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Peter B. Raabe, "세상을 구했으나 자신은 구할 수 없었던 남자"

Kant 2017. 3. 2. 11:46

만일 철학상담이 없다면, 철학자들이 실천하는 어떤 것이라는 고대철학자들의 철학 개념은 이제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철학자들이 철학을 가르쳐 온 것은 맞지만, 자신들의 분야에서 과거부터 실천해왔던 것들 [상당 부분]을 수세기 전부터 생물학자, 천문학자, 의사 등과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같이 잘못된 관대함의 가장 최근 사례, 아마도 씁쓸한 사례는 철학자들이 철학실천을 심리치료사들에게 넘겨버린 것이리라. 하지만 대체 심리치료가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렇단 말인가? 나는 어째서 만일 철학상담이 없다면, 철학자들이 실천하는 어떤 것이라는 고대의 철학 개념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대학, 심지어 몇몇 고등학교에서도 실천되고 있는 것은 철학이 아니란 말인가?

철학은 분명 어떤 실천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철학은 자주 그러한 주장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 경 에피쿠로스는 철학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시대가 시작할 무렵 세네카는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적었다.

 

철학이 인류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 말해볼까? 그것은 조언이라네. 어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있고, 또 어떤 자는 가난으로 불행해 하고 있다네. 모든 인류가 사방팔방에서 자네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삶이 망가졌기 때문에 희망과 도움(철학자들)을 찾고 있는 거라네.

 

<2>좀 더 나중에 니체, 비트겐슈타인, 듀이 등 유명 철학자들, 그리고 다수의 사상가들도 위와 비슷하게 철학의 가치를 실제 삶에 대한 적용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철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버렸다고 자주 불평을 늘어놓았고, 그들은 특히 현대의 아카데믹한 철학이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선의 사례는커녕 어떠한 사례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1920년 듀이는 이렇게 적었다.

 

맹목적인 풍습과 충동을, 삶과 행동에 지침을 제공하는 지적인 대체물로 대체하려는 시도로서 철학을 탄생시킨 원인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철학에서 문제와 주제를 박탈하는 대신, 철학을 황폐한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가장 난해하고 의미심장한 물음들을 향한 길을 열어놓으리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지 않을까?

 

아카데믹한 철학을 응용철학, 철학실천, 철학의 실천적 적용, 철학적 실천 등과 이렇게 혼동하는 것은, 오래전 자기 자신이 그것들 가운데 하나에 몰두할 때 혼란스럽다고 자주 말하곤 했던 남성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이 여러 대화편에서 묘사하는 것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학의 궁극목적은 인간조건을 개선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철학교수 루이스 내이비어(L. Navia)는 다음과 같이 훌륭히 그 주장을 요약했다.

 

(소크라테스)의 모든 활동, 대화, 선택, 그리고 아마도 그의 아주 사소한 동작들까지도 그가 자신의 삶을 위해 설정한 목적을 통해 규정되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게서 인간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믿었다.

 

