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부과된 도덕적 요구가 우리가 응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그리고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존경과 칭송이 강요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만성질환자, 그리고 재활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장기 보살핌[요양]을 가정과 가족에게 귀속시키려는 트렌드가 증가하고 있는 맥락에서 이런 불안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트렌드를 장려하는 배후에 놓여 있는 가설은, 가족이 어느 정도 사회적 지원을 받을 경우, 그러한 보살핌을 실질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도덕적, 심리적, 영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가족 돌봄은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과 보살핌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상호 보상의 경험, 즉 성장과 호혜의 풍요로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요불굴의 정신을 요구할 수 있고 또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새로운 자기 이해를 필요로 한다. 물론 그것은 새로운 힘과 도덕적 성취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억압과 적대감을 낳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간병 돌봄 제공자는 종종 선택하지 않은 삶의 방식과 자신의 미래가 아닌 미래에 갇혀버린다. 우리의 세속적인 도덕(종교적 전통은 아닐지 몰라도)은 선택하지 않은 책무(obligation)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불운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른 누군가의 행복과 복지에 양도해야 한다는 압도적인 요구가 부과될 수 있다.
가족 부양을 새롭게 강조하려는 생각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다. 의학적·기술적 진보의 이면에 있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는, 인간의 삶을 신체적 쇠퇴와 장애의 냉혹함으로부터, 그리고 또한 그와 동시에 그런 일들이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일상에 부과하는 환영받지 못하고 숨막히는 사회적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그 진보가 우리를 다시 똑같은 부담을 끌어안도록 만든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트렌드 뒤에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부담이 증가함에 따라 야기되는 재정적 압박이 존재한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유래 없이 더 긴 기간 동안 생명을 유지하지만, 그들의 지속적인 생존과 복지를 보장하는 데에는 끝없이 연장되는 치료와 재활의 대가가 따른다. …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중적인 대답은 더 저렴한 해결책으로서 가족 보살핌의 범위와 수용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정책을 지지하는 동기는, 가족 돌봄이 우월한 돌봄이고, 더 친밀하고 민감하며, 개인의 필요에 따라 더 잘 조율될 수 있고, 전통적인 가치, 특히 친족 관계와 가족 통합에 더 잘 양립할 수 있다는, 널리 퍼져 있는 믿음이다.
그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도덕적 자원이 필요할까? 사회가 사람들에게 종종 무겁고 때로는 벅찬 부담, 즉 다른 사람을 돌보는 부담을 떠맡도록 요구할 수 있는 윤리적 토대는 무엇일까? 비록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가족 구성원을 돌볼 용의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들의 헌신 약속을 지키고, 또 그것을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 자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사회는 어떻게 그들을 존중해주고 도울 것이며, 그들이 어떤 개별적인 의미를 발견하든 그것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
의학적 진보의 기본 전제와 그것의 일부인 모더니즘은 우리가 자연이 제공하는 거친 날것의 상태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러한 상태 중 하나가 바로 질병이 서로를 가난하고 의존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의학은 신체의 직접적인 고통 못지않게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질병이 우리에게 부과할 수 있는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질병이 과거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 도덕적 책무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
스트레스와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적절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특히 우리에게 주어진 요구가 우리 자신의 행복과 성취를 깊이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거나 계약을 존중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흔쾌히 도덕성을 부여하지만,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심리적 생존, 기본적인 사회적 자유,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없었을 경우 우리에게 합법적으로 허용되었을 개인적인 희망이나 계획 등을 위협하기 시작한다면, 가장 잘 뿌리 내리고 있고,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 가장 강력한 감정만이 우리를 지탱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목표를 우리 사회에서 성취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한 국민으로서 도덕적 책무의 원천에 대한 공통된 비전, 고통과 그 고통의 도덕적 중요성에 대한 공유된 이해,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사적인 슬픔과 부담을 어떻게 지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역경에 직면했을 때 견딜 수 있도록 하는 개인적인 미덕과 성격적 특성을 크게 장려하지도 않는다.
