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3 (홍상희,박혜영 역)

Kant 2022. 8. 26. 17:12

노년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노년 속으로 몸을 던져 버리는 태도를 정신과 의사들은 그리브이즘[gribouillisme, 피하고 싶은 난처한 일에 어쩔 수 없이 뛰어들고 마는 미련스러움을 일컫는 말]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한 술 더 떠 과장을 하는 것이다. 다리를 약간 전다고 중풍이라도 걸린 듯한 시늉을 하고, 귀가 약간 들리지 않는다고 아예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능들은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해 더 악화되고 만다. 불구자인 체 하다가 정말 불구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반응이다. 물론 정당한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많은 노인들은 무언가에 원한을 품고 있으며, 요구가 많고 절망한다. 그들은 자신의 수족 장애를 과장함으로써 남에게 분풀이를 한다. 이와 같은 예는 양로원의 노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인들의 이런 경향을 억제시키려 들지 않기 때문에―그들을 돌보지 않으므로―많은 노인들은 병상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난다. ...

 

대체로 철학자의 사고는 나이와 더불어 풍부해진다. 그는 젊었을 때 또는 장년기에는 독창적인 직관을 갖는다. 예외적으로 칸트는 50세 이후에 직관력을 가졌다. 직관의 논리적 귀결들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의 전체성과 주체로서의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그 이외에 그 어떤 다른 목표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끝없는 계획이다. 일단 하나의 구조가 확정되면 철학자는 그에 대해 평가에 필요한 거리를 취한다. 이 거리는 그로 하여금 그 구조를 비평할 수 있게 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해결점들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철학자 헤겔의 경우는 작업의 성격 자체에 의해서 진보가 정지되었던 경우였다. 헤겔의 체계는 그의 나이 60세쯤에 닫혀버렸다. 그는 세계의 흐름을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확신하고 스스로를 역사의 종말에 세워놓았다. 완결된 작품은 새로운 발전을 허용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의는 외부에서 생길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 체계는 열린 상태였으며, 철학자의 말년에는 비록 가장 풍부하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스스로의 철학 체계를 풍부하게 했다. ...

 

예술가들의 경우, 특히 화가나 작곡가는 나이가 오히려 독창적이고 위대한 작품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바흐, 베토벤,베르디, 스트라빈스키; 조반니 벨리니, 티치아노, 프란츠 할즈, 구아르디, 모네, 르누아르, 세잔, 보나르, 고야 등...

 

죽음은 사르트르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노년을 이 범주에 넣었다. 대자는 거기에 도달할 수도 그것을 향해 자신을 투사시킬 수도 없다. 죽음은 내 가능성들의 외적인 한계이다. 내 자신의 가능성이 아니다. 나는 다른 것들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이지 나 자신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게 되면 그 죽음은 타인에게 죽음인 것이지 내 자신에게 죽음은 아니다. 내 안에 죽는 자는 타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타인들이 나를 보는 관점을 취하여 내가 늙는 것을 알 듯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 앎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며 외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나의 죽어야할 운명은 어떠한 내재적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나 자신을 하나의 타자로 여기는 한, 나는 나의 예측들, 나의 결심들 속에 실제적으로 내가 죽어야할 운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지는 못한다. 나는 환상을 통해 죽음에 접근할 수 있다. 나의 시체와 슬픈 장례식을 상상해볼 수는 있다. 나는 나의 부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상상하는 자 또한 나이다.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이면과 같은 내 계획들, 그 심장부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죽음을 실행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

 

세상이 변화하거나 혹은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때, 젊은 사람은 변화의 희망을 간직한다. 노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아나톨 프랑스, 웰즈,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죽음만을 원한다. 다시 말하면 노인은 자기 자신의 상황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그 상황을 초월하고자 하는 희망을 감히 품을 수 없는 것이다. 공쿠르(Goncourt)는 1894년 4월 3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계속되는 고통에 시달리는 나의 상태, 매주 연속되어 일어나는 발작들, 나의 마지막 문학적 시도들의 실패, 어떠한 재능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압도적인 성공, 그리고 가장 친밀한 우정의 깊이에 대한 어떤 불신,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죽음은 이제 몇 년 전보다 그리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노인에게 어떤 특별한 불행이 갑자기 다가오지 않을지라도 그는 일반적으로 살 이유들을 상실했거나, 살아갈 이유들이 없음을 발견한다. 죽음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계획들 외에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이변이기 때문이다. 행동하고 시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죽음이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떤 노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죽음에의 체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모, 피로를 이유로 내세운다. 그러나 사람이 근근히[이]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노년에 이런 느릿느릿한 생활에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하는 것이다. 생리적 쇠퇴는 초월의 불가능성, 열림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계획들을 죽여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신체적 쇠퇴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젊었을 때 세계는 의미와 약속으로 무한히 풍요롭다. 예를 들어 하찮은 사건이 무한한 하모니를 일깨운다. 후일, 우리의 미래가 짧아지면 세계는 점점 줄어들고 그 세계 속에서 메아리의 진동도 점점 꺼져간다.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노인도 이러한 부동 상태에 만족할 수는 없다. 모리악(Mauriac)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온 관심을 전념하기에 충분하리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부동상태를 꿈꾼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반대를 증명한다. 그가 말년의 몇 년 동안보다 그토록 많은 글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수많은 퇴직자들이 빠지게 되는 음울한 무기력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바로 노인들에게 예전에 하던 활동이 금지 되었을 때 활동할 명분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가 시간을 찾아 그동안 구속 받아왔던 소명을 꽃피우게 되는 사람이나 혹은 뜻밖의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되는 자들은 매우 드물다. ...