다수 철학자들은 인간 자신을 이해하려한 소크라테스의 접근법을 철학실천의 출발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믿는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중요한 작품들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의 비극적 생애 자체가 잘못 수행된 철학실천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아테네의 원칙이라 불릴만한 것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보수적인 아테네 법과 도덕 원칙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크라테스의 잘못은 원칙들의 전쟁에 참여하라는 국가의 도전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좀 더 자유분방한 자신의 원칙들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음미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을 확고히 지켰던 것이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수월하게 자신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원칙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택했다. 사람들의 충고란 예컨대, 그에게 행해진, 아테네 젊은 시민들을 타락시킨다는 대단히 감정적인 고발에 비추어볼 때 거리낌 없이 연설할 권리에 관한 논리적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신의 원칙만을 굽히지 않기 위해 그의 생명을 구하려는 친구들과 가족의 명백한 요구를 무시했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그를 영웅, 그리고 원칙을 고수한 전설적 인물로 여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죽게 함으로써 논리적 주장의 한계에 대한, 또 자신이 타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모두 결여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은 [이러한 점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소크라테스에게는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3> 그는 추상적인 문제를 놓고 사람들과 토론하는 데, 그리고 인간을 보편 개념으로 검토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인간성에 관한 어떠한 추상적 이론 원칙들보다도 언제나 무한히 더 중요한 유일한 것, 즉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작업은 아테네인들이 합당하지 못한 종교적 독단, 정당화되지 않는 문화적-정치적 전통, 음미하지 않은 개인 습관 등에 따른 삶을 살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으로 세상을 구하려고 애썼으나 정작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 고르아스, 국가등 여러 대화편에서 철학자의 역할을 의사의 역할에 비유했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의사가 신체 건강을 돌보듯, 철학자는 영혼의 건강을 증진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타인의 그것까지도 말이다. 안된 말이지만, 이 비유는 두 분야에서 이뤄지는 훈련을 비교해볼 때 좌절하고 만다. 의대에 진학하는 사람은 이론과 실천 두 영역에서 훈련을 받는다. 의학이 그저 이론적 학문이라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철학에 해당하니, 이는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분야에서든 이론은 항상 실천에 정보를 제공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철학의 특별한 분야를 제외하고 말이다. 분명 철학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사용하는 일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실제 인간 삶의 복잡하게 뒤얽힌 개인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문철학은 주로 삶의 현실에서 추상화된 문제들을 날조하는 데 관심을 둔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칭찬하면서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전형적 철학자가 일반인의 조롱 대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철학자는 실제 삶에서 아주 멀리 격리되어 있어서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위대한 기술로 여기고 의학과 산파술에 비유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실제적인 일과 인간 활동의 구체적인 일들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실천이 없는 기술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어떤 종류의 의학 실천이 가설을 세우는 작업 이상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대체 어떤 산파가 산모와 아기 모두를 편안하게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단 말인가? 대학의 전문철학은 그저 실천을 포기하고 그 대신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궁극적 진리에 관한 결코 끝나지 않는 탐구에 자신을 파묻음으로써 이 같은 물음들을 회피해 왔다.

오늘날 철학 전공자의 직업이 주로 대학원 학위를 요구하는 교수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의학에 비유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학 전공자의 직업은 대학원 학위를 요구하는 교수직이다. 외과의사는 다음 세대가 외과의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도록 가르치며, 그러면 그들이 다시 다음 세대가 외과의학을 가르치는 외과의사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등등. 그들은 이론을 가르치기 위해 약간의 가상 시체들을 수술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 외과 기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전문철학도 이와 유사하다. 철학 교수들은 다음 세대가 철학 교수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그 세대도 다음 세대를 가르쳐 철학교수가 될 수 있게 하고 등등. 포괄적인 이론들을 예시하기 위해 약간의 가설적 딜레마들을 분석하지만, <4>결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봉착하는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방식으로 돕기 위해 철학적 숙련기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때 마이애미 대학은 철학 교과과정을 유지할 당위성을 옹호해야 하는, 낯설지 않은 상황에 처했었다. 학생들은 철학 학위 취득이 대학 울타리 밖에서 제대로 된 직업이나 전문직을 얻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학 측은 웹사이트에 철학이 훌륭한 배경적 자질을 제공하는 직업들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에세이를 하나 게시했다. 그것은 최근 마이애미 대학 철학전공 졸업자들이 사법, 공직, 의료, 교육, 행정, 경영, 사회사업, 성직, 사서, 시스템 분석 등과 같은 분야에서 학업이나 경력 쌓기를 계속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철학이 오로지 배경 자질만을 제공하며, 다른 분야의 직업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말한 사실을 주목하라. 이 메시지는, 전문철학자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 살아야만 하는 자식들을 낳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메시지에 소크라테스의 의학에 대한 비유를 적용해본다면, 황당한 결과가 나온다. 마이애미 대학이 웹사이트에 의학전공 졸업장이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의대생들을 위해 에세이를 게시했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다음과 같은 주장이 될 것이다. “의학이 훌륭한 배경적 자질을 제공하는 직업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최근 마이애미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졸업자들은 사법, 공직, 의료, 교육, 행정,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학업이나 경력 쌓기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메시지가 의학전공 학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무척 황당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이것이 철학전공 학위에 관한 것일 때에는 똑같이 황당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현대철학의 문제는 그것이 자기 정의를 통해 떠벌리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문철학자들 자신은, 만일 이론철학이 유용할 수 있어야 한다면, 그것이 실천 측면을 가져야만 한다는 점을 안다. 마치 의학, 심리학, 법학, 물리학 등의 이론들에 실천적 측면이 있듯이 말이다. 철학교수 아멜리 로티는 철학은 하나의 주제가 아니며 또 하나의 주제였던 적도 없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된 다양한 활동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적었다. 다른 전문철학자들은 경영윤리와 생명의료윤리가 실제로 응용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 분야에 관해서는 수많은 저사와 저널 논문들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로티는 불행하게도 의료윤리 분야의 약간의 예외적 현상을 제외한다면, 응용윤리 분야의 공동 연구자들과 청중들은 동료 철학자들로 채워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로티의 주장 핵심은, 철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오로지 철학자들만 읽는 논문을 쓰며, 그 논문들이 응용철학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조차, 그리고 전문 기술용어와 이론적 문체로 작성하려 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문철학자들은 일반 대중이 자신들의 지식과 전문성에 접근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시도를 거의 안 해왔기 때문이다. 아주 솔직히 말해, “응용철학은 그것이 학생들을 위한 과목으로 가르쳐지기만 한다면, 모순어(oxymoron)이다.

