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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 과정에 있는 신체를 재발견하기

Kant 2022. 10. 11. 16:36

노화 과정에서 자신과 신체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는 일반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측면 중 하나로 여겨진다. 노화로 위협받는 상실은 신체적 쇠락이라는 순수한 사실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객체로 간주되는 신체로부터의 불가피한 소외감이다. 그런 신체는 살아갈 수 없고, 이미 죽음만이 유일한 해방구인 지하감옥이다.

 

그 소외의 극단적인 표현은 드 보부아르가 “우리의 변하지 않는 성질을 보장하는 내적 감정 그리고 우리의 변형이 보여주는 객관적인 확실성사이에서 묘사하는 절망적인 모순이다. 브래드버리가 묘사하는 90세 루미스여사의 모습은 어러하다. "[이런 나의] 신체는 비늘과 주름이 모두 있는 용이다. 그래서 용은 백조를 먹었다. 나는 몇 년 동안 그녀[백조]를 보지 못했다. ... 하지만 나는 그녀를 느낀다. 그녀는 내부에서 안전하고, 아직 살아있다." 마지막 절박한 이미지로, 그녀는 “난 무너진 탑 속의 공주야, 나갈 길이 없어.”라고 덧붙인다.

블라이트의 나이든 주인공도 같은 고민을 표현한다. “나의 나이든 부분이 나의 어린 부분을 걱정하게 만들어. [차라리] 완전히 늙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라고.

 

노화에서 그렇게 통렬하게 자라나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적대감의 기원은 노화에 따른 신체적 변화에서가 아니라, 의미의 객체로서의 신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의식에서부터 발견된다. 드 보부아르, 브래드버리, 블라이트가 표현한 난국을 넘어서 자아와 신체 사이의 다른 [긍정적] 관계를 상상[정립]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기원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신체는 모든 연령에서 개인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뚜렷한 의미의 객체다. 노인의 경험은 종종 노년의 특수성보다는 그 영향력의 비극적인 정점을 나타낸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자아와 신체의 관계를 알려주는 현대의 의미 관련 담론은 일관성 있는 체계가 아니라, 상반된 가치들의 결합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신체는 [한편으로는] 사람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심지어 가장 실제적인 측면으로 존중된다.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신체는 또한 존재의 부패한, 본질적이지 않은 요소, 즉 개인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겉모습으로 경멸된다.

 

이러한 관점의 파괴성은 앨비의 드라마 “아메리칸 드림”에서 설득력 있게 나타난다. “영맨(Young Man)의 신체는 그의 사회적 통화(가치, currency)이자, 그의 유일한 타당성(validity)이다.” 할머니는 그에게 궁극적인 찬사를 보낸다: “얘야, 너는 네가 뭔지 알지, 그렇지 않니? 너는 미국의 꿈이란다.” 이 이상적인 신체에 관한 기준을 할머니의 신체적 특성에 적용하면, 그 결과는 미국의 악몽이라고 할 수 있다. “난 늙은 여자처럼 보이는 것만큼이나 늙은 남자처럼 보여” 하지만, 영맨의 신체도 공포다. 그는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거세자다. “그들이 그것을 자른 후에도, 그것[거세자]은 여전히 손을 이불 밑에 넣고, 그것을 찾고 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것의 손목을 잘라냈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신체의 가치는 부패한 것으로 판단되고 타당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에서, 그것은 가치가 있거나 적어도 꿈만큼 현실적인, 그의 존재의 유일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대상으로서의 신체

 

앨비의 위의 작품에서 영맨의 신체는 두 가지 의미에서 꿈이다. 그것은 이상적인 것의 한 예이며, 또 그것은 허구이자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꿈꿨던 이미지다. 요컨대, 그것은 자아의 일부라기보다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사회적 의미의 객체로서의 신체에 대한 가장 이른 의식과 더불어, 노화의, 자기와 신체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위한 근거가 마련된다. 비록 그 대립이 젊음보다는 노화의 특징일 수 있지만, 규범적 의미가 만들어내는 신체로부터의 소외는 신체가 꿈이건 악몽이건 간에 존재한다. 영맨의 신체는 사회적 요구에 완전히 부합한다. 하지만 그것은 루미스여사의 하얀 백조에게서 나오는 용처럼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두 사람[영맨, 루미스] 모두에게, 신체의 의미와 가치는 외적으로 결정되며, 그것들은 원래 자아가 부여한 것이 아니다.

 

외적 의미의 매개에 더하여, 신체는 물리적 한계와 마주쳤을 때 즉각적인 객관성을 획득한다. 고통, 질병, 피로는 신체적 존재의 본질이다. 신체가 개인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한 물리적 객체[대상]로서의 의미는 미미하지만, 객관성이 장애물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자마자, 그것은 더는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중심이 되고 따라서 의미를 요구한다.

