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섹션에서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과학이 원칙적으로 우주의 모든 사건과 사물에 대해 완전하고 실제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을 낳는다. (i) 과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주가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무의미하다는 믿음을 가질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비록 기독교적인 세계상을 교육받고서 그 세계상을 받아들일 경우, 많은 개인들에게는 그것, 즉 과학적 세계관이 우주와 인간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믿는 유일한 또는 주요 원인이 될 수는 있더라도 말이다. (ii) 과학적 설명은 잠정적이고 불완전하며 종교적 설명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비관적인 믿음을[인생에는 의미가 없다라는] 거부하는 것은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과학이 제공하는 설명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에는 목적이 없고 따라서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더 많이 도달하게 된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천문학은 우리의 지구가 약 6000년 전에 특별한 계기를 통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셀 수 없이 많은 시간 동안 공간을 목적 없이 회전했던 뜨거운 성운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친다. 그 성운이 냉각되면서 태양과 행성들이 형성되었다고 말이다. 이 행성들 중 하나에서 특정한 시기에 순조로운 상황이 전개되었고 생명이 발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건이 미래에도 생명에 유리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태양계가 늙으면 태양은 식고 지구는 얼음으로 뒤덮이고 모든 생물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또 다른 이론에 의하면, 태양이 폭발할 것이고 그때 생성된 열이 너무 커서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가 파괴될 것이다. 이것이 지상의 생명체에 관한 비교적 짤막한 역사와 전망이다. 무생물인 우주의 끝없는 역사와 비교할 때 이 모든 역사를 다 합해도 아주 미미한 것이다.
생물학은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종이 특별히 창조된 것이 아니라, 생명 형태의 진화에 따른 변화의 긴 사슬에서 마지막 연결 고리일 뿐이며, 신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유인원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주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에 기여하기보다는 기껏해야 무관심하며, 최악의 경우 잔인할 정도로 적대적이다. 진화는 그 작동 결과로서 인간을 출현시켰으며, 서로 다른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투를 의미한다. 한 종은 다른 종에 의해 먹어치워지고 가장 적합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인간은 가장 온화하고 가장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존에 가장 적합했고 가장 효율적인 생물이었을 뿐이다. 가장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살인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또한 인간은 이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괴물 같은, 야만적인 세상에서 고통, 질병, 박해, 전쟁 또는 기근이 없는 짧은 시간 동안 찰나의 기쁨을 낚아채려고 미친 듯이 애쓴다. 그러다가 마침내 생명은 죽음으로 소멸한다. 과학은 우리가 이 세계를 알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과학이 이 세계 안에서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불평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과학은, 삶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중세의 세계상은 삶에 목적을 제공했었다. 따라서 중세 기독교인들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앗아간다.
그러나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의미의 “목적”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삶의 목적이라고 할 때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의미하는 걸까? 과학은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인간의 삶에서 목적을 박탈해 왔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 존재에서 목적이 강탈당했다고 말할 때의 목적은 그래도 무해하다는 의미의 목적인가? 인간 존재가 그런 의미에서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두 가지 의미란 무엇인가? 첫째의 그리고 기본적인 의미에서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네가 [그것에] 불을 붙여놓은 채로 놔둔 데에는 무슨 목적이 있었나?”라고 물을 경우처럼, 사람이나 사람의 행동에만 귀속된다. 둘째 의미에서 목적은, 일반적으로 “당신이 작업장에 설치한 기계장치의 목적은 무엇인가?”와 같이 사물에게만 귀속된다. 두 가지 언어 사용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했다는 것, 즉 목적이 있는 일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서는 사물에 목적을 부여할 수 없다. 물론 이때 그의 목적은 그 사물의 목적과 동일하지 않다. 기업가가 노동자와 엔지니어를 고용하고 공장 부지와 자재 등을 구입하는 목적은 자동차를 제조하는 것이지만, 자동차의 목적은 이동수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고 팔고, 일꾼을 고용하고, 쟁기질하고, 나무를 베는 것과 같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는데, 그런 일들을 하면서 목적이 없다면 어리석고 무의미하고 아마도 미친 짓일 것이다. 목적 없이 이런 일을 한다면 그 사람은 무익하고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활동으로 가득 차 있으되 목적이 없는 삶이라면 그 삶은 무의미하고 헛되며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한 삶은 실제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이러한 의미에서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완벽히 분명하다. 과학은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어떤 목적도 빼앗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훨씬 더 큰 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비나 풍년이나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우리는 이제 얼음 알갱이, 인공 비료 또는 인공 수정법을 사용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중 의미에서 목적을 가지거나 갖지 않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에 목적이 있거나 없다고 해서 그 사물[의 가치]을 높거나 낮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는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 칭찬을 보장하지 않는다.