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용서의 어려움

Kant 2024. 4. 5. 18:12

기독교도 유대교도 모두 자기네가 더 온화한 종교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다 거짓말이다. 기독교 전통에는 처벌에 관한 엄청나게 많은 자원이 존재한다(<요한 묵시록>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유대교 전통이 죄의 댓가를 엄격히 기록하고 힘들게 속죄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 두 전통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대체로 기독교가 유대교와 같은 방향으로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 ‘교환적인 용서’의 개념은 기독교 복음서에도 등장한다.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주어라.”(누가복음 17.3-4) …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3. 19-20) … 마태복음 3장 7-8에서는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아직 회개하지 않았다며 호되게 질책한다. … 이처럼 용서는 그리스도가 자비로운 마음에서 자유롭게 베풀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환적 성격도 깊이 띠고 있다. …

 

가톨릭의 고해성사에는 유대교적 테슈바(Teshuvah)와의 연속성이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 회개하려면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동반한,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마음 깊은 슬픔과 경멸”이라고 트렌트 공의회가 정의한) 고백과 참회를 구두로 표현해야 한다. 그 다음 사제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하면 사면이 이루어진다. 이때 보속(補贖)이 함께 주어지는데, “보통 특정 기도문의 형태로 읽어야 하거나, 교회에 가거나 십자가의 길을 걷는 등 수행해야 하는 행동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많은 경우 자선행위, 금식, 기도가 보속의 주요 방법이기는 하지만 다른 처벌이 요구될 수도 있다. …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 사이에 벌어진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사제가 요구하지 않는 한 죄인은 상대에게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보통 보속은 그다지 타자 지향적이지 않으며 기도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푸코는 참회와 고백에 대한 저서 <Mal faire, dire vrai>에서 일단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 고백을 듣는 사람이 우위를 점하고 있고, 말하는 사람은 저자세가 된다는 것. 둘째, 그는 고해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해를 완전히 다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고해하는 사람이 자신의 숨겨진 죄악을 모조리 찾아내어 진실되게 고백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를 수는 결코 없다는 것.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 지적인데, 푸코는 이 모든 과정이 자기비하와 자기삭제, 치욕의 관행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내면 세계가 수도원 공동체에(또 고해신부에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언급하며) 말하듯, 기독교의 이런 관행이 내면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확대시켜왔을 수는 있겠으나, … 내면세계에 대한 편집증적인 의식 때문에 죄 지을 상황이 엄청 증대되고 죄악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것 또한 사실이다. … 기독교적 고백의 분위기는 언제나 강렬한 슬픔과 끔찍한 공포, 수치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수치심은 일련의 나쁜 행동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전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스티븐의 끔찍한 죄악이란 (자위행위나, 가끔씩은 매춘부들과 맺는 성관계는 물론) 성적인 공상을 뜻했다. 십대 남자아이들을 상대로 그들이 다스릴 수 없는 정신적 삶에 대해 이런 식의 강의를 하는 범상치 않은 잔인성은 일종의 호색적 성향과 지나칠 만큼 생생히 연관된다. 교회가 발휘하는 훈육의 힘은 정말 공상, 곧 결코 다스릴 수 없고 언제나 거역만을 일삼는 공상에 대한 집착에 그 열쇠가 있다. 사제는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루시퍼는 한순간 죄악에 찬 생각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위대함을 거역했고, 하느님은 그를 결국 천국으로부터 지옥으로 영원히 던져버리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스티븐을 사제에게 보내 고해하게 만드는, 용서를 갈구하는 마음은 비굴한 공포와 극단적인 자기혐오에서 배태된 것이다. 스티븐은 그저 자신의 정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일으킨다. (조이스의 의도대로) 우리가 이 진술을 읽다보면 우리는 그러한 전통 속에서 자라난 사람이 어떻게, 여자는 둘째 치더라도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될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 [참회, 고백, 용서에 대한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가 암시하는 내용은 용서의 과정 그 자체가 자아에게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용서는 구하기 어려우며 심리적 외상을 남길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침습적으로 발생하는 명예훼손 과정의 결과로만 주어진다. 보통은 그것도 상당히 일시적인 상품(賞品)으로만 주어진다. (사실 고해신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건, 압제적이고 잠재적으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방식으로 타인의 내면세계에 침입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아동학대에 대해 흔히 하는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나? 학대 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 말이다. 종교 재판관의 역할은 ‘이것이 바로 신이 우리에게 행동하는 방식이라는 이념을 통해 강력한 규범적 지지를 받게 된다.

 

인과응보의 오류는 많은 경우 용서의 과정에 내재하는 우주적 균형 또는 평형이라는 이념 안에서 나타난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용서를 통해 희생되는 이의 고통이, 그가 가했던 고통을 속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연해 있는 오류는, 편협하게 지위에만 초점을 맞추는 오류다. 이 모든 과정은 잘못을 범하는 필멸의 인간과 신의 관계를 모범으로 삼고 있으되, 신은 지위-피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손상에 대해서는 취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사이의 용서 과정은 결국 가해자가 끼친 지위-피해 또는 지위 격하를 비굴함과 비천함으로 보상해준다는 암시를 남긴다. 지위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 로마서 12에서 바울은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서로 평화롭게 살고 서로의 잘못에 대해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단, 하느님이 “원수 갚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12. 20)라고 결론 내린다. 바울은 자신이 추천한, 적에 대한 용서라는 처방이 복수의 계획을 완전히 버리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신자들은 신이 복수할 수 있도록 무대를 비워놓으라는 요구를 받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신자가 보이는 선량한 태도나 용서하는 행동이 신자의 도덕적 우월성을 맹백히 밝히고 가해자에게 고통과 치욕을 나눠주는 방법이므로 그 자체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라고 암시한다. 굳이 바울이 부추기지 않더라도 무척 하기 쉬운 생각이다.

 

…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모가 일반적인 분노를 품고 자신을 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경멸당했다고 느끼는 독립적인 자녀들이 흔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해로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자녀들은 부모(또는 다른 어른)가 통제력을 잃고 나쁜 행동을 하게 만듦으로써 그들과 자신들이 평등한 입지를 다졌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평등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겠는가? … 우리는 모두 인간이니까 심각한 도발을 당하는 경우에는 용서로 나아가기 전에 잠깐이나마 화를 내야 하는 걸까? 피해를 되갚아주고 싶다는 소망은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 맞다. 하지만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런 소망에 완전히 초연해지는 게 조금은 비인간적이고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이 질문에 혼란을 느낀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답이 ‘아니오’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취약성은 슬픔과 사랑만으로도 확보된다.

 
 
M. 너스바움(강동혁 역), 분노와 용서. 적개심, 아량, 정의 중에서
 
여하한 분노의 감정도 정당하게 지지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올바른 용서의 행위나 태도도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 같다. 후자쪽은 백퍼 공감. 전자는? 아직 확신이 안 선다. 그냥 설득 당하기가 싫은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