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덕론』 이해의 어려움
도덕형이상학―덕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이하 덕론)는 칸트 윤리학의 마지막 저서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칸트는 전적으로 아프리오리하게 규정된 “순수 의지의 원리들과 이념들”을 탐구하는 도덕의 형이상학만이 “본래의 도덕철학”이라고 규정하고 그 필요성과 집필 의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바로 이 같은 이유만으로 보면 이 작품은 서양 윤리학의 한 축을 이루는 의무론적 윤리 이론의 정점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저서를 처음 접하는 칸트 연구자들은 통상 몇 가지 이유에서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첫째, 덕론은 정초나 실천이성비판 등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칸트 윤리학 고유의 특징에 잘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순수 도덕성이 어디에서 존립하는지를 밝히는 것을 핵심 과제로 삼았던 정초에서 칸트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그 행위가 성취하는 것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주관적인 원칙, 즉 특정 행위를 수행하려는 주관의 단호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원칙인 준칙이 보편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의존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보편적인 법칙으로 여겨질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실천이성의 도덕명령, 즉 ‘정언명령’의 요구가 그것이다. 따라서 행위를 도덕적으로 선하게 만드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성취하는 것 또는 어떤 설정된 목적의 달성”이 아니라, 실천이성, 즉 의지가 표상하는 법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려는 동기, 즉 행위 주체의 마음씨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그의 도덕철학은 “심정의 윤리”라고 불린다. 칸트는 행위를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나 결과를 그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목적이라고 여기고 도덕성의 논의에서 배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덕론에서는 행위의 “목적”을 도덕적 행위의 “실질”이자 불가결한 규정근거로까지 여긴다.
둘째, 정초나 실천이성비판은 선하고자 하는 동기를 강조하고 도덕적 행위에서 의지의 모든 경험적 규정 근거들을 배제하는 반면, 전통적으로 윤리학이 설명하고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 온 “덕”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덕론에서 덕은 중심 개념이 되었고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되었다. 그래서 덕은 “인간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때 따르는 준칙의 강함”이라든가, “의지와 일체의 의무가 확고한 심정 속에 근거하여 일치하는 데”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철학사에 새롭게 각인된 정의를 부여받는다. 뿐만 아니라 칸트는 “덕의무”라는 개념을 일종의 중재 용어로 확립하여, 덕윤리 또는 결과론적 윤리 대(對) 의무론적 윤리라는 대결구도를 극복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도덕철학을 “도덕의 형이상학”과 “덕론”으로 구분하면서, “순수한 도덕론”인 전자와, 경험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후자를 대립시켰다. 도덕의 형이상학은 “오직 자유 의지 일반의 필연적인 법칙”에 의거하여 “행동을 아프리오리하게 규정하고 필연적이게 만드는 원리”를 포함하는 반면, 덕론은 그 법칙들을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 사로잡혀 있는 감정이나 경향, 격정 등의 장애 요소들을 고려하여” 적용하는 문제를 취급하는 응용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그는 덕론이 “응용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참된 논증적 학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럼에도 결국 덕론은 법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이하 법론)와 함께 도덕형이상학의 일부가 된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덕론을 둘러싼 논란거리의 핵심은, 그것을 칸트가 정초나 실천이성비판의 근간을 이루는 주장들과 일관된 방식으로 통합하여 도달한 궁극적인 도덕철학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아니면 행위의 목적, 덕의무 개념 등의 도입, 나아가 의무의 구분과 같은 몇몇 내용에서는, 오히려 그가 “타율의 윤리”라고 비판하여 물리쳐버렸던 볼프학파의 견해로 후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본 연구는 덕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칸트가 준칙의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를 넘어 도덕적 행위의 보편적인 목적이자 실질로서 “덕의무”를 고려하는 배경을 발전사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먼저 칸트가 정초의 관점에서 성립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자유로운 자의의 대상으로서 의지의 실질(목적)이면서 동시에 의무라는 개념, 즉 “덕의무” 개념을 덕론에서 상론하며 도입하는 과정과 관련해서 “덕” 개념에게 부여한 의미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도덕형이상학의 성립에 직접적인 소재를 제공한 도덕철학 강의(비길란티우스)와 그 강의의 교재였던 바움가르텐의 철학적 윤리학(Ethica philosophica, 21751, 31763)과 제일 실천철학의 기초원리 (Initia philosophiae practicae primae, 1760), 마지막으로 덕론 초고(Vorarbeiten zur Tugendlehre) 등의 관련 내용을 분석, 그것이 덕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검토한다. 이 같은 작업은 덕론을, 칸트가 전통 윤리와의 대결을 통해 형식주의 비판에 대응하려 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원리 중심의 윤리이론과 맥락 중심의 윤리이론, 또는 동기주의와 결과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윤리학적 딜레마에 대한 한 대안 가능성으로서도 읽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