기업이나 기관이 추상적 논증에 관한 자신들의 전문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을 다른 전문가들은 주제넘다고 무시한다. <5> 경영윤리나 생명의료윤리에 관한 논문을 쓰고, 그들의 심오한 철학적 사변이 그 분야의 인습적 관행을 변화시키리라고 기대하는 철학자들은 안타까울 정도의 이상주의자들이다. 셔스터만은 철학실천하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메리카의 전문 철학자들이 아무런 정치적 역할이나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도 때때로 공적 문제들에 대해 발언권을 얻는다. 내 주장의 요점은 영향력 있는 정책의 주도권이 철학과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경영계는 경제학과와 무역학과 출신 사람들이 움직이지 철학과 출신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때 기업체가 철학자를 회사 윤리담당자로 (호기심에서) 고용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는 점차 단기간의 유행으로 끝나가고 있다. 그 사람들이 윤리적 갈등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1년 캐나다 정부가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수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윤리와 무관한 이해관계의 갈등 혐의를 정부 내 윤리학자로 하여금 평가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야당 하원의원들은 국내 언론사를 통해 공정한 윤리학자라는 사람 자신이 이해관계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폭로했다. 그 사람이 자신의 급여 지불서에 서명하는 당사자인 수상을 심하게 비판하는 모험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치계에도 철학자가 관여할 공간은 없다. 이와 유사하게 경영계나 의료계도 그 분야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끌어간다. 이른바 응용철학을 전공한 철학자들이 간과하는 것 같은 사실은, 자신들이 강의실에서 하는 활동을, 그러니까 철학에 대해 객관적으로 강의하거나 심지어 인간조건에 대해 냉정하게 토론하는 활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조건을 개선하도록 돕는 실제 활동에 몸소 참여하는 것은 그와 같은 강의실 활동과는 다르다. 이것은 전문철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정치운동에 결코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사회변화를 위한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른바 전문철학의 실천이 인간조건을 개선하는 일을 목표(목적론)로 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위에서 말했듯, 셔스터만은 철학실천하기의 저자다. 그는 철학교수이기도 한데,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철학의 해답은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실천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변화시키는 실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는 철학을 단지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나누는 통상적인 오류를 범한다. (1)아카데미에서 행해지는 이론[철학]. 인간본성, 지식, 인간사회 제도 등을 포함하는 세계에 관한 일반적, 체계적 견해들을 표현하거나 비판하기.” (2)“삶의 기술인 철학적 실천. 실천하는 자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는 숙고된 삶의 실천으로서, 자기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일. [이렇게] 철학을 실천으로, 다시 말해 삶의 기술개발로 정의하려는 셔스터만의 칭찬할만한 시도는 [그러나], 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철학을 사용할 것을 장려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그 실천자만을 행복하게 해준다. 리처드 로티도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철학을 사적인 활동, 즉 혼자 그리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사유하는 활동으로 간주한다. <6> 다시 소크라테스의 의학 비유를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의학은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분류된다. 이론과 자기적용. 이것은 의사를 영원히 자신의 환자로 만든다. 이 같은 견해는 두 사람 사이의 의학적 실천, 즉 환자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의사와 환자의 협력을 어디에 내버려두는가?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인 러셀은 그의 조그만 책 철학의 문제들에서 철학을 이렇게 정의했다.

