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개요】
이 논문은 칸트 소유권 이론의 이념사적 배경을 다룬다. 주지하다시피, 어떻게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근대철학 고유의 물음은 아니다. 이것은 시민 사회 내지 정치 사회에 대한, 그리고 특히 합법적인 국제 관계에 대한 철학적 정초 작업과 원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온 물음이기 때문이다.
로크와 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철학사에서 소유권 이론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접근을 마련해준 주요 사상가들이라 할 수 있다. 로크의 노동설이 모든 자립적인 개인들의 외부 사물에 대한 권한을 제도적으로 확립해 준 경험주의적 기도(企圖)였다고 한다면, 칸트의 이성법적인 정당화 작업은 그것을 모든 독단적―신앙적이든 정치적이든―전제들로부터 해방시켰다.
여기서는 로크 노동설의 주요 특징들과 그의 자연 상태, 인간 본성, 성경 해석 등에 대한 입장을 소개하고, 칸트가 로크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이유, 그리고 그가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에 도달해 가는 과정을 천착한다. 결론 부분에서는 쇼펜하우어의 비판을 매개로 칸트 소유권 이론에 대한 개략적인 평가를 시도한다.
주제어 : 소유론, 로크, 칸트, 법철학, 노동소유설
1. 왜 소유 이론인가?
롤즈는 소유권 체제에 대한 문제, 예컨대 어떠한 소유권 체제가 가장 정 의로운 체제인가에 관한 물음이 정치철학적인 근본 물음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부차적이거나 파생된 물음”이라고 보았다. 철학자는 바람직한 사회-경제적 체제에 관한 선험적인 물음들을 해결하려 애쓰기보다는 어떠한 사회 제도의 확립을 구속해야 하는 정의에 관한 추상적 원리들을 더 잘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롤즈는 정의의 요구 조건에 가장 잘 상응하는 경제 체제나 형태에 관한 물음은 각 나라의 전통, 제도, 사회 세력들, 역사 상황 등에 의거해 대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엇을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 또 일반적인 의미에서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가치를 지닌 것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과 제한을 규정하는 원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철학적 관심은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유권의 원칙에 관한 합의에 철저히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제도가 정착되고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준수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더욱이 우리의 현실처럼 절차적 정의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마저 무시되기 일쑤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롤즈가 언급하는 정의와 그것에 결부된 일차적인 조건들, 예컨대 자유에 관한 평등한 권리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허용에 관한 원칙 등도―만일 어떤 사회의 재화에 대한 처분권의 귀속 조건이나 자격, 그 범위 등을 결정하는 법제도와 정치․사회적 체제가 특정 정치 세력들 간의 타협이나 경험적 데이터와 방법에 의존하는 개별 사회 과학 전문가 집단의 이해 수준을 반영할 뿐 견고한 철학적 이해의 지반 위에 뿌리 내리고 있지 못하다면―일관된 방식으로 적용되기를 희망하기란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재산이나 소유권에 관한 사안만큼 법철학뿐 아니라 사회철학, 정치철학 분야에서도 핵심적인 쟁점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이나 소유권에 대해 일반적으로 합의된 철학적 정의를 제시하는 일은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월드론은 재산이란 “토지와 그 밖의 물질적인 자원에 대한 접근과 통제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지칭하는 일반 용어”라고 정의한다. 나아가 그는 이 규칙들에 대한 논란, 예컨대 그것들이 어떠한 형식을 갖추어야 하며, 특수한 사례들에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재산의 정당화에 관한 철학적 물음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제시한 정의 자체가 법학이나 정치학 등의 용례에는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철학적인 정의로는 너무 협소하다고 여겨진다. 로크만 하더라도 재산으로 “생명과 자유와 자산”을 의미했다. 칸트의 경우, 나의 “자의”(Willkür)에 의해 나의 것으로 소유가 가능한 외적 대상은 외부 사물뿐 아니라 타인의 자의에 의한 실행, 나와의 관계 속에 있는 타인의 상태 등 대인적인 권리까지 포함한다.
실제로 소유권에 관련된 논의의 내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내가 어떤 것을 나의 것으로 획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가 하는 관점 자체가 단순한 물질적 재화의 처분 권리에 관한 법적 문제를 넘어서 그 법 개념 자체 그리고 법적 공동체, 즉 시민 사회 내지 정치 사회, 국가 체제 나아가 국제 관계에 관련한 철학적 물음 등과도 연관된다는 점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재산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든가 소유권의 근거, 범위, 한계 등에 대해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사회적 존재이자 정치적 동물인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정치․사회 질서 내지 법제도가 어떠한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일이다. 그리고 그 대답을 찾는 과정은 결국 인류의 좀 더 바람직한 공동체적 삶의 질서를 모색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급속한 기술적 혁명과 진화―예컨대 정보통신이나 생명과학 등의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는 기존의 사회․정치․법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차원의 검토를 강요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사에서 자연법적 전통의 소유권이론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로크와, 자연법 사상의 기본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스토아의 우주관이나 기독교 신앙에서 내세운 “영구법”(lex aeterna), “신법”(lex divina) 등과의 관계를 벗어나 근대적인 이성법적 소유권 개념을 발전시킨 칸트의 의도와 입장을 재구성하는 작업의 필요성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로크와 칸트의 소유권을 별개의 독립된 소재로 다룬 해외 연구물들은 이미 적지 않은 수가 존재하지만, 양자의 이론을 비교하는 시도는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국내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로크의 소유(재산)권 이론에 집중되어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칸트연구의 경우 주로 실천철학의 큰 맥락에서 법철학이나 정치․사회 철학적 논의는 비교적 활성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소유권을 직접 다루는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의 근원적 공동점유 개념의 문헌사적 배경을 다룸으로써 그의 소유권 이론의 기초를 검토한 김상봉이나, 토지의 근원적 취득 이론이 지녔다고 간주되는 난점을 데이비드 리카도의 차액 지대설을 동원해 해결하고자 한 김윤상의 글을 제외하면, 소유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충진의 글들이 유일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는 칸트의 소유 이론을 로크와 대비시키되 예컨대 케르스팅의 경우처럼 칸트 이론의 비교 우위를 증명해 보이거나 헬트의 경우와 같이 단순히 두 이론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시도를 지양하고, 칸트가 로크의 소유론을 포기하는 배경과 그 의의를 천착해 보고, 선험론적 소유권 이론에서 생각될 수 있는 한계를 지목하고자 한다. 로크의 소유론은 곧 노동설로 이해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칸트와의 비교 연구를 위해서는 좀 더 큰 배경, 예컨대 그의 신학적 논거나 인간 본성과 자연 상태에 대한 입장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