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reality)가 자신의 근본적인 의미들로 우리와 접촉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이름이 “내적 깊이”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몽상가쯤으로 무시해 버릴 수도 있겠다. 실재와 접촉하기를 꿈꾸는 것은 바보짓이며 심지어 광기의 한 형태라고 말이다. 아마도 그 사람들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지근한 논리 게임으로 만족하는 냉정한 전문가보다는 차라리 미친 몽상가가 되는 것이 낫다. 우리는 열정어린 바보짓을 통해 진정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며, 또 실재성에 대한 우리의 꿈을 통해 실재함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열망은 조심스러운 추상화 작업보다 더 깊이가 있고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다. 우리의 열망은 철학적인 종류의 광적인 갈망이다.
깊이는 결코 나 자신의 깊이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더 커다란 지평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깊이 있게 철학하는 진지한 활동이 소중하고 신성하기까지 한 이유다. 이 활동이 나 자신을 넘어서 훨씬 더 멀리 뿌리박고 있는 이해[a understanding, 지성]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실재성”(realness)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신을 너무 당황스럽게 만든다면, 나는 내가 내 영혼을 상실하지 않고서는 그 실재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겠다. 나는 마치 실재성이 허구인양 실재에 대한 내 열망 또는 실재성에 대한 내 감각을 무시해 버릴 수 없다. 나는 진리에 대한 아주 오래된 인간의 추구를 마치 그것이 한갓 환각인양 치부해 버릴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2600년 이상 서양에서 철학함의 활동은 삶의 일상적인 이슈들을 탐구하는 것을 뜻했으며, 특정 개인의 특수한 사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삶과 실재의 근본 이슈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뜻했지, [이를테면] 매리의 직장 문제나 피터의 부부 싸움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는 절반의 진실 아닐까?]
나의 상담 활동을 진정으로 철학적으로 만들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탐색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통적인 철학적 글들을 사용하여 작업하는 것이 지닌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옛 사상가들이 남긴 짤막한 철학 텍스트들은 자기 이해를 위한 지혜의 풍요로운 원천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것들을 따라야 할 권위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해로 발전시켜 나아갈 원자재로 사용한다면 말이다.
당시의 공통적인 흐름에 반대하여 나는 철학실천가들이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작업하지 말고―이런 사람들은 심리학자를 찾아갈 수 있다―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고양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과 작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수의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철학이 자기 계발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그들의 비전을 따르지 않는가? 어째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는 심리학을 모방하려 하는가? 철학은 결코 사람들을 정상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한 적이 없다. 반대로 철학은 사람들을 그들이 꾸고 있는 “정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다. [자기 성장이나 계발을 돕는 일이 철학 본연의 일이라 해서 철학상담 활동을 중단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다시 말해 이 두 가지가 과연 서로 별개의 일일 수 있는가? 심리학과의 거리두기가 신비주의나 종교 친화적인[?] 방향에로의 전환을 의미해야만 하는가?] …
나는 운 좋게도 여러 가지 심오한 영성적 경험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 경험은 나의 중심부를 흔들어 놓았고 내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것이든 그밖의 무엇이든 나는 도그마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영성 탐구자였다.
플라톤은 향연과 동굴의 비유에서 철학의 원천이 진선미에 대한 “열망 또는 에로스”(the yearning―or Eros)라고 말한다. 철학은 냉정한 지적 관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열망에 의해서 동기화 되며, 진정한 철학적 “사랑꾼”을 단순한 객관적 지식의 축적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주는 “미”에 대한 최고의 안목으로 안내한다. 더욱이 이처럼 최고치에 이르는 과정은, 실재에 대한 충만된 이해를 얻기 위한 내적 변형―동굴에서 벗어난다는 비유가 상징하듯―을 포함한다. 그래서 철학은 삶을 고양시켜 가는 오랜 과정이다. … 스토아의 여러 가지 영성 훈련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내면에서] 졸고 있는 “지도 원리”, 즉 “다이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우주의 로고스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자아이며, 우리가 “우리의 내적 깊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의 철학이 내적 변화를 의도하는 지속적인 관조적 훈련을 요구하는 삶의 한 방식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는 여기서도 우리의 정상적인 심리학적 패턴들과 우리의 내적 자아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 후자를 일깨우고 강화시키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마리아 잠브라노의] 철학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 세계의 비합리적인 측면들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내적 공간, 즉 “숲 속의 빈터”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하이데거?] 우리는 이 공간을 통해 우리의 실재가 기진 은폐된 깊은 층들에 관한 예상하지 못한 통찰을 수용할 수 있다. 잠브라노처럼 우리도 심층 철학 안에서 합리적인 분석의 한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이해를 계발하기 위해 근본적인 실재의 언어로 말하고 생각해야 한다. [하이데거?]
철학은 언제나 고립된 단일 진술보다 많은 것들로 작업한다. 관념들로 이루어진 풍요로운 그물망을 구성하여 삶이나 실재에 대한 복합적인 관점, 다시 말해 세계관을 표현하고자 한다. … 그러므로 철학적 텍스트에 대해 관조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관념들로 만들어진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내가 진실된 방식으로 어떤 텍스트에 대해 관조할 때, 나는 지적으로 분석하듯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의 근본적인 의미가 하나의 세계처럼 나를 에워싸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소설이나 영화 또는 게임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듯 그것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 이런 의미에서 철학 이론들은 관조자가 인간 실재의 기저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출입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이때 관조자는 그 이론들에 대해 지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내면으로부터 관조해야 한다.