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이 낙인을 찍게 만들지도 않는다. 농장 근처에서 일렬로 자라고 있는 나무들에게는 목적이 없을 수도 있다. 나무들이 만들어 낸 울타리가 바람막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무들은 바람이 들판을 휩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심어졌거나 의도적으로 거기에 서 있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나무가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자랐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든 나무를 폄하하지 않는다. 그 나무들에 목적이 있다면, 그만큼 아름답고 좋은 나무들이고,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물론 또 그 나무들은 바람도 막아준다.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개가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 개를 폄하하지 않는다. 양치기 개도 아니고, 감시견도 아니고, 토끼 사냥개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뒹굴고 있고, 우리가 먹이를 주는 개일 뿐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범주에 속한다. 인간에게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칭찬커녕 오히려 모욕에 해당한다. 사람을 단지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굴욕적이다. 가든 파티에서 내가 복장을 입고 있는 남성에게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 질문은 그를 기계 장치, 가축 또는 아마도 노예 수준으로 떨어 뜨리는 일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에게 추구해야 할 작업, 목표를 부여하면서 그의 바람, 욕망, 열망 및 목적을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그를 단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지 그 자신을 목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세계상과 과학의 세계상은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자는 인간에게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목적을 강탈한다. 그것은 인간을, 자신 이외의 누구에 의해 그들에게 할당된 목적이 없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것은 외부 주체가 그들에게 지정하는 모든 목표, 목적 또는 운명을 앗아간다. 반면에 기독교 세계상은 인간을 피조물, 신성한 인공물, 로봇(제조된)과 동물(살아 있는) 사이의 중간 존재, 호문쿨루스 또는 아마도 프랑켄슈타인과 유사한, 괴물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아마도 신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지고, 그들의 제작자에 의해 목적이나 과제를 부여받은 존재.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의 목적이 없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과학적 관점이 삶의 목적의 상실, 따라서 의미 상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적 관점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방금 구별한 “목적”의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과학적 세계상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삶이 헛된 것이 틀림없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이는 혼란스러운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미 보았던 것처럼 무의미함(pointlessness)은 다른 의미의 무목적성(purposelessness)에 의해서만 암시되는데, 이는 과학적 세계상이 암시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람들은 삶 가운데 목적이 없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인간은 로봇이나 감시견과 달리 목적이 있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목적을 채택하고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을 취하는 모든 사람들이 위와 같은 혼란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삶의 목적을 정말로 갈망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중세 세계상의 가장 큰 매력이란,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선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고, 자신을 그분을 숭배하는 그분의 자녀로 바라보며, 그분의 뜻에 따른 복종, 겸손, 체념으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그리고 종종 “피조물다운 느낌”(creaturely feeling)으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 적절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모든 것은, 마치 무기력한 아이가 그의 조상[어른들]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서처럼 그것과 동일한 종류의 관계에서, 물론 더 높은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존재자에 대해 서 있는 어떤 존재자에게나 어울리는 태도와 감정이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세계상을 차가우며, 동정심이 없고, 편안하지 않고, 무서운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러한 피조물다운 태도에 적절한 대상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 묘사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는 우리가 믿음이나 신뢰를 가질 수 있고, 인도에 의지할 수 있고,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숭배하거나 복종할 수 있는 존재자가 없다―다른 인간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과학적 세계상은 삶의 의미가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 그리고 예배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극심한 실망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삶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의미를 가져야 함을 의미할 뿐이다. 아이가 스스로 일어서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을 부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는 것처럼,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사람은,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친구들을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자신의 두 발로 홀로 서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가르침의 요점을 놓치는 것 아닐까? 확실히 기독교는 하나[느]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웅대하고 고귀한 목적을 말해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보장받는다고 할 때, [과학적 세계상에서] 인간의 생명이 아무리 무의미해(pointless) 보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무의미한 것(meaningless)은 아니다.
