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윤리 수업의 발표가 예전 같지 않아 뭐가 문제인가 했더니 …
충대에서 첫 강의하던 90년대와 달리 요즘엔 주제 발표 수업이 많아졌다는 게 그 원인이라고 나름 결론 내리게 되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신선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 수강 학생들 말 들어보니 이제는 다른 수업에서도 발표식 토론 수업이 일반화 된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중복되는 주제도 많아졌고 … 암튼 일종의 매너리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철학 수업에 발표 토론이야 당연한 거니 권장할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긍정적이기만 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발표 내용이 거의 인터넷에서 취한 자료에 의존한다는 것. IT시대, 빅데이터 시대에 인터넷 정보를 활용하는 거야 불가피한 선택이겠다. 문제는 제대로 해석되고 숙고되지 않은 자료들이 그대로 수업 공간으로 들어온다는 사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물리적인 공간(도서관)으로 이동해서 역시 물리적인 시간을 투자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방법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 아닐까? 저녁 늦은 시간 때로는 갑갑한 심정으로 때로는 뿌듯한 기분으로 도서관을 나서본 경험 같은 거 말이다.
각설하고 … ‘판옵티콘’(파놉티콘)이라는 주제는 수업 발표 주제로는 이번 학기 처음 접했다. 주제의 핵심이 무얼까? ‘프라이버시’의 문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 싶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철학적인 이슈들이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은 marginal한 것들일 거고 ….
프라이버시는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 즉 가치로서 지켜져야 마땅한가?
프라이버시는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판옵티콘의 현대판 버전인 ‘CCTV’ 내지 ‘인물 재인식 감시 시스템’(facial recognition surveillance system) 등의 맥락에서 본다면, 어느 개인의 공적인 자기 동일성(public identity)를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습관화된 행위”(a social ritual)라는 정의가 가장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관련해서 어떤 것은 공개하고 어떤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예컨대 나의 종교적 신념, 정치적 관심, 직업, 수입, 취미 등등) 공적인 영역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프라이버시의 주요 기능이라는 것이다. 김아무개인 내가 최아무개와 다른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근 나만의 독립된 영역이 있어야만 한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집단의 동일성은 그 집단의 구성원과 비구성원을 가르는 프라이버시의 기준을 세우고 유지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집단 고유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치집단인 정당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하나의 정당이, 예컨대 현재 권력을 잡지 못한 정당이 언젠가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도 따지고 보면 그 정당의 프라이버시가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책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내가 나다'라는 의식이 지배할 때 행동의 책임이 거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지만 우리 정치권에서 요즘 한참 시끄러운 이른바 “당원명부유출사건”이나 나아가 “완전 국민참여경선제” 논란도 기실 조금만 들여다보면 프라이버시의 문제로 귀착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정당이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정당과의 차별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야 할 것 없이 정당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가치 실현을 위해 모인 당원들의 정보를 유출하고(아무리 사고라 할지라도 그 뒷수습 자세를 보니!) 그것도 모자라 내 정당 너네 정당, 당원 비당원 가리지 않고 같은 경선 룰에 의해 대권후보든 뭐든 뽑자는 발상은 자신들의 정당이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자인하는 꼴로 보인다. 하긴 선거철만 되면 이합집산하기 위해 날아다니는 철새들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마는 …
참고 자료: http://www.surveillance-and-society.org/articles1(3)/facial.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