존의 학자들이 경쟁하듯 쏟아 내고 있는 조급한 진단들과 철학적인 반성의 거리를 제대로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발표자도 공감하듯이 신미디어 기술의 영향에 대한 것만큼 극단의 예측이 무성한 영역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상현실이든 디지털 문명이든 아니면 사이보그이든 그것이 아무리 현대의 시급한 화두이건간에 - 그것들에 관한 주장들이나 이론들은 과대포장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요즘 인기 있는 영화 ‘할로우맨’의 주인공처럼 아예 허구적일 수도 있습니다 -, 철학도에게 중요한 것은 거리두기 작업일 것입니다.


구체적인 논의와 관련해서는 다음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디지털 사회에서 야기된다는 소외현상을 설명하는데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가입니다. 발표자는 마르크스의 “이중화” 개념을 주목하면서 “소외는 인류문명의 필연적 수반현상”이므로 소외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갖는 설명력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발표자는 “디지털 시대의 정보기술 역시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36쪽)는 점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가 분석할 수 없었던 정보의 세 가지 특징”(42쪽)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기술의 어떤 이중성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중성과 어떤 점에서 같거나 유사하다는 것인지가 애매하거니와, 정보의 세 특징, 즉 인간과 기계 내지 도구의 비유기적 관계, 정보의 탈물질화 그리고 가상공간의 실체화 등도 과연 마르크스가 말했던 인간과 자연 내지 생산물의 관계, 노동자의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사회적 내지 공동체적 향유 등의 이론적 패러다임으로 환원되어 설명 가능한 것이지 의구심이 듭니다. 논평자에게는 마치 마르크스가 디지털 정보를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설명해 줄 수는 있는 이론을 예견했다는 것이 거의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두 번째로는 디지털 정보사회에서의 가상공간과 구체적 현실세계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완전한 통합에 관한 것입니다. 발표자는 발표문의 앞 부분(“1. 디지털 기술과 포스트휴먼시대”)에서 “가상현실은 존재론적 개념이기보다는 오히려 인식론적 개념이다”(36쪽)라고 하면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존재론적인 구분이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가상현실을 ... 현실 자체로 지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에 입각해 보더라도 존재론적인 차이는 단순한 지각방식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존재 없는 인식이나 이해가 있을 수 없고, 존재 없는 당위가 공허할 수밖에 없다면, 사이버 현실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지침이 없이 가상공간과 구체적 현실세계의 “분리할 수 없을 정도”(45쪽)의 결합을 말하거나 그 세계 안에서의 자아의 정체성이나 윤리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정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발표자는 사이보그가 사이버네틱 유기체의 합성어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인간과 기계가 상호보완적이고도 무모순적으로 접속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사이보그의 인공지능과 유기체의 결합은 인간의 안녕과는 무관하게, 인간 밖의 결합으로도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바이오테크놀러지가 인체 밖에서 결합되어 출현할 수 있는 사이보그를 놓고도 과연 인간과 기계의 “너무나 유기적”(36쪽)인 결합을 운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어떤 식으로든 그러한 결합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인간의 의식세계마저 기계의 수반현상으로” 보게 됨을 뜻하거나 “인간관계의 기계화”(43쪽)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기계에 인간의식이 침투되어 확대되는 것일 것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는 소외와는 무관하다고 보아도 될 듯 싶습니다.

셋째로 발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표자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자아가 갖는 중층성, 다중성을 말합니다. 다중적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는 자아는 다중적이게 된다는 주장도 가능성을 현실로 보자는 것 같아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러한 자아의 분산을 그 자체로 “부정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49쪽)는 주장도 무리라고 봅니다. 오히려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자아가 파괴되거나 기껏해야 파편적 자아들만, 즉 자기 고유의 중심과 색깔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획일적인 자아들만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미 MUD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이 자주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연구 결과가 그 한 증거입니다. 발표자 자신도 어떤 곳에서는 인터넷과 가상공간에 중독된 자들이 “사회적 연대”(46쪽)를 박탈당할 가능성과 정체성의 분산 가능성을 비치고 있는 바, 이 정체성의 분산과 자아의 다중성은 서로 모순적이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다행히 소외라는 가치 개념을 다루는 논문에 걸맞게 “현대의 디지털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며, 오늘날에도 존립하고 있는 소외를 극복하려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47쪽)라는 물음을 던지는 데까지는 이르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실제로는 이 물음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대답을 제시해 주는 데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발표자의 진술은 거의 전부 “이다”로 끝을 맺을 뿐이며, “이어야 한다”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피와 살을 가진 이진우와” 그의 “디지털 자아인 leechinu@kmu.ac.kr가 ... 다르다”라는 식이지, 이 두 자아가 서로 다르지 않아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뉴미디어 이론가로서의 이진우와 철학자로서의 이진우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논평자에게 많이 생소한 분야에 대해 좋은 공부를 할 기회를 준 발표자에게 감사하며 논평문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