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hur W. Frank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윤리적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 신체는 궁극적으로 도덕적 문제, 아마도 개인이 해결해야 할 바로 그 도덕적 문제일 것이다”(Frank 1995, 29).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선택하거나 신체가 쇠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생 동안 우리 자신이 되어가는 신체와 우리가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Frank는 그렇게 하는 여러 가지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방법을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먼저 신체에 대한 통제 능력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건강한 신체는 예상대로 기능한다. 건강은 프랑스 외과의사 René Leriche(1936)가 언젠가 유명하게 정의한 것처럼, 비-경험, 즉 장기의 침묵(le silence des organes)으로 경험된다. 이에 반해 질병이나 영구적인 기능 상실(요실금, 기억 상실, 떨림, 발작)은 압도적인 폭력 또는 반역 행위로 경험될 수 있다. 신체는 명백한 예측 가능성을 상실하고 임의의 우발 상황에 종속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과 신체를 분리하여 신체를 생존을 위한 도구, 수단으로만 보기로 결정할 수 있다. …
장기간의 질병과 극단적인 치료를 겪고 나면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를 “그것”으로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Frank(1995, 41)는 “병든 신체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며,” “주인”의 무시, 비웃음, 수치의 대상이 된다고 적었다. 그러면 신체는 Frank가, 모든 관계성에서 격리되고 철수된 모나드적 신체(monadic body)라고 부르는 것으로 변한다. 관계성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긴 하지만 숨겨져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이나 자신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와의 관계가 비-관계가 되는 것이다. 질병과 장애에 시달린 노인들은 악화된 신체 상태를 부끄러워하여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 한 예가 Michael Haneke의 오스카상 수상 영화 Amour(2012)로, 이 영화에서 80대 부부인 Georges와 Anne은 Anne이 뇌졸중을 앓은 후 아파트 문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고통까지도 포함하여 신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로 선택함으로써 응답할 수도 있다. Frank는 이것을 이원적 신체(dyadic body)라고 부른다. “이원적 신체는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Frank 1995, 37). 많은 노인들은 마치 자신이 눈에 띄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무채색의, 폼 안 나는 옷을 입는다. 그러나 자신을 자신의 신체와 연관시킨다는 것은 그것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또 그것을 여전히 자신과 타인을 위한 욕구와 기쁨의 장소로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1980년대에 알게 된 네덜란드 작가 Josepha Mendels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반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80을 훌쩍 넘긴 그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파리에 있는 아파트를 나서곤 했을 때, 같은 집의 친구들은 로비에서 그녀를 보고 탐탁치 않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아, 부인, 아직도 환심을 사고 싶으세요?”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보여지기 위해 윤리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원적 신체를 갖는다는 것은 연인처럼 몸을 돌보고, 먹이고, 애무하고,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
철학자 Nicolas Wolterstorff(2011, 97)는, 세상과 타인에 대해 돌보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전제한다고 썼다. “자아에는 이중성이 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 당신이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미워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한다. [… ] 나-너 관계는 자아에 대한 내면적 관계다”(Wolterstorff 2011, 98). 그러므로 나의 책 말년을 사랑하기에서 나는 성경의 사랑의 계명을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네 이웃을 또 다른 자아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너 자신을 다른 이웃처럼 사랑하라”(de Lange 2015).
