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인문학과 법의 정신

Kant 2013. 5. 9. 18:25

 

 

책을 내며

 

사람은 살아가면서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법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우리 자신의 공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타인이나 사물들과의 관계를 명료하게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도 기실은 인간이 타인과 법적 조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현대의 저명한 법사상가 드워킨(R. Dworkin), 법은 인간이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한 칼과 방패이고, 인간은 법의 제국의 신하이며 법의 방법과 이념의 신하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날 법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은 어떠한가? 우리가 매일 대하는 언론의 보도기사나 인터넷 댓글들은 일반인들이 법에 대해 참담할 정도로 부정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법은 이른바 사회부적응 그룹뿐만 아니라 일반시민, 심지어 집권세력, 기득권층에 이르기까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법이란 권력자가 평소 눈엣가시 같고 미운털 박힌 놈을 혼내주는 것, 혹은 걸릴 염려가 없을 경우에는 마음 놓고 어겨도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할 경우에는 악법이라고 무시하며 어기다가 법망에 걸려 처벌을 받게 되면 용케 법을 피한 자들을 손가락질하며 억울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재수 없는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처럼 현재 우리사회는 법 내지 법의 지배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인해 통합된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공동체 의식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다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현상은 최근 들어 우리사회에서 정의에 관한 논의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도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혹자는 그동안 우리가 기적의 성장을 이루었지만, 다수 시민이 불공정한 사회라고 느끼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공정성의 가치에 새삼 주목하는 것도 그만큼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아직도 불공정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인식에 기인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능력 발휘의 기회가 고루 주어질 뿐 아니라 그 구성원 각자에게 수고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고, 반칙과 특권이 통하지 않으며, 엄정한 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가꾸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살기 위해 그 사회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법과 정의가 지배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Gerard David, The Judgment of Cambyses (1498)

 

 

법이 인간의 삶을 구속하고 규정하는 불변적인 함수이니만큼 그것이 추구하는 정의 역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결한 가치임에 틀림없겠으나 인문학적 사유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그것은 절대성의 가면을 벗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훌륭한 법이라고 칭찬한 아테네의 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의 역설적인 죽음은 그러한 법적 가치의 상대성과, 법학이나 법제도 내재적인 법이해 내지 법적용의 한계를 다른 어떠한 설명이나 이론보다도 강력하게 웅변해 준다. 따라서 법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인간 삶에 관한 좀 더 넓고 심층적인 안목, 특히 인문학적 안목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엄정한 법질서와 법의 지배는 법에 대한 공정한 이해를 전제하고, 이것은 다시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이것이 이 책의 집필 동기이다.

 

이 저서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1-10), 우리의 현재의 삶과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법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들어온 서양의 법제도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착안하여, 법과 관련된 서양 사상가들의 대표적인 저서들 가운데에서 만날 수 있는 법의 이념적 의미와 그것의 현실적 역할에 관한 선대 철학자들의 통찰을 소개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에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이 저서의 1부는 서양 법사상의 연원을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들과 로마의 키케로 등의 글을 통해 추적해 보고, 그것이 다시 중세의 아퀴나스에게서 어떻게 집약되었는지를 재구성해 보았다. 이어서 근대 사회계약론과 법실증주의의 철학적 배경을 제공한 대표적인 철학자들로서 홉스, 스피노자, 로크, 몽테스키외, 칸트의 작품들이 포함하고 있는 법 관련 주요 논의들을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영미분석철학의 전통에 속했으면서도 근대 자유주의 사회계약 사상을 현대 사회에 적합한 하나의 규범학적인 방법론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현대 정치철학 및 사회철학 분야에서 규범적 접근의 부활을 가져온 롤즈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집필자들은 이들의 법철학 사상을 전달함에 있어 기존의 법철학 관련 저서들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보완하고자 가급적 해당 작가나 철학자들의 원전을 직접 인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저서의 두 번째 부분(11-15)은 일반 독자에게 다소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는 법문학의 접근법을 통해, - 법집행을 담당하는 계층을 포함하여 -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법의식을 읽어내는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11장과 12장은 주로 법문학에 대한 개념 소개와 그 의의를 소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컨대 법문학이 어떻게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는 문학적 개념에 의거하여 법을 해석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판결문을 작성하는 법관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은 법조문이나 법관의 판결문 등에 은폐된 채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이데올로기와 그 계보를 드러내 주고, 법집행 과정 속에서 선례, 법제도, 전통 등이 실제로 수행하는 역할이나 한계 등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줄 수 있다. 법문학적 조망은 법정 소설이나 범죄 심리 소설처럼 직접적으로 법적 소재를 다루는 작품들뿐만 아니라 더 폭넓은 문학 내레이션을 도구로 삼아 그 안에 기호화 되어 반영되어 있는 특정한 역사적 시점의 사회 현실과 법의식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법철학과 더불어 법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법학은 자신의 자양분을 인문학적 사유와의 지속적이고 충실한 동반 관계 속에서 취해 왔으며, 특히 서양에서는 인문학으로서의 법학이라는 표현이 법학계의 모토로 등장했던 시대(르네상스)도 있었다. 그만큼 법의 본질 및 그것의 다양한 순기능 및 역기능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는 법학만으로 성취되기 어려우며 인문학을 필요로 한다. 최근 들어 법원의 판결이 자주 국민의 법 감정이나 건전한 상식과 동떨어진 채 오직 법리적인 무모순성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사실도, 이른바 법학적 과학주의내지 법실증주의의 가속화 추세에 따른 법학의 고립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법부가 평소 일반 국민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이른바 튀는 판결로 비아냥거림만 초래하고, 언론으로부터 법관의 설익은 신조충만하지 못한 내공이니 운운하는 비판을 받는 까닭도 법률 종사자들이 양성 과정에서부터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사유와 단절되어 있는 현실에 그 주요 원인들 중 하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이 우리 사회의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타파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