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를 읽다 보니 새삼 병을 대하는 몽테뉴의 태도가 작지 않은 울림을 준다.
너는 아픈 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병의 도움 없이도 죽음은 너를 능히 처분한다. 어떤 이들은 병이 죽음을 멀리 떼어 놓기도 하는데, 자기들은 이제 다 끝나 죽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더 오래 살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상처들이 그렇듯 치료해 주고 건강을 돌려주는 병들도 있다. 결석은 흔히 당신 자신보다 더 싱싱하게 살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극도의 노년기까지 줄곧 이 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게 되지만, 자기들이 먼저 이 병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 병은 훨씬 더 오래 그들과 동행할 참이었다. 병이 당신을 죽이는 것보다 당신이 병을 죽이는 경우가 훨씬 흔하며 [병이 치료되었다는 게 아니라, 환자가 죽음으로 병에서 벗어났다는 의미 같다], 병이 임박한 죽음의 모습을 당신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 나이에 이른 사람이 자기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 아니겠는가?
더 고약한 것은 내가 병에서 회복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찌 됐건 공통의 필연성이 조만간 너를 부르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감쪽같이 그리고 부드럽게 너로 하여금 이 삶에 정을 떼게 하고 이 세상에서 몸을 빼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 많은 늙은이들에게 보이는 갖가지 다른 병들은 그들을 줄곧 속박하고 쉴 새 없이 쇠약과 고통으로 괴롭히는 데 비해, 그런 폭압적인 강제로 너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간격을 두고 되풀이해서 미리 알라고 가르치면서, 마치 내게 그 교훈을 마음껏 성찰하고 되새겨 보라는 듯 충분한 휴지기를 그 사이에 배치해주지 않는가.
온당한 판단을 내리고 당당한 인간으로서 마음의 결단을 내릴 방법을 네게 주기 위해, 그것은 아플 때와 건강할 때, 그 각각의 경우에 네가 타고난 조건의 온전한 몫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때로는 지극히 쾌적한 삶과 때로는 견디기 힘든 삶을 같은 날 보여주기도 한다. 죽음과 포옹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죽음과 악수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하다 보면 너는 바랄 수 있으리라. 어느 날 이 병이 범상한 얼굴로 다가오고 자주 포구에 이끌려 나갔던 네가 이번에도 늘 가보던 저 마지막 경계선에 가나 보다 믿고 있을 즈음, 너도 너의 믿음도 오늘 아침 아무 생각 없이 저승의 강물을 이미 건너와 있게 되기를 말이다.
시간을 건강과 공정하게 나눠 갖는 병에 대해서는 불평을 할 이유가 없다.
몽테뉴가 자주 언급하는 결석은 - 그의 언급을 보면, 결석 통증이 무척이나 자주 주기적으로 출몰했던 것 같다. - 나 역시 수년 전 겪어 보았기에 그 통증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엄습했다가 사라지는 증상을 두고 몽테뉴는, 삶에서 정을 떼고 자연스럽게 저승의 강물을 건너갈 수 있게 자신을 도야하고 단련시키면서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로 여기는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죽음의 리허설 같은 행사로 볼 수 있다는 것.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이는 신이 내린 놀라운 은혜로다.
누구든 인간에게서 삶을 앗아갈 수 있지만,
아무도 죽음은 빼앗을 수 없다.
죽음으로 가는 수많은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 (세네카)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을 생각할 시간이 길게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만큼 더 큰 괴로움이 불가피한 것처럼 말한다.
죽는 것이 괴로운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 내 생각엔 소크라테스의 생애 중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 명령을 곱씹어 볼 시간이 꼬박 30일이나 주어졌지만, 그가 그 생각의 무게 때문에 긴장하거나 격앙되기보다는 오히려 가라앉고 초연한 언행으로 동요나 번민 없이 확고한 기대를 가지고 죽음을 감내했다는 것보다 더 눈부신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