 

30세 이전에 누렸던 기쁨들만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스탕달은 지적했다. 말년에 처칠은 많은 시간을 그림 그리는 일에 바쳤는데 그래도 이렇게 한탄했다. “말년에 새로운 흥미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이는 우리에게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앗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순간 속에서 배우기 위해 배우길 원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우리는 어떤 전망에 따라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보를 알아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계획의 부재는 알고자 하는 욕망을 죽여버린다. …

 

모리악은 ‘내적 회고록’ 제 2권에서 때때로 새로운 책이나 음반 앞에서 느끼는 호기심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는 지드(Gide)가 노년까지 간직했던 ‘정보와 문화에 대한 편집광적인 관심’에 대해 놀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지드에게서조차 조금씩 조금씩 무관심이 자리잡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1941년 7월 30일 지드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인생의 끝, 과거의 추억들, 쓸데없는 중언부언들 같은 약간 따분한 마지막 행위, 예기치 않은 어떤 변화가 있었으면 싶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어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80세에 지드는 ‘아멘’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아직도 나의 지적인 능력들이 약화되는 것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노인들에게 있어서 호기심의 부재와 무관심은 생리적인 상태에 의해 더욱 강해진다.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것은 그를 피곤하게 만든다. 때때로 심지어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왔던 가치들조차 더 이상 인정할 힘이 없다. … 샤를뤼스의 그런 행동의 원인은 분명 커져 보이는 “일종의 신체적인 부드러움, 이미 죽음의 그림자 속에 들어간 자들에게서 너무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삶의 현실로부터 벗어난 초연함”이라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노인들의 지적, 정서적 무관심은 노인들을 완전한 무기력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 노년을 가장 활동적으로 보내는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

 

대부분의 인간들에게서는 악순환이 생겨난다.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호기심과 정열은 저하되며, 무관심으로 세계가 공허해진다. 그 공허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활동할 이유를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죽음이 우리 내면에, 그리고 사물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노인들에게 예정된 하나의 정열은 야망이다.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없고,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노인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상실한 노인은 자기 밖에서 그것을 되찾으려 한다. 그는 훈장, 명예, 칭호, 아카데미 회원의 검()을 갈망한다. 생명력이 꺼진 노인은 진정한 욕망, 실제 대상을 목표로 하는 정열의 충만함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겉치레를 추구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족보 포장, 표창장, 특히 우리 지역의 경우(?)는 돌멩이에 이름 새기기 등 따위에 욕심 부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부의 사례를 과장한 거 아닐까? 아카데미 회원은 조금 다른 얘기 같다. 노년은 물론 임종때까지 보장되는 그만한 경제적인 수입원이 거의 없을테니까.]

 

일을 계속하는 노인들은 흔히 그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환멸의 바탕 위에서 일을 계속한다. 우리는 몇몇 예술가들이 말년에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에 만든 ‘피에타’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작품뿐이다. 이 진력나는 단조로움은 그들에게 일종의 비탄에 잠긴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보부아르의 고집스런 pessimisme?]

 

1940년 12월 29일자 일기에서 58세의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썼다. “나는 노년의 고통을 저주[몹시 싫어]한다. 나는 그것이 오는 것을 느낀다. 이를 갈 정도로 화가 난다. [나는 삐걱댄다. 나는 분노한다]

 

이슬을 더듬[밟]기엔 이제 그리 민첩하지 않은 다리.

새로운 감동에 이제 그리 민감하지 않은 마음.

[다시] 도약하기에는 이제 민첩하지 않은 짓밟힌 희망.

 

나는 조금 전에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 구절들을 베껴 썼다.”

