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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투기 조종사와 스토아 철학

Kant 2023. 1. 18. 16:01

신학자들은 욥의 이야기에서 고귀한 교훈을 많이 발견했다. 그중 하나는 무한의 기준을 유한의 기준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욥에게서 얻은 교훈은 더 단순한데,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는 덕이 상을 받고 악이 벌을 받는 것과 같은 도덕 경제나 도덕적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량한 사람은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한때 자신과 함께 군 복무를 했던 장군과 대화를 나누는 대화편인 Laches에서, 플라톤이 "용기는 영혼의 인내"라는 모토를 가진 장군을 등장시켰을 때 그가 용기의 정의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리스인들은 대담한 공격과 과감한 돌진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압박감 속에서도 버티는 사람에게 최고의 공로를 인정했다. 그들은 쓰라린 경험을 통해 스트레스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압박감 아래에서 부서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또 버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장에서 가장 큰 압박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도망가고 싶어하는 유혹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용감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견뎌낸다는 것이다.

대화편들 속에서 플라톤이 기술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가장 매력적인 초상화는, 소크라테스가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적대적인 판사들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자신을 변호하면서 가르침과 탐구를 포기하라는 압력에 저항한다. 또한 감옥에서는 스승을 탈출시킬 수 있는 수단과 뇌물을 가진 부유한 제자 크리톤의 탈출 압력에 저항한다. … 죽음이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가족에게 유언을 남기고, 제자들과 영혼에 대해, 즉 선량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토론을 벌일 수 있었다.

그리스 도시 국가는 그 자체가 압력솥과 약간 비슷했다. 그것은 작았으며, 그 안에서의 삶도 무척이나 제한되어 있었다. 압력은 도시 국가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이 정치 집단들이 항상 서로 싸우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추방하거나 퇴진시키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스 도시 국가는 항상 이웃 국가의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군사 훈련은 그리스 시민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특정 시기에 일부 도시 국가들이 용병을 고용하거나 병력을 임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들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열등하고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도시 국가 방어의 핵심은 시민군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고, 포티다이아 전투와 델리움 포위 공격을 목격했으며, 자신이 받을 수도 있었던 용맹 훈장을 다른 사람[알키비아데스]에게 양보하기도 했다. [교수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셀프 추천이 철학자에게는 안 어울리는 까닭!]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신체 훈련을 대단히 강조했다. 이 훈련에는 미학적인 목적도 있었다. 잘 다듬어진 몸매가 보기에도 좋지 않은가.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체육은 승리, 즉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평화 시에는 경쟁적인 스포츠 게임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삼았다. 그리스식 체조는 군사적 숙련도를 향상시키는 데 유리했다. 스파르타의 유명한 운동 중 하나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공격용 무기인 창과 단검을 휘두르는 데 필요한 민첩성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적의 찌르기 공격을 피하는 기술을 향상시켜 주었다.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하버드에서 강의하면서 플라톤이 오늘날 우리나라에 온다면 먼저 철학자가 아니라 챔피언급 권투 선수를 만나자고 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의 시대에는 드물기는 했지만 도시 국가들 간에 몇 차례의 주기적인 스포츠 경기가 있었다. 올림픽 게임은 이러한 대회 중 가장 유명했다. 사실, 이 게임은 그리스인들에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해도 이 기간 만큼은 서로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도 했다. 오늘날 일부 교육자들은 경쟁이 우리 아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 즉 청소년기에 경쟁 정신을 개발하는 것을 피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전문가들이 스스로 존경한다고 공언하는 휴머니즘을 지녔던 그리스인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경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탁월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좌우명은 “ai en aristeuein”, 즉 “항상 최고가 되어라”였다. 그들의 공적인 경기대회에는 달리기, 점프, 창 던지기, 복싱, 레슬링뿐만 아니라 음악, 시, 문학, 드라마 대회도 포함되었다. 플라톤의 가장 유명하고 재미있는 대화편 중 하나인 『향연』은 진행자 Agathon이 최고의 비극을 써서 방금 수상한 상을 축하하는 파티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스인에게 경기의 핵심은 agon, 경쟁, 스트레스, 압박, 이기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이미 고대의 전설적 인물이었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음악과 과학 모두 스트레스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한 사실을 지적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거문고의 현이 금속 핀과 후미 판자의 고정 장치에 의해 두 방향으로 당겨져 악기의 공명판 위에서 조화로운 비율로 늘어날 때 하모니를 발산하듯이, 그리고 당겨진 활의 긴장이 비교적인 안정성이나 영속성을 낳듯이, 세계 자체가 서로 반대되는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지식인들은 그리스 신전이 주는 아름다운 안정감을 완벽하게 계산된 건축학적 스트레스의 산물로 여겼다.