 

물리과학은 발명을 통해 그것에 전혀 무지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따라서 물리과학 공부는 오직 또는 주로 그것을 공부하는 학생에 대한 효과 때문에 권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 일반에 대한 효과 때문에 권장된다. 이 같은 유용성은 철학과는 무관하다. 만일 철학공부가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어떤 가치를 가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간접적으로만, 그러니까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삶에 철학이 미치는 효과를 통해서만 가지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철학의 가치를 일차적으로 찾아야만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효과에서이다.

 

러셀은 계속해서 철학이 실천에 관한 해결 가능한 모든 물음들을 경험 학문들에게 주어버린 것은 적절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관점에 따르면 세상은 실천적이거나 해결 가능한 물음과 철학적이고 해결 불가능한 물음이라는 두 형태의 물음들로 나뉜다. 그는 철학이 그저 본질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물음에만 관여해야 마땅하다는 규범적 주장을 펼친다. 그는 전통적 (고전적이지는 않더라도) 전문철학 개념, 허세부리는 철학적 이상을 대변한다. 이에 따르면, 철학은 그저 고독한 명상,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 자기적용, 공유할 수 있는 유용성의 결여 등과 같은 특징을 지니며, 육체노동자들이 담당해야 할 저급한 실제적 용무에 관여하지도 않고 관여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류에게 무용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1914년 보스톤에서 행한 로웰 강연에서 철학의 목표는 세계에 대한 이론적 이해라고 명확히 밝혔다. 이것은 동물이나, 야만인, 심지어 최고로 문명화된 사람들에게조차 커다란 실천적 중요성을 지니는 과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러셀이 철학은 철학전공 학생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유용하지 않다고 한 것, 그리고 셔스터만이 언급한 자기적용은 대인관계에서 이뤄지는 상담이나 치료 시 철학을 사용하는 것을 무시한다. 그런데 철학의 모든 것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에피쿠로스는 철학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순수한 지식의 추구, 이론철학은 아무런 본질적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식은 오로지 언제나 도구적 가치만을 지닌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그는 의학이 신체의 질병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처럼, 철학이 영혼의 질병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영혼의 질병은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그가 영혼의 질병이라고 믿은 것을 다루기 위해 정신분석을 개발했다. 그러나 다수의 동시대인들과 학생들은 그의 접근법이 지닌 냉정한 임상적 그리고 사이비 과학적 성격과 관련해서 견해를 달리했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접근법이 의학적 비유를 사용하는 점에서 외과 수술과 지나치게 유사하다고 보았다. 의사가 무의식 상태의 환자를 수술하듯, 의사인 프로이트는 환자의 무의식을 수술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정신분석자들은 곤경 상황에 있는 모든 개인들이 그와 같이 중대한 수술을 필요로 할 만큼 고통스런 질병에 시달리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다양한 대안적 접근법들을 만들어냈는데, 그것들은 외과 수술보다는 <7> 아마도 물리치료에 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접근법들은 심리치료라고 불리게 된다. 몇몇 심리치료사들은 철학적 접근법을 채택하고, 자신들의 고유 방법에 실존치료, 인지치료, 로고테라피, 합리정서치료 같은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철학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뒤로 물러나 앉아 심리치료사들이 임상 및 상담 심리학 전공 학생들에게 철학실천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며 은둔해 있던 전문철학자들을 관찰하여 얻은 것을 내용으로 한다. 하지만 정작 심리치료사 자신들은 철학 교육을 거의 또는 전혀 받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상황은 여전하다. 사람들의 복잡한 삶을 정리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철학실천은, 고대의 철학실천이라는 유익한 개념을 아주 쏙 빼어 닮았지만, 이제는 상담심리학과의 자산이 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인간조건을 개선하는 일이 철학을 실천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심리치료의 출현과 더불어 전문철학자들은, 심리치료사들이 철학실천의 바로 그 심장부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용인함으로써 그것을 그들에게 주어버리고 말았다. 전문철학은 오늘날의 철학상담사들을, 그들이 어째서 심리치료사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것을 하려고 작정했는지를 설명해야만 하는 탐탁지 않은 상황으로 내몰았다. 철학을 유혈 스포츠로 변형시킨 대학의 경쟁적인 여건이 철학자들로 하여금 아카데미의 원칙을 고집하게 만들었다. 인간조건을 추상적으로만 검토하고, 또 철학은 산파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인간 삶의 실천과 특수한 문제에 참여하는 일 없이 그저 지적 추구에만 종사하게 만든 것이다. 1942년 스위스 취리히의 심리학 학술대회 개막 연설에서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철학을 심리치료사들의 완전한 골칫거리로 바라보았다.