이 점은 잘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또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을 밝혀준다. 우리는 누군가가 쓸모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관심사를 초월하는 어떤 계획이나 목적의 실현을 도울 경우에도 그 사람의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자신이 곧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암과의 싸움에서 유용할 특정 실험을 자신에게 수행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남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은 아무리 보잘것없고 고통에 시달리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고 있다는 지식에 의해 의미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하느님이 세상과 그 안에 인간을 창조하신 웅대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 지성이 미약하기 때문에 거대하고 고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 있게 진술할 수 없다는, 여전히 대중적인 견해를 즉시 무시할 수 있다. 이 견해는 삶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대답을 줄 수 없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만일 누군가가 이 “대답”이 우리 삶이 무의미하고 보잘것없다는 인상에서 받는 괴로움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 그렇게 아주 심하게 괴로움을 당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그토록 많은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고려해 보면 두 가지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이 세상의 수많은 부당한 고통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만큼 충분히 웅대하고 고귀한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읽을 때 필연적으로 큰 실망에 휩싸이게 된다. “ … 역사는 인류의 전체 역사를 포함하는 신성한 목적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나사렛 예수가 그 목적의 중심이시다. 계시로, 성취로, 즉 지나간 모든 것의 성취로, 또 장차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한 약속으로 … 만일 그 신이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분이 이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면, 왜 만드셨을까? 그분은 시간, 공간, 물질, 인과 관계의 범주로 묶인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사랑에 대해 자유롭고 자발적인 사랑과 섬김으로 응답하는 유한하고 구속된 영들의 교제를 영원히 누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을까? 사랑받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과분한 고통의 양을 피조물에게 부과하는(또는 부과해야 하는) 하나의 신이 과연 전지하고 전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음과 같은 훨씬 더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의 목적은 극적인 이야기의 관점에서 기술되어야 하는데, 그 중 많은 사건들이 우리가 더 이상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종교적 개념과 관습을 상징한다. 어떤 나무의 열매에 대한 금기, 그 금기를 어겨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와 죄책, 하나님의 분노, 아담과 하와와 그들의 모든 자손들에 대한 저주, 낙원에서 쫓겨남,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의 희생으로 대신하신 속죄, 그리고 그와 같은 하느님의 은총의 성사를 통해서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해짐 (이에 부수적으로, 사제의 귀한 권세를 세워 죄를 사하게 함으로써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일), 심판의 날에 양이 염소와 구분되어 염소는 지옥 불에서 영원한 고통의 저주를 받는 일.