사랑은 다양한 얼굴을 지닌다. “누군가의 선을 증진하기를 원하는 것”(Wolterstorff의 사랑 정의)은 때때로 누군가에게(아이들에 대한 것처럼) 애착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한 (친구와 친척, 또는 성경적인 넓은 의미의 이웃을) 돌보는 관계, 또는 누군가에게(연인으로서) 끌리는 것 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늙고 허약한 몸은 종종 이 세 가지 형태 모두에서 욕구하기와 욕구되기를 중단한다. 그러나 이는 연령차별주의자의 편견이 암시하는 것처럼, 노년의 본성에 어떤 식으로든 내재적인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노인들도 여느 인간처럼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 의지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고령에 이르면 이 같은 인간학적 사실이 자연스러움을 상실하게 된다. 프랭크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병으로 지쳐 있던 Anatole Broyard를 인용한다. 그는 그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방식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기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닦거나 새 신발을 사는 것을 중단했다(Frank 1995, 39).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구될 수 있기를 중단했다. 그러나 90대의 폴 리쾨르가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자신의 연약하고 허약해진 몸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유쾌하게 소통했던 것처럼, 반대 사례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프랭크는 질병과 신체 장애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 자신과 신체의 관계에 대한 규범적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늙고 손상된 신체가 가능한 한 오래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답을 찾도록 도와준다. 프랭크는 고립되고 숨어 있는 모나드적 신체와 대조될 뿐만 아니라 나르시스적인 허영심에 빠질 위험이 있는 이원적 신체와도 대조되는 것으로서, 때때로 나타나는 폭력적인 적대감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의사 소통적 신체(communicative body)를 구별한다. 당신의 말년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한 말 그대로 낯선 신체가 되어가는, 제어 불가능한 신체와 우정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해 수치스러워하거나 감탄하는 대신, 소통하는 신체란 자신의 신체,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과 자애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그저 이론적인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 예를 제시하겠다. 대중 앞에서 빛을 발하는 강하고 힘센 남자였던, 나의 가까운 동료가 60세에 뇌종양 진단을 받아 한 달 만에 심각한 마비와 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일을 하지 않았다. 즉, 직장을 그만두고 공직에서 물러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것 말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 희망과 기쁨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계속 소통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공개 행사에 참석했고, 그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종양이 그의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을 때조차도 청중에게 연설했다. 나는 그가 계속해서 공개적인 자리에 참석할 것을 결정한 것도 자신의 아픈 몸에 긍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
응답적 인간학(a responsive anthropology)의 근본적인 질문―우리가 이러저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했을 때 우리는 무엇에 충격을 받으며, 또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다른 사람은 다른 자아로서 나에게 영향을 준다. 그 사람은 나와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그 또는 그녀는 나를 놀라게 할 수도 있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를 압도할 수도 있고, 단순히 요청이나 약속으로 나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신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도 파토스적(pathic)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을 때, 그들은 내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미리 정해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고정된 규칙을 따르지 않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나의 새로운,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응답을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Waldenfels는 호소와 주장이라는 이중 의미를 지닌 독일어 Anspruch를 사용함).
이 응답성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반성적으로 취하거나 귀속시키는 도덕적 책임에 선행하는 것이다(Waldenfels 2006, 57). 응답적인 윤리학은 이 근본적인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책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수정 사항을 제안한다(Waldenfels 2015, 425–427). 책임 개념은 법적 영역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두 가지 동기에 의해 지배된다. 첫째, 그것은 설명에 대한 부름, 그리고 논증을 통한 설명 제시의 역할을 한다. 둘째, 행동의 전가 또는 귀속을 의미한다. 관련된 대화의 과정(책임)은 법정 절차[소송]에서 잘 알려져 있지만, 유대-기독교 전통은 책임 개념을 도덕의 영역까지 포함하도록 확장시켰다. 이 개념은 세 가지 본질적인 특성을 포함한다. (1) 우리는 자유 의지나 태만(전가, 행위의 귀속)으로 인해 말하거나 행한 무언가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2) 법정이든 그밖의 경우에서든 우리는 누군가에게 또는 그 누군가의 면전에서 책임을 지게 된다. (3) 우리는 자신을 책임 있는 사람으로 정당화한다.