 

나의 외할머니는 몸이 허약해지고, 운신이 약간 부자유스러워져서 우리 부모집에서 사는 데 동의했었다. 그때 외할머니는 의심이 많고 약간 엉큼해져 있었다. 외할머니는 자기 존재가 우리 아버지께 부담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부족한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옷장 속이나 은밀한 비밀 장소에 생강이 든 과자, 빵조각들, 비스켓들을 숨겨 놓았다가 남몰래 야금야금 먹었다. 노인은 모든 안전에 대한 보장이 주어졌을 때에도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경계 상태를 풀지 않는다. 노인은 불신이라는 형태로 의존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재정적으로, 혹은 그를 돌봄으로써, 혹은 그를 유숙시킴으로서 그의 삶을 도와주는 자식들, 친구들, 손자들이 그에게 이러한 도움을 거부하거나 혹은 도움을 제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노인을 내버리거나 혹은 그의 의향과는 반대로 그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노인의 공포 중의 하나인, 그에게 거주지를 옮기라고 강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은 사람들의 이중성을 알고 있다. 노인은 사람들이 존경심도 애정도 없는 일종의 전통적인 윤리라는 명목으로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예를 들어 노인은 사람들이 세론이 두려워 자신을 대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론이 농락 당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편의보다 덜 중요할 수도 있다. 노인들이 두려워하는 불행들―질병, 신체의 불편함, 생활비의 증가―은 타인의 행동에 있어 불리한 변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는 만큼 더욱더 위태로운 것이다. 되돌이킬 수 없는 자연적인 쇠퇴에 제동이 걸릴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측근들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노인들은 가족들이 노쇠를 재촉한다는 의심을 품는다. 예를 들어 만약 자기가 불구가 된다면, 그들은 자기를 양로원에 집어넣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객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맞서 노인은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쓴다. 노인의 대부분의 태도들은 방어로 해석해야 한다. 거의 모든 노인에게 공통된 태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습관을 피난처로 삼아 안주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젊었을 때에는 규칙이 느슨하여 즉흥적인 변덕에 새로운 선택의 여지를 남겨둔다. 노인은 새로운 것을 걱정스럽게 받아들인다. 선택한다는 것은 노인을 두렵게 한다. 그의 열등감은 망설임, 의심으로 나타난다. … 습관들은 까다로운 적응을 면하게 해주고 질문을 하기 이전에 대답을 제공한다. 늙어가면서 사람들은 습관들을 예전보다 더욱 엄밀하게 지켜나간다. 칸트는 항상 엄격한 규율을 따랐었다. 노년에 그는 그 규율을 의무로 만들었다. … 노인은 지나친 여가에서 오는 역겨움을 의무로 표현되는 임무, 요구들로 가득 채움으로써 피한다. 이와 같이 해서 노인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불안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매순간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노년의 시간 의식과 그 의미에 대해 무지하기에 펼 수 있는 주장이다. 선택의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라 선택지가 줄어들면서 노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일 뿐이다. “지나친 여가에서 오는 역겨움운운은 철부지 철학자의 착각이다!]

 

노인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유발시키는 것은 특히 상승하는 세대이다. 노인은 그 세대에게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노인은 그들에게 위험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을 즐긴다. 1828년 엑케르만에게 미래의 인류에 대해 언급하면서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인류에게서 더 이상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시간이 오는 것을 나는 느끼네. 그때에는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또다시 모든 것을 파괴시켜야 할 걸세.” 그는 당대의 프랑스 문학을 일종의 ‘절망의 문학’으로 간주했다. “역겨운 잡동사니와 더불어 끔찍한 것, 형편 없는 것, 잔인한 것, 무가치한 것들을 광기에 이르기까지 한술 더 뜨는 그들의 악마적인 작업들이 여기 있다.” 1830년 이후에 괴테는 야만의 시대를 예언했고 심지어 1831년에는 “우리는 야만의 시대 한복판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죽기 바로 전 괴테는 “혼란스러운 동요의 시초에 혼란스러운 학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라고 썼다.

 

모리악은 새로운 ‘내적 회고록’에서 이렇게 쓴다. “ … 탁자 위에 커피 한 잔을 놓으면서 당신 손이 떨린다면 사람들은 이러한 떨림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것은 안색이 좋다고 우리에게 탄사를 퍼붓는 것만큼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기보다 등이 반반한 꼽추를 설득할 생각은 하지 않는 반면, 노인 외모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면 탄성을 질러대는 것이다.”