 

저는 우리 심리치료사들이 진정으로 철학자가 되든지 또는 철학적인 의사들이 되어야만 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베일로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우리의 작업과 대학에서 수행되고 있는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역력한 대조 때문에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철학을 최악의 상태로 평가하게 만든 것은 분명 논리실증주의 유행이었다. 기호논리는 진리에 도달하는 오류 불가능한 수학적 언어의 기능을 했고, 도덕성은 토론 불가능한 주제로 여겨졌다. 또한 [논리실증주의에서] 철학실천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게 하는 일이었다. “‘보편적 도입규칙을 적용할 때, 우리는 어째서 이행되지 않은 가정 속에서 발생하는 상수를 새로운 전칭기호에 의해 제한받는 변수로 대체할 수 없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어떻게 인간 삶의 전쟁터와 연결될 수 있겠는가? 대체 이 같은 질문이, 바늘 위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춤출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철학이 인간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우리의 이해를 도모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면, 오늘날 대학 철학과에서 행해지는 많은 것들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말아야 한다.

철학을 기호들이나 뒤섞는 무의미한 작업으로 축소시키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철학자 자신들이 철학실천을 홀로 걸으며, <8> 홀로 사색하는 일로 묘사하고, 또 철학자를 철학실천을 위해 고독이 필요하고 그래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켜 특별한 고립상태에 가두는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홀로 기능한다는 주장은 오만한 남성 판타지다. 실제의 삶은 놀라운 방식으로 철학에 간섭한다.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동료, 애인,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초 제조자 등은 모두 고독한 철학자의 명상으로 간주되는 것 내부의 아주 추상적인 개념들에게조차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 인류학자 기어츠(Clifford Geertz)의 말에 따르면, “인간 사고는 극도로 사회적이다. 그 근원도 사회적이고, 기능도, 형식도 그리고 적용도 모두 사회적이다.”

[더 나아가] 아마도 철학자를 홀로 활동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철학자의 전문성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기려는 몇몇 전문철학자 자신들의 역설적인 성향이다. 가다머를 예로 들어보자. 그의 저서를 출판한 한 출판업자는 그를 “20세기의 선도적 철학자들 중 한 명이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가다머는 철학이란 어떤 종류의 전문적 숙련기술이나 능력이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지닌 자연적 경향으로 여겨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법학이나 의학의 실천이 어떤 종류의 전문적 숙련기술이나 능력이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지닌 자연적 경향으로 여겨져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 말의 논리적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결론은, 여러 해를 철학과 대학원 학위를 얻기 위해 학비를 지불해가며 고된 학업을 견뎌낸 사람이 (가다머 자신도 철학과 정교수였다) 그저 시간만 낭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가 이미 지닌 자연적 경향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철학자들이 자주, 자신들이 특히 실제적인 의미에서 어떤 종류든 전문적 숙련기술이나 능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주장하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이해되기도 한다. 어쨌든 철학 학위는 아무런 실습 과정도 요구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대학에서 실천되고 있는 철학은 교육, 도서출판, 그리고 동료집단의 심사를 받되 아무런 보수도 제공받지 못하는 학술지 논문 발표 등으로 축소되어 왔다. 더욱이 다수의 저서들과 논문들은 정합적인 논증으로 구성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한 내용을 다룬다. “퇴출되기 싫으면 출판하라는 식의 대학 여건 속에서 생산되는 현대의 철학 저술들은 주로 추상화 작업이다. 그것들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꾸며낸 문체로 작성되고, 무수히 많은 애매한 논문들과 저서들에 대한 인용을 포함하며, 가장 기본적인 삶의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된 자기-참조적 결론을 도출할 뿐이다. 너무나 많은 훌륭한 철학자들이 너무도 인간 삶과 무관한 너무나 많은 주제들을 논의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과 너무나 많은 말을 낭비해왔다. 철학과는 학생들에게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종교철학 등에 관한 과목을 제공했지만, 인간관계를 다루는 철학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실제로 주류 전문철학은 인류 인구의 절반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여성 말이다. 또한 철학자들이 다루는 것 대부분이 다른 철학자들과도 무관할 정도로 철학은 너무도 전문화되었다. 전문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진리추구’, ‘순수철학또는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에 몰두한다는 신화를 영구화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러면서 고대에는 진리추구가 주로 자연철학(과학)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순수철학<9>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이란 표현이 단순히 실천적 관점에 볼 때 쓸모없음을 뜻하는 완곡어법이었다는 사실을 감춘다.

