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eous/etc.

Krebs 3 (2024.12.9~10 & 2025.5.10)

Kant 2025. 5. 10. 21:51

2024.12.9
피터 씨,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건강은 어떠하신가요?
 
당신의 한국어 번역서는 이미 아시다시피 기대에 비해 반응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서 안타까워요. 우리나라에서의 철학상담에 대한 관심도 10여년 전만 못하다고 느껴집니다.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닐 거 같지만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어렵군요. 진중한 자세로 배우려는 태도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게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나도 이제 정년까지 한 학기만 남겨놓았는데, 최근에 암진단을 받고 보니 당신이 2016년에 항암치료 받았던 게 기억이 나서 안부 확인 겸 메일을 보냅니다. 지금은 완치된 상태인가요? 그 당시 “a foggy brain”이라는 표현을 쓰셨었는데, 이제 나 자신이 그런 치료를 앞두고 있다 보니 새삼 피터 당신이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제가 좀 염치가 없는 거겠죠? ㅎㅎ.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오는데, 나라 안팎이 평화롭지 못해 이래저래 젊은 세대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뜻깊은 연말 연시 보내시기를 기도할게요. 
 
수배 드림
 
 
 
2024.12.10
수배 씨,
편지를 받아서 정말 반가웠어요. 나는 은퇴 후 잘 지내고 있어요. 
 
제 몸에 있던 암은 현재 공식적으로 '관해(remission)' 상태로, 즉 암의 활동이 멈춘 상태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씩 주사 형태의 치료를 받고 있고, 암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병은 아니라 여전히 매일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꽤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자고, 심지어 건강 유지를 위해 운동도 해요. 물론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따르지요. 아직도 어지럽거나 집중이 안 되고 머릿속이 멍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땐 그냥 조용히 쉬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안타깝네요. 하지만 그래도 의료진이 잘 훈련되어 있는 암 종류라서 다행입니다.
 
내가 그동안 배운 것 몇 가지를 공유할게요:
 

  • 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꼭 암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대부분은 약의 부작용입니다. 어떤 약이든, 의사가 뭐라고 하든 간에 부작용은 존재합니다.
  • 암을 ‘내 암’이라고 부르거나 ‘소유’하지 마세요. 싸워야 할 대상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건강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접근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 치료에 있어 의사와 당신 자신을 ‘동반자’로 여기세요. 다시 말해, 몸에 어떤 변화가 있거나 느끼는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질문하고 알려야 해요. 당신의 몸이고, 당신의 삶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당신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신뢰를 표현하세요. 그래야 그들도 더 자신 있게 결정할 수 있고,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됩니다. 결국 당신의 몸이라는 ‘작업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셈이니까요.
  • 아직도 인생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계획(outrageous plans)도 마음껏 세우세요.
  • 저는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실망스러운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피하고, 오로지 제 자신과 가족의 안녕에 집중하려 노력합니다.

 
나의 무모한 계획은 가능한 한 오래 글을 쓰는 것이에요. 제 뇌와 마음을 계속 활발하게 유지하고 싶어서요. 요즘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허구의 철학상담 에세이 시리즈를 집필 중입니다. 내용은 철학상담사와 그를 찾아오는 인공지능 클라이언트들 간의 상담 대화를 담고 있어요. 난 이것을 “가상상담”(speculative counseling) 에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샘플을 하나 보내드릴 수도 있어요.
 
『Philosophy’s Role』의 판매가 부진하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아요. 아마도 시대를 조금 앞선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요즘 심리치료와 관련된 잡지나 책에서, 철학적 논의가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심리치료사나 정신분석가들이 이제는 비판적 사고, 윤리적 논의, 실재와 존재에 대한 담론 등이 치료적 대화에서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인정하고 있어요. 물론 그들은 그것을 ‘철학’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철학에게 공을 돌리기 싫어하는 거죠. 대신 그들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포장하려 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흐름이 보이나요? 나는 솔직히 이런 ‘도둑질’에 분개하진 않습니다. 어쨌든 좋은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요. 다만 비윤리적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가르치는 일이 그립긴 하지만, 이제는 대학까지 먼 거리를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정말 좋아요. 뭐, 어차피 은퇴했으니까!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수배씨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연말연시 되길 바랍니다. 새해에는 집에서 만든 행운이 가득하시기(tons of home-made good fortune)를 기원합니다.
 
Peter 드림
 
 
 
2024.12.10
피터 씨,
 
건강을 잘 유지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 감사하고 다행입니다. 
사실 몇 주 전에도 ㅇㅇ대 ㅁㅁㅁ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 그 자리에서 당신 이야기가 나왔고, 건강이 어떠신지 걱정하며 안부를 나눴습니다. 이렇게 직접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네요.
 
자신의 병과 싸우며 얻으신 지혜를 이처럼 아낌없이 나눠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암과 친구처럼 지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만, ‘암을 내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조언은 전혀 새로운 관점이라 곰곰이 되새기게 됩니다. 
의료진을 파트너로 생각하라는 조언도 정말 깊은 통찰로 다가옵니다.
 
과감하거나 대담한 계획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 사실 저는 원래 한 학기 일찍 퇴임할 계획이었습니다. 우리 대학은 대전에 있고, 치료는 서울에서 받을 예정이라 두 지역을 오가며 치료와 강의를 병행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학생들에게도 공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의 조언을 읽고 나니, 이 결정을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철학의 ‘도둑맞음’에 대해서는, 저는 피터 당신처럼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강의나 세미나 중에 이 문제를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고 있어요. 당연히 그 대화 속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이름은 피터 당신입니다.
 
물론, 당신의 허구적 철학 에세이를 읽고 싶습니다. 유머도 가득할 거라 믿어요.
돌이켜보면 철학상담이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당신과 당신의 글을 접하게 된 건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캐나다는 제가 늘 가보고 싶던 나라 중 하나인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당신을 다시 직접 만나고 싶군요.
 
다시 한 번, 축복 가득한 크리스마스와 새해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대전에서,
수배 드림
 
 
 
 
2025.5.10
수배 씨에게,
 
당신의 이메일 덕분에 하루가 환하게 밝혀졌습니다! 제 새 책을 위한 출판사를 찾으셨다니 너무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건강 문제와 여러 가지 일들로 바쁜 가운데서도 그렇게 애써주신 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다른 이야기로 들어가서,
내가 항암 치료에 대해 보낸 내용을 블로그에 올려도 됩니다. 몇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약속 수첩을 추천하고 싶군요.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요: 첫째, '항암 뇌(chemo brain)' 때문에 중요한 병원 예약을 잊어버릴 수 있으니 기록하는 데 도움이 되고, 둘째, 일정이 비어 있는 ‘한가한 시간’을 표시해두면 치료 외에도 여전히 즐겁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의 경우에는 글쓰기를 하죠).
 
또한 의학적 검사는 나와 의사에게 생물학적 기능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만, 운동은 내 몸 상태에 대한 즉각적인 주관적 느낌을 주기에 아주 유용합니다. 제 종양내과 전문의는 내가 운동을 통해 보고하는 정보도 약물 용량 조절 등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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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