 

신체가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의미는, 살아있는 모든 자아와의 연결을 잃어가는 순수한 객체라는 사실에 있다.

 

"나는 간호사가 그것을 옮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다리나 가구 조각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내 다리는 이제는 내 것이 아니었고, 더 내 신체이나 나 자신의 일부가 아니었다. 더는 아무것의 일부도 아니다. 살아있는, 또는 느껴지는 현실에 관한 한 갑자기 내 다리(다리였던 것)가 아무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되었다. … 그것은 사라졌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노쇠함이라는 경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신체는 중립적인 무()로서는 보여질 수 없으나, 배신자이고, 끊임없이 화해해야 하는 적으로는 간주될 수 있다.

 

"당신의 신체는 갑자기 당신과 떨어져 있는 존재, 반역자가 된다. … 당신이 산책하고자 한다면 신체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당신은 낮잠을 재워주고, 단백질을 먹이고, 상처받은 감정을 극복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 물리적인 물체로서 신체의 제약은 소외로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완벽한 밝음 … 심지어 정신의 활력까지도, 내 경우에는 가장 심각한 생리학적 약점뿐만 아니라 과도한 고통과도 양립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글에서, 그러니까 그가 쓰러지기 불과 몇 주 전에, 그는 여전히 “피와 근육이 처한 극도의 처참한 상태와 거의 분리할 수 없는 감미롭고 영적인 것”이 존재함을 긍정했다.

 

 

대상으로서의 인격체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가지는 의미와 사회적 대상으로서 신체가 가지는 의미는,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대상으로서의 사람이 될 때 서로 수렴된다. 의료 환자들의 경험은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의 위치로 좀더 미묘하게 문화적으로 환원하는 열쇠를 제공하면서, 이것을 설명해준다.

 

"나는 내가 다리를 바라본 시각과 외과의사가 나를 바라본 시각 사이에 희극적으로 가까운 유사점을 느꼈다. 나는 다리를 물건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역시 분명 나를 물건으로 여겼다. 그래서 나는 이중으로 물건화되어 물건을 가진 물건으로 환원되었다."

 

노인들은 장애인들처럼 이중으로 사물화되지만 더욱 포괄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된다. 그들은 성가신 소수자가 받는 양면적 취급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 대상이다. 즉, 경제적 차별, 사회적 자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적 정밀 조사를 받는 대상이다. 그들은 마침내 별개의 종으로 고려될 정도로 특별하게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급진적인 환원은 사람들을 노인으로 분류하는 바로 그 범주화에서 일어난다. 나이가 많다고 분류하는 것은, 매혹적이라고 하거나 혐오스럽다고 하는 것과 같이, 외적인 판단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는 그 판단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되, 처음부터 고통, 에너지 또는 기쁨의 직접성을 지닌 내면의 현실로 경험하지는 못한다. “늙은”(old)이라는 형용사는 다양한 현상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데 사용되는 의미를 뜻한다. 그것은 개인들이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자기 중심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다. 사실, 어떤 사람에게 ‘내가 늙은이로 여겨지는구나’라는 인식은, 그 사람의 자아의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충격적인 부조리로 보일 수 있다. 블라이트의 주인공 중 한 명은 “내가 그렇게 늙었다는 것이 놀라워”라고 고백한다. 왜 그럴까? 노년이라는 범주는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자면, “실현될 수 없는범주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타인을 위한 정체성을 자신의 내부에서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노화뿐만 아니라 타인이 정하는 개인의 특성에도 적용된다. 사회적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그 한 예이다. “실현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나 자신도 완전히 내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나의 어떤 것이 외부에서 나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신체란 단지 개인의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에, 신체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일정] 한계 내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흰 백조는 용에 의해서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늙은”과 같은 형용어는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전체를 언급하려는 의도로 사용된 용어는 가장 혹독한 방법으로만 초월할 수 있다. 젊거나 초시간적인 존재가 늙은 존재 곁에 있다[이 셋  모두 하나의 독립된 범주들로서 간주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늙은 것'과 같은 포괄적인 범주의 억압에 맞서 주관적인 현실을 보존하려는 시도는 너무 [자기] 분열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이들에게는 “완전히 늙은”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총체적 범주의 냉혹한 논리는 전체주의적 기관들의 권력처럼 인격체들과 대상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 개인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자유를 말살해 버린다. 그 논리에 따르면, 늙었으면서 동시에 늙지 않았거나, 부분적으로 늙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논리는 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앨비의 주인공은 남김없이 “영맨(젊은이)”라는 이름으로 증류된다. 그는 범주로, 즉 개인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대상으로 환원되고, “젊은(Young)”은 그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사람을 물건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을 가치로 간주하는 윤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심각한 도덕적 문제다. 그러나 개인이 자신을 대상으로 간주할 때 발생하는 파괴적인 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심각한 실존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 파괴력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신체에서 개인의 소외는 신체가 제공하는 연결인 세계와의 연결을 위태롭게 한다. 자신의 장애를 다른 사람들이 혐오할 것을 두려워해서 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부하는 요양원 거주자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노인들에게서 이따금 발견되는] 자기 신체에 대한 무관심 또한, 그들이 신체에서 벗어나 이를테면, 신체적 위기를 초월한, 정신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 되기를 기대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 중 하나일 수 있다. 사회적 고립 이외에도, 신체로부터의 소외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결과는 개인의 붕괴[disintegration, 비통합성, 해체]다.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과의 연결점까지 잃게 된다. [하지만] 심지어 가장 혐오스럽고, 반항적인 상태에서도 신체는 여전히 우리 자아의 정박지이고 가장 명백한 현실이다. 신체에서 분리되어―신체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우리는 시인과 함께 이렇게 걱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살아 있는 혀가 모두 사라졌을 때 / 그 유리가 흐려지거나 깨졌을 때 /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노래 부를 것인가 / 노래하는 메뚜기의 영혼이 껍데기를 벗어 던졌을 때.”