응답적 윤리학은 책임 개념의 세 가지 측면 모두에 어떤 제한을 추가한다. (1) 법적 또는 도덕적 책임의 귀속은 항상 사후 전가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당신이 실제 행동으로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책임은 기존 규칙 및 절차의 순서에 우선한다. (2) 책임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모든 질서는 우연적이다. 책임은 항상 상대적이며 변경될 수 있다. “실천적 판단은 확실히 이유에 기반을 두지만, 우리가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는 한 충분한 이유에 기반을 두지는 않는다”(Waldenfels 2015, 427). (3) 응답적 윤리학은 주체가 항상 “자기 집의 주인”(Sigmund Freud의 말에서)이라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거나 책임을 질 수 없도록 만드는 우리 자신의 낯설음(Fremdheit)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책임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상태에 의해 손상될 수 있는 완전한 도덕적 행위 주체성을 맘대로 처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윤리적 원칙 “당위는 능력을 함축한다”가 적용된다. 책임에 관한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이러한 주의 사항은, 책임을 판단하고 부과하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겸손함을 시사한다.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관한 윤리적 판단중지(Husserl) 말이다. Waldenfels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타자로부터 받는 단일한 요구는, 모든 사람의 주장에서 발생하는, 타당성에 관한 보편적인 주장과는 다르다 [...]. 도덕성은 더 이상 당연시될 수 없다.”(Waldenfels 2015, 425). [도덕적 책임도 개인 및 상황에 맞춤형이 되어야 한다? 상황윤리?]
응답성과 책임의 관계가 어느 정도 명확해졌으므로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노년에, 우리의 보살핌을 요구하는 다른 사람들의 부름이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사람들의 보살핌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부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의 책임은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사람의 책임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소 급진적으로 바뀐다. 우리의 소셜 네트워크는 점점 작아지며, 파트너, 동료, 가족, 이웃과 같은 중요한 다른 사람들의 모임에 집중된다(Carstensen et al. 2003). 관계의 양은 감소하지만 동시에 그 중요성과 취약성은 증가한다. 우리는 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노년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신체적, 의료적, 정서적, 사회적인 보살핌[돌봄]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그러하다. 그러한 보살핌에 대한 책임은 세 당사자에게 분배되어야 한다. 첫째, 자신 그리고/또는 집안의 다른 사람들, 주로 배우자; 둘째, 그들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 배우자, 가족, 특히 비공식 돌봄을 제공하는 성인 자녀;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돌봄(사회 보장, 의료)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 전체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책임지는가? 응답적 윤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책임을 전가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상황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며 대화와 협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건강, 도덕적 주체성, 사회적 네트워크, 사회경제적 지위, 문화적 전통과 관습을 고려하여 민주적 절차로 해결되어야 하는 정치적 문제다(Tronto 2013). 누가 누구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는(Who should take care of whom and how), 어디서, 누구와, 어느 커뮤니티에서, 어떤 시기에 실제로 살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should’를 사실의 문제로 간주하는, 나이브한 주장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비공식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일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 제공자―그게 누구든―의 실존적 결단, 따라서 상당한 정도의 용기를 전제로 한다.]