실제적이고 유용한 모든 것을 포기하자 철학자들은 허세로 그득한 가짜 문제들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상의 삶을 부조리하고 추상적인 전문 논의로 축소시키기에 분주했고, 그 속에 등장하는 이론적 인물들은 가상의 커튼 뒤에 놓여있는 도덕적 객관성이라는 이상을 성취했다. 철학자들은 이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구명보트 딜레마무인도곤경상황 등을 가정함으로써 자신을 결코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았다. [오늘날] 강의실 철학은 학생들이 그들 자신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이르도록 돕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한 도움은 주로 상담심리학과에 위임된다. 강의실 철학은 철학과 학생들이 더 나은 철학과 학생이 되도록 돕는 것으로 이뤄진다. 철학 강의실에 영혼을 위한 치료가 있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개인적 삶의 분투는 전문적 논쟁이나 학업성취와는 무관한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오늘 우리를 방문할 수 있다면, 철학이 서양세계를 구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더 이상 합당하지 못한 종교적 독단, 정당화되지 않는 문화적-정치적 전통, 음미하지 않은 개인 습관 등에 따라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소크라테스가 대학의 철학과를 방문한다면, 철학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형편없는 짓거리만 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학의 전문철학이 실천과 실험 모두를 결여하고 있는 사실 말이다. 철학은 단지 교육과 학습 과정일 뿐이고, 심지어 이른바 응용 과목들에서도 그렇다는 사실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관계에 관한 철학실천이 대학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이뤄지고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인간관계에 관한 철학실천은 철학상담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아무데서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출신의]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레숴(Nicholas Rescher)[참된] 지적 추구[가 갖는 의미]를 축소시키지(belittle)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회의론자들은 고대부터 줄곧 주장하기를] 저 난해한 이론적 문제들을 잊으라[고 했다]. 네가 실제로 필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라. [그러나] 그들은 세계에 대한 지적 수용 그 자체가 우리의 가장 깊은 실천적 요구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지 또는 인지적 부조화 상태에서는 만족스럽게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적 편안함이 신체적 편안함 못지않게 중요한 피조물이다.

 

철학상담은 레숴가 말한 세계에 대한 지적 수용지적 편안함을 제공한다. 그것은 철학실천의 전부가 그러하듯 한갓 지성화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 지성화 작업이 현재 대부분의 대학 철학과에서 실천되고 있는 철학의 전부고, 또 그 철학에서 잘못된 부분이다. 철학상담은 전문가들에 의해 절단된, 철학실천의 팔을 재생시키는 일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오늘 우리를 방문할 수 있다면, 그는 철학실천을 구출하고 있는 것이 철학상담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때로는 교육도 상담과정의 일부분이라고 여길 테지만, <10> 그는 자신이 의학실천의 비유를 통해 묘사한 그대로 철학이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협력하여 [인간] 조건의 개선을 위해 탐구하는 작업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소크라테스가 현대의 철학상담사와 자신이 아테네에서 관여했던 원칙들의 전쟁에 대해 상의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소중히 여겼던 원칙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이 과연 참인지,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 그러니까 그 원칙이 그것을 위해 목숨도 버릴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도록 정중히 요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실천은 이 같은 방식으로 그 남자를 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Issues in Philosophical Counseling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