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하이데거의 철학은 종교인가?

Kant 2007. 10. 25. 11:57

선생님,
 
옛날 강의노트하고 기억 더듬어 몇자 적어봅니다.


1. 하이데거의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라는 말씀 말인데요... "철학"을 너무 협소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요? 혹은 종교 역시 너무 협소하게, 제도종교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 이후로 가면서 서양철학의 일반적인 사유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 자체도 이미 영미철학자들의 시각에서는 철학적 작업이 아니라 '문학'이라부르든 기타 뭘로 부르든 철학 활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는 그런 문제도 분명 철학자들이 다루었던 것은 틀림없으니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수행한 작업 (특별한 현존재인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존재를 해명하려는 시도)을 대체적으로 아직은 철학이라고 간주하는 게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이데거는 존재 자신의 관점에서 존재자 전체를 해명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하는 특별한 존재자(존재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의 존재 방식을 기초(Fundament)로 삼고 그 위에서 현존재가 존재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현존재의 기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무게의 중심이 현존재에서 존재로 옮아간 것) 현존재 또는 더 나아가 존재자 일반의 존재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스스로가 인간에게 드러나고, 인간이 오히려 그 존재의 '빛'(Lichtung) 속에 들어감으로 해서 비로소 인간과 기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근거가 파악된다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를 빛에 비유할 때, 그 빛 속에서 현존재인 인간에게 현상하는 것 (빛을 받아 나타나는 것)이 존재자이며, 존재는 시간 속에서, 즉 역사 속에서 그때 그때 존재자들이 인간에게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자들이 로고스 중심의 철학을 강조하면서 로고스를 존재론으로부터 괴리된, 사유만을 위한 또는 정확한 판단만을 위한 도구로 간주하게 되었고, 그래서 로고스적인 철학이 말하자면 존재를 논리적인 사유로 환원시켜 파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대 이후 실증주의적 사유 방식이 이러한 경향의 극단적인 형태이구요. 그런 철학에서는 익명의 주관, 즉 객관성을 확보한 주관을 상정하고, 그 주관에 대립된 객관적 대상세계를 계량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기술해 내려고만 한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결국 인간 주관(체)성이 존재를 망각 또는 은폐하는 (인간 자신도 당근 그 존재의 한 계기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시도로 봐야 하고 그게 잘못된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존재 자체를 어떻게 그런 망각 상태로부터 본래 모습 그대로 회복시켜 드러낼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바로 로고스에 의해 가능하다고 합니다. 물론 이때 로고스는 논리적 사유 수단으로서의 로고스가 아니고 본래적인 의미에 충실한 로고스라고 합니다. 그게 시적 로고스입니다. 시적 언어는 원래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표현하는, 즉 존재자를 기술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가 언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말하게 함으로써 존재자에게 존재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어가 말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 "언어가 존재를 증여한다" 등등이라 합니다. 또 언어는 그것을 통해서 모든 사물(존재자)들이 의미를 지닌 현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의미의 지평'이라고도 합니다. 고로 인간이 언어의 주인으로서 언어를 가지고 어떤 대상과 대상 세계를 기술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스스로 인간을 통해 말하도록 해서 존재가 '개시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시인의 경우, 언어를 그 내부로부터 경험하고 사유하여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신비적인 기원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게 하이데거의 생각입니다.

이처럼 정확성이나 논리성을 의도하는 기술적 언어관을 극복하여 망각된 존재 언어를 회복하는 데에(낯익은 의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존재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해주는 데) 철학뿐 아니라 서구 문명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됐든 철학자가 됐든 그들이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유는 존재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존재에 의해 사유로 불리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근데 ... 이게 철학인가요? 일종의 신비주의 사상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고 전통적인 관점으로 볼 때 철학보다는 예술이나 종교적 사유(모든 것이 - 그것이 인식이든 뭐든 - 거기에서 비롯되는 어떤 근원적인 것을 설정한다는 점에서)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반면 위에서처럼 로고스를 엄밀하고 정확한 사유의 도구로 사용해서 진리를 찾는 작업이 통상 철학이니까요.