노년기의 보살핌에 관한 책임 분배에 대해서는 “일률적인” 이론도 없고, 자연적으로 미리 정해진 답도 없다. 나이 든 부모를 성인 자녀가 가장 먼저 돌보는 것이 자연법칙이라는 보수적인 생각은, 자연주의적 오류로 치부해야 한다. 노년기에 대한 책임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상호 평가의 문제(a matter of mutual assessment)다. 어떤 결정적인 지식이나 외부 권위를 주장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공정하고, 비폭력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한 협상 과정을 위해 규칙을 설정하고 감독하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윤리학의 임무다. 윤리학적 지식은 도덕적 영역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원칙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실천 내에서 지켜야 하는 공정성의 원칙에 대한 지식이다. 책임에 대한 맥락적 접근에서 도덕성은, 책임을 할당할 때 반복적으로 계속 협상해야 하는 분배의 코드로서 기능한다(Urban Walker 1998). [저자가 적어도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응답적 윤리학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결론이, 노년의 책임 문제를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협상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 정치적 협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라는 얘기? 그렇다면 협상의 스킬, 권력상의 서열 뭐 이런 게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글을 대단히 철학적으로 시작해서 상당히 비철학적인 결론으로 나아가려는 것만 같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의 정치적 분위기와 모순된다. 정책에 상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모든 서유럽 국가에서는 주로 노년기 돌봄을 개인이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내에서 스스로 조직해야 하는 개인 및 사적 책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국가는 국가 및 지역 차원에서 노인들의 재정적 독립과 사회적 자립을 자극하고 동기화 시킨다. 공식적인 돌봄은 시장이 통제하는 상품으로 간주된다. 당신이 돌봄을 필요로 한다면 비용을 지불하라는 식이다(Timonen 2017).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노인들은 적극적인 시민처럼 행동해야 하며 자신의 건강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노년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개인의 능력, 신체활동, 자립에 달려 있다. 피할 수 없는 노년의 쇠약함은 더 이상 운명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위험으로 간주된다. “책임질 수 있는 노화”(responsible aging)의 개념이 이러한 관점을 보여준다. 이는 노인들이 과거에 했던 모험과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관점으로 과거의 삶을 바라보아야 함을 뜻한다(Edmondson 2015, 30). …
“책임화”라고 불리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촉진은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합리성의 핵심이다(Rose 2007). …
이 책임화 담론에는 책임에 대한 징벌적 개념이 포함된다. 책임은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담론에서는]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든 책임을 지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책임을 떠맡아야 할 최종적인 이유가 다른 사람들을 책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에 관련된다”(Munk 2017, 23). [자유주의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공격하는, 조금은 무책임하게 들리는 발언 같다.] …
책임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아이디어는 응답적인 노화의 현상학적 현실에 대한 정직하고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의 책임이 돌봄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에서 생겨나야 한다는 것, 책임에 대한 기준은 부수적이며 모든 상황에서 새롭게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노쇠한 노인은 일차적으로 주권적인 소비자라기보다는 의존적인 개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종종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며 정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율성과 권한을 결여하고 있다(Davey 2002; Katz 2013). …
책임은 “가족의 삶 속에서 보살핌과 상호주의에 관한 기존의 관계, 약속, 기대 또는 문화적 가정”에 기반한다(Newman and Tonkens 2011, 172). 책임은 정치-법적 귀속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Newman and Tonkens 2011, 172, 182). 책임을 완수하려면, 특정 관계의 맥락에서 다양한 실천적, 정서적, 도덕적 딜레마를 협상하고, 우리 자신, 우리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 일반화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하나마나한 얘기다. ∵ 협상은 권력을 전제하며, 최소한의 책임을 주장하거나 아예 협상 테이블에 앉기 자체를 거부하는 막무가내식 당사자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것은 실제로 노년기 돌봄에 관한 책임 분배에 대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사람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정신적, 도덕적 주체성을 지니는 한 자신의 웰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또한 한때 삶을 공유하기로 결정한, 도움이 필요한 배우자에 대한 비공식적 보살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이것이 실제 고통과 괴로움을 수반하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돌봄의 부담이 감당할 수 없게 되면(예컨대 배우자가 치매를 앓거나 말기 병에 걸린 경우) 책임감을 여전히 느끼더라도, 실제로 온전하게 책임을 질 수는 없게 된다. 여기서도 “당위는 능력을 함축한다”는 원칙이 대략적인 법칙으로 적용된다. …
후기 근대 사회는 노인 돌봄을 효도의 책임으로 선언함으로써 전통적인 전근대 사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응답적 윤리학은 이 같은 겉보기에 보편적인 책임의 기준이 가지는 우연성을 인정한다. 혈연에 특별한 책임이 따른다는 가정은 매우 의심스럽다. Robert E. Goodin과 나는 다른 관점을 택한다. Goodin에 따르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특별한 책임은, 신체적 그리고/또는 정서적 근접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특히 나의 행위 주체성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취약성에 기반을 둔다. “특별한 책임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존하고 있고 당신의 행동과 선택에 특히 취약하다는 사실에서 파생된다”(Goodin 1985, 33). 이 주장은 물리적 또는 정서적 근접성이 없는 상황에서도 유효하다.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오직 당신만이 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근접성이 아니라 의존성이다. [매우 적절한 주장인데, 과연 앞의 서술과 무리 없이 연결되나? “협상”이라는 용어 선택은 이 글의 패착!]