격투기 교육은 아니라도 예체능 교육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https://youtu.be/yoMKs86ayf0

 

1960년 나는 나중에 정치-군사적 정책 결정에 대한 임무를 준비하기 위해 2년 동안 정치/역사/경제학을 공부하도록 스탠포드 대학에 파견되었다. 나는 대체로 그 전공들에 대해 무관심해졌는데, 많은 교과목에서 담당 교수가 여기서부터는 철학적인 문제들입니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되돌아가 보죠.”라고 말할 때 나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예상되는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2년차 때 지도교수에게 사각형 대학 건물의 코너에 있던 철학과의 일부 과정에 등록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는 내 제안에 결연히 반대하며 그것은 시간 낭비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철학]은 매우 기교적인 전공입니다. 그 사람들의 독특한 어휘를 배우는 데만 두 학기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내가 고집을 부리자 마침내 그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했다.

 

첫날 아침에 내가 회색 머리에 사복 차림으로 철학과의 복도를 헤매다가 열려 있는 사무실에 들른 것은 행운이었다. 사무실 담당자가 내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내가 공식적으로는 인문대 대학원생이지만 아무런 철학적 배경이 없다고 말하자 그는 거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해군 장교라고 말하자 그는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는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 복무했었다고 말했는데, 그의 이름은 필립 라인랜더(Philip Rhinelander)였다. 그는 하버드대학 출신 변호사로서 진주만 전쟁 발발 이전에 여러 해 동안 보스턴에서 개업했었고, 해상에서의 군 복무를 자원했었으며 나중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에서 하버드 학장직을 마친 후 그는 자진해서 강의실로 돌아왔다. 그는 "선과 악의 문제들"이라는 두 학기 "개인"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욥기("인생은 공평하지 않다")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그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고 취약한 철학적 배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매주 한 시간씩 개인 지도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철학과는 다른 학과들과 얼마나 다른가! (내 경험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는 박사 지원자들이 지도교수 연구실 밖에서 몇 시간 동안 앉아 단 10분 간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나는 라인랜더의 수업, 특히 매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우리가 마지막 세션을 마치고 헤어질 때 그는 책장으로 다가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당신은 군인이죠.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의 기념으로 이 책을 가져가세요. 이 책은 당신이 당신 직업에 적용할 수 있는 도덕 철학을 제공할 겁니다." 그것은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이었다. 그날 밤 나는 내 선물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내 경력에 적용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전투기 조종사, 조직책, 젊은 비행사들의 동기 부여자, 마티니 술꾼, 골프 선수, 기술자였다그런데 고대 철학에 관한 이 누더기 책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 등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비롭게 말해 나는 그 책이 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책을 거의 다 읽고 기억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단지 내가 한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스승으로서 존경하는 한 남자가 나에게 준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인랜더 교수에게 작별 인사를 한 지 약 3년 후, 나는 공군 사령관으로서 북베트남에서 둘째 전투 작전을 벌이던 어느 9월 아침, (화재 경고, 유압 장치 고장, 전기 고장 등) 모든 고장 신호가 켜졌을 때 무거운 대공포 속에서 목표물을 제거했다. 내가 나무 꼭대기 위로 속도를 내자 내가 비행 통제를 잃었다는 것이 즉시 분명해졌다. 반사 작용으로 나는 커튼을 당겨서 탈출했고 거의 그와 동시에 마을 거리 위 200피트 상공에 매달렸다. 소총 사격 소리와 내 귀를 스치는 총알 소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침묵 속에서 말이다. 나를 도와주세요.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 속으로 착륙하기 직전 그 몇 초 동안 내게 두 가지 생생한 생각이 떠올랐다. (1) [포로로서 적어도] 5년을 기다려야 하겠구나. (나는 베트남이 처한 딜레마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현대 극동 역사를 충분히 연구했었고 남쪽의 전방 항공 관제사들과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었다나는 2년 반 만에 내가 낙천주의자임을 깨달았다.) (2) 테크놀로지의 세계를 떠나서 에픽테토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로구나.

 

라인랜더 교수의 농담에 따르면, 스토아 사상가들의 세계관은 그들의 환경이란 인간의 의지만이 유일한 구원인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는] 전기톱이었다. 나는 (1969년 늦가을 고문과 강탈 기계가 정지될 때까지) 진짜 전기톱과 싸우며 4년 이상을 보내야 했고, 원시적 적대 국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단순한 박탈 상태의 구금을 3년 이상 더 견뎌야 했다. 모두 합쳐서 4년은 독방에서 지내야 했고, 그중 거의 절반은 족쇄에 묶여 지내야 했다.

 
 

전쟁포로로서 극한 경험을 견뎌낸 베테랑의 스토아 철학에 대한 애정이 깊은 울림을 주는 글, Thoughts of a Philosophical Fighter Pilot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