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인으로부터 벤치마킹해볼 만하다는 동영상 몇 개를 추천받았다. 나름 좋은 내용에 재미까지 곁들인 유튜브 영상이었는데 감상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특히 댓글들이 "순수함"을 발견하고.
인간의 정치사회, 특히 한국의 정치사회가 침팬지나 일부 개미 집단의 생활 행태에서 그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일부 포유류나 곤충들은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해 타 집단과 물리적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동일 집단이나 아예 제3의 집단 내의 세력들과 전략적인 제휴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그들의 생존전략이 놀랍기도 하고 또 어느 정도는 도구적 합리성의 존재까지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동영상에 따르면 갈등을 넘어 상대 집단, 즉 타 정당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은 침팬지는 물론이고 개미의 지혜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싶다. 그렇다고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택하는 공존 방식과 인간 정치사회에서의 협상이나 연맹 결성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군의 사람들이 구현하거나 보존하기를 원하는 특정 가치나 공동체적 삶의 의미, 나아가 옳고 그름, 정당성 등의 문제가 관건이다. 동물이나 곤충집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물학적 현상을 인간의 사회적 현상과 비교해 보는 일이 생물학자 특히 진화 생물학자의 관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주제일 수 있겠지만 철학이나 논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그 같은 발상은 자연주의적 사고에 기인하는 오류(the naturalistic fallacy)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원칙적으로 존재 세계의 논리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 당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이 따라야 할 최고의 권위가 생존본능이라면,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상황에서 당시 독일 사민당이나 공산당은 나치당의 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한 “Ermächtigungsgesetz”(전권 위임법) 통과를 막기 위해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협력했어야 마땅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우생학 이론을 악용해 이른바 “아리안족” 이외의 인종을 궁극적으로 괴멸하려 했던 나치 정권의 만행 역시 생물학 이론을 무차별적으로 전용하여 발생한 역사적 비극이다.
윌리엄 해밀턴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는,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라는 발언도 문학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자의적 의도가 강하게 묻어나는 용어 선택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유전적 다양성의 결여 또는 획일성을 어떻게 “순수”라는 어휘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자연 진화가 다양성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주장은 또 어떤가? 베르그송은 자연의 생물계에서 적자생존의 원리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으로서 단순한 유기체가 복잡한 유기체만큼이나 환경에 잘 적응하여 생존해 오는 경우를 지적했다. 다양성이나 복잡성의 증가가 생존 가능성의 증가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캐나다 트뤼도 총리가 50% 이상의 여성 장관 입각 구성 비율 약속을 지킨 것이 우리 처지에서는 부러울 만도 하다. 그러나 울음을 참지 못할 만큼 감격할 정도로 “가장 아름다운 다양성”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주장에는 아무 제한 없이 동의하기 어렵다. 강연자와는 반대로, 오히려 “좋아서, 편해서” 정치가들이 추구하는 “political correctness”의 한 사례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olitical correctness는 이제 정치판에만 국한한 현상이 아니다. 2010년인가 BBC의 아서왕과 멀린의 전설을 소재로 한 드라마 “Merlin”에서 Guinevere 역을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고 적응이 잘 안 됐었는데 이제는 pc가 온갖 영역에서 “must” 현상으로 강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차별주의를 비롯해 온갖 차별주의의 의혹을 피하는 안전한 또는 편안한 방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보여주기식 쇼라면 모를까, 직무의 특성과 후보자의 능력을 적절히 고려하는 대신 특정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장관직을 기계적으로 할당하는 모습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