선생님 말씀을 읽고보니 하이데거의 생각은 과연 종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이데거가 현존재 이전에 존재를 기정사실로 보는 것은, 개별적 인간 이전에 전체, 혹은 일단, 혹은 신적, 절대적 존재를 가정하는 연역적(?) 방식이니까, 개별적 인간(역사적 인간)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엄밀하게 사유해나가는 귀납적, 혹은 과학적 사유와는 맞지 않는 것 같긴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문학하는 사람, 혹은 종교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하이데거를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하지만, 존재를, 변화생성하는 현상의 세계 배후(혹은 초월해서)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견해는 좀 틀린 것 같아요... 만일 정말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요.... 제 생각엔,  개별적 존재자들이 변화하면서 존재도 함께 변화생성하는 것일텐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인간을 구원하는 존재가 신이지만, 신도 인간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말처럼, 개별(현존재, 존재자)과 전체일반(존재)가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더 정확할 것 같은데....  뭐가 먼저냐, 뭐가 기초냐, 뭐가 초점이냐, 논의 무게 중심이 어디냐....만 다를 뿐, 모두 상호성을 강조하긴 하는 건가요?



2. 박찬국 선생의 말: " 하이데거에서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인간의 주체성이, 존재자들을 고찰하는 궁극적 지평으로서, 갈수록 전면에 부각되어가면서 존재자체가 망각되어가는 역사다" (57-8) 하이데거에 따를 것 같으면, 고중세에는 존재자가 자립적인 실체였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존재라는 한낱 전체내의 계기로 전락한다고 하네요. 그의 기술문명비판도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현대기술문명의 시대에는 고중세에 있었던 존재자체가 망각되어간다는 겁니다..... 맞는 말인가요?
박찬국선생의 말이 맞는지요?.... 저는 맘에 드는데.... 행여 틀린 말은 아닌지요, 철학사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인지요?

위에서 이미 로고스의 철학이 인간 주체성에 대한 과대망상(?)에서 비롯되었다는 하이데거 얘기를 했고 그래서 "하이데거에서 ... 망각되어 가는 역사다"까지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구요... 고중세에 존재자가 자립적 실체였다는 표현도 역시 그 자체로는 맞다고 봅니다. 실체 개념 이해가 그랬을 테이니까요. 모든 사물들의 변화의 배후에서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자기 자신은 불변으로 있는 어떤 X를 일반적으로 실체로 보았으니까요. 그러나 근대에서는 이미 데카르트부터 실체는 딱  세개, 즉 신, 연장적 물체, 정신 뿐이라 하고, 스피노자 같은 경우는 자연(신) 하나 뿐이라 하구요. 그런데 존재의 한 계기하고 문명비판하고의 연결은 ... 제게는 보충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네요. 제가 알기로 하이데거는 근대 (로고스적) 형이상학적 사고를 배경으로 한 과학 기술은 존재자를 존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계산을 통해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소위 존재자 전체의 물(物)화(Verdinglichung)가 일어나고 인간조차도 상품화된다고 합니다.

예.. 맞아요. 그런 뜻이었어요... ^^

글쎄요... 이런 맥락에서 존재자의 위상이 그 자체로 그야말로 존재하는 '실체'에서 '계기'로 위축되었다는 것인지...

존재의 빛안에서 있던 '실체"적 존재자가 빛과 유리되어 버렸다는 뜻이 아닐까요? 즉, 종교적으로 보면, 소위 "존재"(절대자)와의 관계가 단절된거요.

그런데 이런 해석을 하이데거적으로 볼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에서는 오히려 존재자들은 그들의 존재를 존재 자체로부터 증여받는 것인데... 암튼 잘 모르겠습니다.



3. 실은 "여성과 성스러움"이라는 주제의 문학작품논문을 쓰는데, 자연히 성차이에 대해 말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요새 "차이"라는 말이 워낙에 철학적으로 많이 논의되는 단어라서 함부로 쓸 수가 없더라고요... 뭐라고들 얘기하는지 볼려고, 책을 읽던 중이었습니다. 문성원선생이 헤겔의 차이과 들뢰즈의 차이를 서로 비교하고 있는데,,, 알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잘 이해가 안되네요...

잘 모르긴 하지만 여성주의 철학에서는 여성성의 남성성과의 차이에 주목하긴 하지만 두 가지 대립 시각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차이를 강조하면 오히려 차별이 심화된다라는 것. 즉 여성성 자체가 의심스러운데 (사회적 산물로도 볼 수 있고 해서) 너무 강조하다 보면 여남차별이 고착된다는 거겠지요. 반면 여성성의 본래적 장점에 대한 인식 회복이 새로운 가치관 확립에 기여한다는 입장(전통적 가치들이나 덕목들이 남성중심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강요된 거기 때문에)도 있구요...
 
예... 맞아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건가요? ㅎ..

아뇨.


암튼 참고되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