지적 사유는 우리를 변화시키기에는 제한적인 힘만을 지닌다. 사고의 대상들을 제시할 뿐 우리를 그대로 놔두기 때문이다. 관조(contemplation)는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사유 작용과 마음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철학적 텍스트가 깊이가 있고, 객관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의미의 영역을 지시한다면, 그것은 당신을, 그리고 세계와 당신의 관계를 다시 조형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관조의 도움을 통해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당신은 적어도 그 회기 동안에는 그 이전과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이제 대양의 파도가 되고, 그 대양의 실재성이 당신 안에서 구현된다. 그것이 당신 안에 있게 되는 것처럼, 당신도 실재성과 충만함에 대한 감각에 의해 둘러싸여 그것 안에 있게 된다.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언급될 수 있는 체험의 영역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철학보다는 종교나 신비주의의 체험에 더 가깝고, 특히 도덕적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은 영역이라 그 자체로 더 위험할 수 있을 듯]
목소리 은유가 지니는 또 다른 장점은, 이 은유가 우리 안에서 공명하고 “말하는” 관념들에 대한 관조적 경험을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바라봄에 관한 시각적 언어의 비유(“우리 안에서 바라봄”)는 여기서 뜻이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청각적 비유에는 나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구별이 희미해진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외부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우리 내부에서 공명하는 것으로서 경험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조 중인 관념들도 텍스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서 공명하는 것으로서 경험된다.
마지막으로, 청각적 비유는 우리가 동료들이나 텍스트들과 “공명함”으로써 그것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해준다. 공명이란 목소리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공명 개념은 어떤 것에 대한 사유가 지닌 이분법들―일치함 대 불일치함의 이분법, 진실 대 거짓의 이분법―을 초월한다. 이러한 이분법들은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이나 사유의 이분법, 또는 주관-객관의 이분법과 같이 시각적 세계를 지배하는 이분법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명함이라는 청각적 개념은, 관조자가 자신에게 어떠한 목소리가 주어지든, 단순한 참-거짓의 이분법을 넘어서 상이한 반응 범위 안에서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칸트적?]
음악 콘서트에서의 공명이 자의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의미들로 이루어지는 “콘서트”에서의 공명도 자의적이지 않다.
우리의 관조적 경험은 아주 다른 어떤 것을 드러내준다. 하나의 목소리는 우리가 그것을 검사하고 그것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아니다. 목소리는 왜곡 없이는 나의 사유 작용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유 작용 그 자체다. 내가 그것을 내 사고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나는 그것을 [이미] 상실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게는 원래 그것이었던 것과 그저 유사한 것만이 남아 있게 된다. 마치 우리가 어둠이 만들어 낸 것을 관찰하고자 그것을 햇빛이 있는 곳으로 가져왔을 때처럼 말이다. [사유를 넘어서는 영역을 체험한다는 것, 또 그것이 동시에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과연 그 건전성을―이것이 무엇을 뜻하든―담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내면의 깊이에서 관조하기는 실재의 목소리들을 듣기와 대략 같은 것을 뜻한다.[역시 하이데거?]
우리의 정상적인 삶은 사고, 정서, 행동의 심리학적 메커니즘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들은 자동 파일럿처럼 전형적인 심리학적 패턴들을 따른다. …
우리가 “변형적 철학자들”이라고 부르는 사상가들은 플라톤, 스토아 철학자들, 스피노자, 루소, 니체, 에머슨, 그리고 그밖의 사상가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다양한 개념들과 이론들을 사용했지만, 모두 우리가 통상 협소하고 경직된 심리학적 구조 안에 갇혀있으며, 따라서 삶의 표면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철학함의 도움을 통해, 작은 걸음이든 큰 걸음이든, 또 잠깐에 불과하든 장 시간 동안이든 이러한 감옥에서 점차 벗어나올 수 있으며, 더 충만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자기 변형”이 완전히 당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면, 그래서 만일 그것이 새로운 개성을 획득하거나 당신을 모든 심리학적 메커니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정서적 행태적 패턴들을 극복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면, 이것은 비현실적인 꿈이다. 유칼립투스는 유칼립투스이지 결코 장미가 될 수 없다. … 실제로 여러 회기 동안 철학적 관조 활동에 참여한 이후에도 우리가 지닌 케케묵은 여러 패턴들과 성향들은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게 된다.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의 사고, 느낌, 행동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게 된다. 우리 존재의 추가적인 차원이 이제 좀더 각성된다. 이 추가적인 차원이 우리가 우리의 내적 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나의 각성된 내적 깊이가 나의 존재를 대체하지는 않지만, 나를 통합시키고, 나를 중심에 놓으며, 나를 확대시킨다. 또 때로는 나를 더 깊은 뿌리나 더 거다란 지평과 연결시켜 준다.
그러므로 목소리 내기는 관조적 활동의 최고 단계로 볼 수 있다. 텍스트를 공부하고 그 관념들의 그물망을 철저히 탐색하고, 또 그 텍스트와 동료들과 공감함으로써 관조하고 나면 당신 자신은 심층 철학자가 되며, 당신 자신의 비전을 창조적인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Ran Rahav, What is Deep Philosophy? Philosophy from Our Inner Depth, Hardwick: Loyev Books 202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