이런 식으로 바라볼 경우, 연약한 부모와 성인 자녀 사이의 장기적인 관계에서 책임이 작동하는 방식이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그들은 인생을 공유하며 특정한(specific) 필요성에 관한 상호 의존성을 만들어 간 사람들이다. 노년기에는 부모-자식이라는 지울 수 없는 관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역할과 지위가 덧없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Urban Walker 1998, 91). 강한 혈연 관계에는 나름의 증거가 있을 수 있지만, 책임은 여기서 생물학적 근접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공유한 인생으로 인해 발생하는 특정한 취약성에 기반한다. 부모는 특히 노년의 곤란함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 받거나 손상을 입을 때, 자녀의 정서적 지원에 의존한다. 자녀들은 신체적, 정서적 친밀감을 통해, 그리고 과거 이야기를 말하고 기억하거나, 의미 있는 장소를 함께 방문하는 등의 방식으로 부모의 서사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원한다(Goodin 1985, 83–85). 이러한 방식으로 제공되는 보살핌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전기적인 관계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강조한다. [Who will deny this? But is there anyone who really wants to put this into practice?]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독특한 취약성(a particular vulnerability)과 특유의 의존성(a specific dependency)이다. 다른 종류의 지원(재정, 행정, 기술, 준의료)은 필요한 전문 지식을 갖고 있어서 이러한 필요에 대해 구체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제공해야 한다. … 이러한 이유로 노인에 대한 비공식적 돌봄의 한계를 고려하여 책임을 혼합하여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도덕을 역동적이고 문화적인 실천으로 이해하면, 책임 할당에 있어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취약성과 의존성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우연적 요소들이다. “노인을 돌보는 것과 관련된 권리와 책임은 스펙트럼에 걸쳐 작용한다. 돌봄은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 가족과 가정 내에, 다른 쪽 끝에서는 주 및 제도적 환경 내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Milligan 2009, 58). 돌봄 환경이 변함에 따라서 돌봄의 책임은 지속적으로 재협상되어야 하며 전통적인 기대는 정당한 이유로 도전받을 수 있다. …
Nel Noddings는 돌봄 윤리를 계획하면서 비대칭적인 돌봄 관계 안에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상호성이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봄의 관계가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돌봄은 보살피는 자와 보살핌을 받는 자라는 두 당사자를 포함한다. 두 입장 모두에서 충족되어야 그것은 완전한 것이 된다.”(Noddings 1984, 68).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보살핌을 어떻게든 “수용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도 그 돌봄 관계 내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공개함으로써 말이다. …
복종한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인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리고 의식적인 감사의 행동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돌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Noddings의 관찰은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다. 돌봄 관계는 “돌봄을 받는 사람의 인정(recognition)과 자발적인 응답(response)을 필요로 한다”(Noddings 1984, 78). “돌봄을 받는 사람은 돌봄 관계 속에서 더 온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실제로, 이처럼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그가 그 돌봄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주요한 기여다. 이것은 돌보는 자에 대한 그의 찬사(tribute)이지만 찬사로 전달되지는 않는다”(Noddings 1984, 73).
아무 생각 없이 감사하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고, 이러한 수용성을 자기 이해에 접목시키는 것도 노년의 미덕이다.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 아마도 처음으로 자신의 의존성과 급진적인 취약성을 공공연하게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것은 죄책감이나 기분이 상하지 않고 선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포함한다.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여부는 당신이 당신을 압도하는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Frits de Lange, “Responsive Aging. An Existential View”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