분명히,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부당한 고통을 정당화할만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공식화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이제 우리는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선하신 하나님이 왜 그런 우주와 그런 인간들을 창조해야 하는지뿐만 아니라, 어째서 나약하고 의지가 박약하고 무지하며 탐욕스러운 피조물의 모든 움직임을 예견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셨어야 하고, 그렇게 하신 후에 그들의 죄에 대해 분개하고 분노해야 하셨는지, 또 어째서 그분은 그 죄를―단지 그의 명령들 중 하나에 대한 불순종이었던―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또 어째서 이 속죄와 그에 따른 구속(救贖)이 낙원으로의 귀환으로 이어질 수 없는지―특히 아직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어린이들이. 그리고 어째서 심판의 날에 이 자비로운 하나님이 일부 인간을 영원한 고통에 처하도록 저주해야 하는지.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과 기타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의미 있게 말할 수 없다는 첫째 견해로 반복해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오늘날엔 내가 제시한 세계의 극적인 역사를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는 이의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내가 언급한 것은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영국 국교회의 많은 교회들이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교리이며, 개신교 역시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그림을 바꾸지 않았다. 사실 개신교는 면죄부, 성례전, 기도 등 기독교 종교의 특정 요소에 관한 중세 가톨릭 해석의 의례적이고 마술적인 성격을 거부하되, 은총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또 “신앙만으로 의롭게[Justification, 정당화] 됨”을 주장함으로써, 개인의 공로에 관해 가톨릭이 강조하여 표현했던 중세 기독교의 도덕적 요소를 훼손했다. 개신교는 은혜와 개인의 공로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은 성 어거스틴으로 되돌아가서 칼벵의 예정론(보통 과학탓으로 돌려지는 엄격한 결정론의 지적인 부모)과 구원 또는 영원한 정죄의 길을 열었다. 로마 가톨릭, 루터교, 칼뱅파, 장로교 및 침례교가 공식적으로 방금 설명한 견해에 동의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견해를 지지하거나 마땅히 지지해야 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아마도 여전히 최선의 견해와 대부분의 현대적 견해는 이상의 내용과 완전히 다르다는 이의 제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주장의 정확성에 대해 명확히 선언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Braithwaite 교수의 견해 같은, 가장 훌륭하고 가장 현대적인 견해는 참일 가능성이 클텐데, 그는 기독교를 거칠게 표현하자면, “도덕에다가 이야기를 보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이야기는 엄격한 도덕적 가르침을 그저 더 쉽게 이해하고 더 맛갈나게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 이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면 성경에 나오는 극적인 이야기의 본성과 중요성에 대한 현대적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최선의 것일 수 있겠다. 나의 대답은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반증하고자 하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즉,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물음에 대해, 압도적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지지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의미 있는 대답을 추출해 낼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더군다나 그들 기독교도들은 그러한 모더니스트적 해석을 적어도 과학적 설명만큼 분개하여 거부할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견해가 아마도 전통적인 이야기가 지닌 최악의 부조리 중 일부를 피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와 그 안에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진술할 수 있는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양의 부당한 고통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히 웅대하고 고귀한 목적을 찾아야 하는 난관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쟁을 위해 이러한 모든 이의들을 제처두자. 어떤 형태의 기독교도 극복할 수 없는 한 가지 근본적인 장애물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인간에게 우주에 대해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기독 종교의 기본 요소는, 최고로 숭배받을만한 존재에 대한 숭배의 태도다. 또한 그러한 존재를 보유한 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며 완전한 의존, 경외, 예배, 신비 및 자기 비하에 대한 지식이나 느낌으로 영감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적 감정과 경험이라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대상, 즉 “[나와] 완전히 다른 타자”는 고양되는 반면, 주체의 지위는 극한으로 전락하게 되는 양극성(저 유명한 “나-너 관계”)이 존재한다. 루돌프 오토는 이것을 “피조물의 느낌”(creature-feeling)이라고 부르며, 아브라함이 소돔 사람들을 위해 감히 간청할 때 한 말을 인용한다. “보라, 내가 주께 말하기를 티끌과 재에 불과하도다.”(창세기 XVIII. 27).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도덕성의 전제 가운데 하나와 양립하지 않는 태도를 요구한다. 우리는 은혜의 개념이 총체적인 의존에 관한 주장과 개인의 책임에 관한 주장(부분적인 비의존)을 조화시키려는 기독교적 시도임을 보았는데, 그러한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우리는 원죄에 관한 교리, 영원한 지옥불에 관한 교리, 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교리 등을 과장되고 주변적인 것으로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태도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총체적인 의존에 관한 교리를 거부할 수 없다.
Kurt Baier, “The Meaning of Life”, in Nancy S. Jecker(Ed.), Aging and Ethics. Philosophical Problems in Geront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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