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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bs 10 (2025.6.19)

Kant 2025. 6. 19. 00:00

에세를 읽다 보니 새삼 병을 대하는 몽테뉴의 태도가 작지 않은 울림을 준다.

너는 아픈 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병의 도움 없이도 죽음은 너를 능히 처분한다. 어떤 이들은 병이 죽음을 멀리 떼어 놓기도 하는데, 자기들은 이제 다 끝나 죽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더 오래 살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상처들이 그렇듯 치료해 주고 건강을 돌려주는 병들도 있다. 결석은 흔히 당신 자신보다 더 싱싱하게 살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극도의 노년기까지 줄곧 이 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게 되지만, 자기들이 먼저 이 병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 병은 훨씬 더 오래 그들과 동행할 참이었다. 병이 당신을 죽이는 것보다 당신이 병을 죽이는 경우가 훨씬 흔하며 [병이 치료되었다는 게 아니라, 환자가 죽음으로 병에서 벗어났다는 의미 같다], 병이 임박한 죽음의 모습을 당신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 나이에 이른 사람이 자기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 아니겠는가?

더 고약한 것은 내가 병에서 회복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찌 됐건 공통의 필연성이 조만간 너를 부르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감쪽같이 그리고 부드럽게 너로 하여금 이 삶에 정을 떼게 하고 이 세상에서 몸을 빼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 많은 늙은이들에게 보이는 갖가지 다른 병들은 그들을 줄곧 속박하고 쉴 새 없이 쇠약과 고통으로 괴롭히는 데 비해, 그런 폭압적인 강제로 너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간격을 두고 되풀이해서 미리 알라고 가르치면서, 마치 내게 그 교훈을 마음껏 성찰하고 되새겨 보라는 듯 충분한 휴지기를 그 사이에 배치해주지 않는가.

온당한 판단을 내리고 당당한 인간으로서 마음의 결단을 내릴 방법을 네게 주기 위해, 그것은 아플 때와 건강할 때, 그 각각의 경우에 네가 타고난 조건의 온전한 몫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때로는 지극히 쾌적한 삶과 때로는 견디기 힘든 삶을 같은 날 보여주기도 한다. 죽음과 포옹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죽음과 악수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하다 보면 너는 바랄 수 있으리라. 어느 날 이 병이 범상한 얼굴로 다가오고 자주 포구에 이끌려 나갔던 네가 이번에도 늘 가보던 저 마지막 경계선에 가나 보다 믿고 있을 즈음, 너도 너의 믿음도 오늘 아침 아무 생각 없이 저승의 강물을 이미 건너와 있게 되기를 말이다.

시간을 건강과 공정하게 나눠 갖는 병에 대해서는 불평을 할 이유가 없다.

 

몽테뉴가 자주 언급하는 결석은 - 그의 언급을 보면, 결석 통증이 무척이나 자주 주기적으로 출몰했던 것 같다. -  나 역시 수년 전 겪어 보았기에 그 통증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엄습했다가 사라지는 증상을 두고 몽테뉴는, 삶에서 정을 떼고 자연스럽게 저승의 강물을 건너갈 수 있게 자신을 도야하고 단련시키면서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로 여기는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죽음의 리허설 같은 행사로 볼 수 있다는 것.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이는 신이 내린 놀라운 은혜로다. 

누구든 인간에게서 삶을 앗아갈 수 있지만

아무도 죽음은 빼앗을 수 없다.

죽음으로 가는 수많은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 (세네카)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을 생각할 시간이 길게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만큼 더 큰 괴로움이 불가피한 것처럼 말한다.

 

죽는 것이 괴로운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 내 생각엔 소크라테스의 생애 중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 명령을 곱씹어 볼 시간이 꼬박 30일이나 주어졌지만, 그가 그 생각의 무게 때문에 긴장하거나 격앙되기보다는 오히려 가라앉고 초연한 언행으로 동요나 번민 없이 확고한 기대를 가지고 죽음을 감내했다는 것보다 더 눈부신 일은 없다.

 

만약 몽테뉴가 항암치료의 부작용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병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충전하자마자 방전되는 낡은 배터리 같은 몸뚱이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걸 자기 도야나 단련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쩌면 부자연스러움을 넘어 억지스럽다고까지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암치료의 목표는 말이 좋아 환자의 '생명 연장'과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의 질 보장'이지, 실제로는 제약회사 비즈니스와 의료 업계, 보험 업계의 성장 보장 전략이 최우선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 내 의심병이 다시 도진 것일까?
방사선 종양학과 젊은 의사는 지난 수 개월 집요하게 날 괴롭힌 신체적 증세에 대한 내 설명 아니 하소연을 듣자마자 “말씀하신 그런 증상 호소하는 환자분들 저는 숱하게 보거든요. 그 정도 부작용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마치 어린애 꾸지람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ㅎ. 그 정도 불편함에 벌써 어리광이면 아직 제 차례 기다리며 대기 중인 다른 더 망나니 같은 애들은 어쩔 거냐는 식이다. 그래, 어쩌면 신체적 고통은 야금야금 좀이 쏠듯 두뇌 활동 파먹는 고약한 심술짓에 비하면 그래도 사소한 것이리라.
어쨌든 매번 경험하는 일이지만 대학병원은 묘한 곳이다. 의사와 환자의 생물학적 나이가 역전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