 

우리는 노년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는 편견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부터, 성인이 된 인간은 인간 조건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지니지 못한 미덕들을 나이에 전가시켰다. 즉 아이들에게는 순수함을, 노인에게는 평온함을 전가시켰다. 인간은 말년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을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실 불안은 노인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

 

수많은 노인들을 돌보았던 르베르지 박사는 자코바 반 벨드의 ‘큰 방’(La Grancle Salle)이라는 저서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노년을 행복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훌륭하든 혹은 형편없든, 소설가들밖에 없다. 노년에는 단 한 가지 노년밖에 없다. 병원 침대에 누워 사는 노파의 운명과 안락의자 속에 파묻혀 사는 지체 높은 집안의 늙은 여자의 운명은 서로 비슷하다. … 그러나 반쯤 석화된 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과거의 어른들과 아이들 시절의 그들 자신과 닮았다. 그리고 흔히 그들은 예전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꺼지지 않았다. 욕망, 정열, 변덕은 남아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책 속에서 볼 수 있는 훌륭한 조부모의 경륜이 가져다 주는 지혜나 평온함을 볼 수 없었다.”[나이 지긋한 환자에게도 반말 해대며 애 취급하는 의사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주장이다. 의사들에게 환자 개개인의 biography는 관심 밖이지만, 특히 노인병 전문의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이것이다.]

르베르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늙은 여자 역시 근심과 불안의 희생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옳다. 그러나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가혹한 묘사이다. 왜 노인은 과거 어른이나 아이 시절의 자기보다 더 가치가 있어야 하는가? 건강, 기억, 물질적 재산, 위엄, 권위 등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난 후에도 한 인간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벌써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인간으로 남기 위해 노인이 이끌어가는 투쟁은 비참하고 또는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노인의 괴벽, 인색함, 음험함은 우리의 역정을 돋우기도 하고, 미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은 실로 비장한 것이다. 투쟁은 인간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벌레나 무기력한 사람으로 축소시켜버리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최소한의 위엄을 지니고 싶어 한다는 것에는 무언가 영웅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왜소해진 개인은 인간으로 남기 위해 투쟁한다.

 

존 코퍼 포위스는 ‘노년에 대해’라는 얇은 책에서 노년을 찬미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노년에 우리 인간은 한가로이 수동적인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이 수동적 활동에 의해 우리 인체 조직은 무생물과 하나로 놓아 뒤섞이게 된다”는 것이다. 노년의 행복, 그것은 무생물을 닮아가는 능력을 말한다. 노인들은 점점 혼자가 된다. 무생물도 또한 혼자다. “태양에 몸을 덥히는 노인과, 태양이 따뜻하게 달구는 부싯돌 조각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호성이 있다.” 결국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난 인간은 명상의 즐거움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 … 노인에게는 무위의 권리가 있다. 마침내 의무가 없어진 것이다! 드디어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법 밖으로 사라진다. 아이들처럼 노인들은 도덕과 무관하고, 이러한 도덕의 부재는 신기한 안정, 내적인 영감을 가져온다. …

 

일반적으로 노인들은 몇 가지 특권들을 누린다. 인류의 영역밖으로 밀려나는 것, 그것은 인간의 몫인 구속,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노인들 대부분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기회는 몇몇 사람들에게 제공되며 그중 몇 사람은 그 기회를 포착한다.

 

직업과 함께 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개인은 고통스럽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긴다. 노인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또는 만약 그가 특권을 받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한다. 그는 직위, 역할, 직함, 명예를 탐욕스레 원한다. 그러나 헐벗게 된 그의 생활 속에서 진실로 능력을 끌어낼 수가 없다. 리어왕은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비로소 허식을 벗어버리고, 그때까지 술책에 넘어갔던 모든 가장들(the shames and pretences)을 비난했다. 사회에서 배척당한 많은 노인들은 더 이상 사회에 잘보이려는 염려를 하지 않게 된다는 이점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방약무인’이라 불렀던 세론에의 무관심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해방의 첫걸음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위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노년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

 

윤리는 과학과 기술이 제거할 능력이 없는 고통이나 질병, 노년과 같은 악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라고 설교한다. 우리 자신을 축소시키는 이런 상태 자체를 용감하게 견디어나간다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윤리는 주장한다. 다른 계획이 없기에 나이든 사람은 이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계획이란 단지 우리의 활동에만 관계될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계획에 들지 않는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늙고, 죽는다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숙명일 뿐이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에게는,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 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해야 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노년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을 저축하고, 은퇴 생활을 할 곳을 정하고, 취미를 만드는 것에 그칠 뿐이다. [딱 현재 우리 노인 전문가 수준!] 그날이 와도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고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

다만 이런 가능성은 오로지 한 줌의 특혜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사회 생활에 접근하는 순간 느끼는 불안은 노인들이 사회에서 제외되는 순간 느끼는 고뇌와 대칭되는 것이다. 이 두 순간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일상의 반복되는 삶이 문제들을 은폐한다. 젊은이는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게 될 사회라는 기계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보도블록을 던지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편안한 죽음(Une Mort très douce)과는 조금 다르게, 보부아르의 냉철함과 고집스러움이 드러나는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노화에 대해 이 정도로 방대한 조사를 하고 저서를 남겼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이때가 저자의 나이가 62세! 이 나이에도 여전히 노년의 앙가주망을 부르짖었던 걸 보면 본인이 비판한 키케로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