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철학상담사의 조건

Kant 2024. 8. 26. 19:27

감동시키는 자가 젊은이를 얻는다. … 스스로 감동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다. … 감동을 주지 않는 것 … 사실들, 팩트들, 정보들, 인식들, 지식, 어떻게에 대한 질문들, 숫자들의 형태로 제시되는 설명들 … .

 

젊은이들과 함께 철학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에 대해 그들에게 강의할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은 그들과 말하고 있는 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네게서 알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철학자나 철학에 대해 말하지 말고 철학자로서 그들에게 말하라. 만약 네가 그것을 원치 않거나 할 수 없다면, 가서 너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라, 왜냐하면 거기서 너는 항상 잘 대접받고 … 안전하기 때문이다. … 이제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럼 누가 여전히 교사인가? 우리가 철학자라고?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철학을 가르치는 단지 전문가일 뿐이다. 우리는 지식을 전달하고, 지식을 테스트하고, 지식을 채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인가? 근처에도 못 간다! 우리는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런 일은 우리에게 무리다. 게다가―그들은 교훈적인 방식으로 덧붙인다―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고 다음과 같이 따라가 본다. … 도대체 다른 모든, 그 “위대한 철학자들”은 어떻게 그것을 가졌고,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유지했을까? 그들은 또한 그들 이전의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고, 발견했고, 추측했고, 아마도 뒤집었고, 논쟁했고, 의심했던 것으로부터 배웠고, 이익을 얻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들은 그랬다. 단지 그들은 앞서간 사람들에 대해 “정통하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전유했으며, 또한 일부를 거부했다. 까다로운 위는 소화할 수 있는 것과 소화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한다. 그러나 그 위가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철학자는 단지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다. 철학자로서 나는 철학자에 대해 강의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생각한다. 나는 선하고 엄격한 칸트가 무엇을 내지는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이해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사상을―내게 가능한 한 그리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한―내 것으로 만들었다. … 철학자 중 최초이자 위대한 철학자인 해방 노예 에픽테토스는 이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이렇게 찾았다.

 

“양들은 먹이를 다시 내뱉음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먹었는지를 목자에게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양털을 지니고 있고 우유를 제공한다.“

 

모든 것은 내가 나의 열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기를 희망하기 전에 나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 더 나아가서, 열광하고, 영감을 받고, 불, 불꽃이 되는 것은 … 사태 해명에 유용하게 고찰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정식으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또 그러고 나서 교육학적으로 준비되고, 교수법적으로 조리되고, 그것으로부터 전문적인 “수업자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료가 내 안에서 점화되고, 불이 붙고, 이제 타오르고 있으며 … 젊은이들이 깨닫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은 사태를 위해서 불타오른다. … 그는 “차갑지” 않고 뜨겁다. …

 

그러나 교육학 수다쟁이가 등장해서 나를 가르쳤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 파토스는 의심스러우며, “차가움이 유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다른 말로 하자면, 교사로서 또는 나이 든 자로서 거기서 너무 피치를 올리는 자는, 젊은이들이 “도가 지나친” 것으로서,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를 어떻게 비웃는지 보게 될 것이라고. … 그렇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을 그들과 같은 사람들만 감동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을 얻으려는 자는 그들처럼 되어야 하는가? … 그렇다면 젊은이들은 결국 자신에 대해 감동받을까? 그게 사실일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꾸로 오히려 나는 그들이 지루해하고 단지 그냥 계속 졸고 있다고 생각한다. …

 

젊은 대중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소화하고, 그것은 또한 단지 교수법적으로 한 입씩 분배된다고 말하는 교육감독관과 달리, … 내 주장은 미리 씹어 놓은 것은 식욕을 돋구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들에게는 말하자면, 낯선 것, 당황하게 하는 것, 놀라운 것, 그들을 자극하고 요구하는 것, 그러니까 친숙하고 익숙한 것보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오히려 미친 것, “말도 안 되는 것”, 간단히 말해서, 그들 자신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또는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오로지 그 사람만이 젊은이들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때문인데, 그 젊은 사람들이 그 자리로부터 일어나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필요하며, 그것 없이는 어떠한 출발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들 중 하나”로 그들에게 다가서려 하는 사람, 그들과 친구가 된 사람은 그 대신 그들을 “조용히 내버려” 둔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긴 잠을 연습하고 있는 노인들을 고요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

젊은 사람들에게 디오게네스와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알게 만드는 것보다 그들을 주목하게 만들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 … 그것은 어떠한 “교리”도 아니고, 매혹하거나 설득하는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보여준 실제 사례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의 “회고록”에서 히피아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히피아스여,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어찌 눈치채지 못했는가? 말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는 그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행동은 말보다 나은 증거가 아닌가?”



Gerd B. Achenbach(노성숙 역), 철학상담의 철학. 기원과 발전(Philosophie der Philosophischen Praxis: Einführung), 학지사, 202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