 

 

신체의 회복

 

신체의 상실은 그것이 사회적 이미지나 신체적 이미지 또는 그 둘 다로 환원되면서 발생한다. 요컨대, 사람의 일부를 물건의 지위로 환원하는 것이다. 사람 전체를 물건으로 환원하는 일은, 신체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특징지어지는 문화에서 쉽게 나타나는데, 특히 자신의 신체가 신체의 기준들을 최고로 충족시키거나 그 기준들에 극단적으로 위배되는 사람에게서 그러하다. 사람을 사물로 환원시키는 도덕적, 실존적 위험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신체를 자아의 일부로 회복하고, 그 객관[대상]성을 그 사람의 주관성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노인들에 의해 거부되어 온 자신과 신체 사이의 화해의 한 가지 형태는 성(sexuality)이다. 용이 되는 신체는 (또 다른 용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신체다. 인간 가치의 위계질서에서 성적 성취가 차지하는 위치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성생활이 금지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람의 심각한 분열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신체와의 관계가 이미 문제가 될 수 있는 노인의 경우, 그 결과는 잔인할 수 있다.

 

"현대 노인 정신의학은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입은 노인들에 대해 말한다. 나르시시즘이란 씁쓸한 용어인데, 한때 우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불가피하게 우리의 시간을 끝내야만 한다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비즈니스를 달변적으로 압축해 표현하는 용어다. '성적으로 금지되었다'라는 말은 비록 그것이 단지 어떤 무지에 기반하고, 글로 표현되지 않은, 민속적인 의미에 불과할지라도, 이 상처[나르시시즘의 상처]에 보태어지는 불필요한 첨가물이다."

 

신체를 회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주관적인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적 대상으로서 신체가 겪는 소외는 표준화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한다. 미용, 체육, 임상 등에서 사용하는 범주와 기준은 신체의 모든 특징에 적용되어, 신체가 지녀야 할 최적의 크기, 모양, 혈청의 콜레스테롤 수치 등을 열거한다. 결국 모든 신체 현상은, 그 경험이, 승인된 범주 중 하나를 통해 이해될 수 있을 때에만 인정되며, 그 지점에 이를 때까지 외부 표준치를 통해 해석된다. 가령 배설물을 통제하거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고통은 노화라는 진단에 의해 간과되고, 심지어 허용되지도 않는다. 스코트-맥스웰은 “진짜 고통이 존재하고, 만일 우리가 거짓으로 쾌활한 척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고립 상태의 일부다”라며 슬퍼한다. 고립은 이중적이다. 타인들에서 멀어지는 것, 그리고 남들이 부정하는 주관적 현실을 지닌 신체에서 멀어지는 것. 외적인 표준보다 고유성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견해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저항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우리에게는 나이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 “더 많은”은 고통에 제한되지 않는다. 블라이스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준다.

 

"노인들은 종종 즐거운 눈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절망스러워 하지만은 않는다. 틀니, 렌즈, 작은 보청기, 지팡이, 힙핀 등에 의해 서비스 받는 살덩어리는 터무니없이 변해 버렸고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다. 신체는 고물 자전거가 되어버렸지만, 만일 당신이 운이 좋다면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

 

고물 자전거는 터무니없는 녀석이지만, 자아의 적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자아와 신체의 신중한 통합성을 기르고, 신체를 소중히 여기고 포기하지 않으며, 신체을 돌볼 수 있는 기회이다. 함께 웃고 춤추고 곧 헤어져야 할 사랑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쇠약함은 변증법적이 되고, 동시에 한계와 자유가 된다.―신체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 가장 친밀하고 오래된/새로운 동반자가 되는, 그러한 자아와 신체 사이의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자유 말이다.

 

Sally Gadow, "Recovering the Body in Aging"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