생존 본능은 현대 도덕에 잘 반영되어 있다. 사회 도덕 역시 확고한 규칙과 원칙을 개입시킬 수 있을 정도로 빈틈없이 잘 정비 되어 있다. 예컨대 인종차별, 성차별, 종교 또는 종족 차별 등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도덕적 권모술수나 타협, 용인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율성, 선택, 생존 및 현실적인 대처가 중시되는 개인 도덕의 경우엔 문제가 다르다. 게다가 개인 도덕의 경우, 우리가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돈을 받고 도움을 제공하는 치료사들도 있다. 결국,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고 행복을 찾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 우리에게 자기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오래되고 어려운 도덕적 문제이다. 대부분의 도덕 규칙은 일반적으로 도덕적 행위들을 칭찬할 수 있는 상식과 실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살인, 거짓말, 절도는 보통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심지어 우리의 자기 이익조차도 그것들을 피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의 삶이나 개인적인 희망을 도덕적으로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는 문제가 다르다. 그것은 가장 온화한 종류의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조차 오직 특별한 상황에서만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거의 모든 서양 도덕이 의무와 초과 공로(supererogation)를 구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 전체에 적용되도록 고안된 도덕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타주의적인 성자나 사심 없는 귀감이 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만성질환자나 필요한 재활 과정을 받지 못할 경우 만성질환 또는 장애에 이르게 될 사람들을 돌보는 영웅적인 의무의 부담을 가족들에게 부과해도 좋으리라는 사회 정책적 발상은 경고를 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필요할 때 가족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돌볼 의무가 있다면, 그 의무의 한계는 무엇일까? 우리가 가족 구성원에 대한 책무를 이행하도록 설득과 사회적 압력을 통해 요구하는 것이 설령 합당한 일일 수 있다 해도, 그러한 책무에 법적 제재를 부과하는 것 역시 항상 동등하게 합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는 도덕적으로 무엇이 요구될 수 있는가뿐만 아니라 의무의 경계선이 어디에서 끝나는가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가능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의무를 감정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지, 즉 단순히 고지식한 자기 부정과 의무 자체를 위해 의무를 수행하는 데서 얻는 엄격한 만족감이 아니라, 의미와 일관성을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현재 우리의 도덕적 자원을 고려할 때 어떤 여건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가족 돌봄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 지나친 낙관주의나 지나친 비관주의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가족들이 매우 잘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가족과 환자 모두 새로운 개인 자원을 찾아내고 잘 적응한다. 환자는 단순히 부담이 되기는커녕, 종종 치료를 제공하는 가족에게 상당한 기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적 사례들에 자주 의거하다 보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때로는 합리화하는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성격적인 결함 때문에 그러할 거라는 미묘한 암시가 주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가족들과 환자들은 매우 잘 해나가는 반면, 다른 가족들과 환자들은 명백한 잘못 없이도 자신들의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만족을 줄 수 있는 돌봄의 모든 측면들과 돌봄이 충분히 잘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일단 도외시하겠고, 그 대신 돌봄 간병인에게 가장 날카로운 도덕적 요구를 강요하는 돌봄의 특징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간병인들이 돌봄을 제공받는 사람만큼이나 질병이나 장애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갈취함으로써 그들의 복지와 행복을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돌봄의 특징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간병 돌봄을 요청받은 가족 구성원의 도덕적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까? 서로 다른 질병과 조건은 사회적, 가족적 상황이 다를 경우처럼 일반적인 답변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공통점은, 누군가가 본인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닌 요구, 즉 가족 생활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보살핌을 제공하라는, 예기치 못한 책무를 떠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라는 용어를 간병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최초의 선택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상황에 의해, 마치 한때 선원들이 영국 해군에 징집되었던 것처럼, 거칠고 갑작스럽게 선발된다. 그것은 도덕적 요구를 강요하는 가족 관계가 원래 자신에게 과격한 요구를 할 것으로 상상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예상치 않게" 발생한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변덕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불운의 희생자라고 느낀다. 결혼은, 일반적으로 혼인 서약이 말하듯,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할 때나”, 함께 산다는 일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실제로 결혼에서 최악의 상황이 실현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쁠 때"는 보통 충격과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에는 간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급박한 사고나 질병으로 손상을 입어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어서 고통을 심화시킬 수 있다. 누군가는 그런 일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자신을 희생하라는 요구, 미리 그것들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상상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방식으로 자신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내몰린다.
사람들은 그 복합적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까? 장애아를 돌보는 부모, 척수 손상에서 회복되는 남편을 돌보는 젊은 아내, 아내의 혈액 투석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노년의 남편,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의 재활을 돕는 중년 부인 등등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거나 직장을 잃거나 죽음의 비통함에 대처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많이 겪게 되듯이, 간병인들의 반응에도 놀라운 유사점이 있는 것 같다. 종종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비우도록 강요당하는 간병인으로 갇혀버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가족 간병인을 묘사하는 복합적인 초상화를 그려보도록 하겠다(내가 만족을 경험할 수 있는 사례보다는 부담을 겪는 쪽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그들은 가장 일반적으로 원치 않는 운명이 그들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를 느낄 가능성이 높다. 이 분노는 아픈 사람을 향할 뿐만 아니라 종종 자기 내면을 향한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과연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게 누구든 이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는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분노는 자주 죄책감을 유발한다. 때로는 분노가 아무 잘못도 없는, 그럼에도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아픈 사람을 공격적으로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도덕적 이상, 결혼 약속, 또는 부모가 아이에게 마땅히 해주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 등에 일치하여 살아가면서 내면에 감추어야 했을 분노와 반항감의 측면에서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실패를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양심은 알고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사람은 겉으로는 고귀하고 베푸는 사람처럼 보이고, 역경을 용맹함과 애정으로 맞서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부당하게 그리고 심지어 터무니없이 요구받고 있는 자신의 헌신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핌을 제공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가치에 대한 의식은 심각하게 손상된다. 침묵과 자신의 은밀한 마음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러한 모습이 알려질까봐 두려워하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더 잘 알게 될 때, 자신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사랑스럽고 참을성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는 분노와 적대감으로 가득 찬 옹졸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으로 알려질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이 같은 서술로 짐작컨대, 캘러한은 간병 돌보미의 심리상태를 직접 겪어봤을 것 같다]
분노와 죄책감의 상호작용은 자신의 이미지를 찢고 간병인과 아픈 사람 사이의 유대를 갉아먹는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일 경우, 종종 더 야비한 형태의 분노나 반항을 이겨낼 수는 있지만, 질식할 정도의 분노 그리고 거의 억누르기 힘든 성마름이 서서히 고문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기질과 자존감을 잃을 위험의 벼랑 끝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한 감정들의 조합이 때때로 아픈 사람의 죽음에 관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돌봐야 하는 원치 않는 도덕적 부담에 대한 완벽한 상상적 해결책이며, 동시에 사회적 해결책으로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해방을 약속한다. 양심에 제공될 수 있는, 그것보다 더 이상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그런데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양심의 부담은 더 더욱 가중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거의 살인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있겠는가?
간병을 받는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라면 문제는 다를 수 있다. 약간의 거리두기 내지 약간의 무관심이 가능할 것이다. 가족 사이의 부담에서 도덕적 올가미로 묘사되고 또 사용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가족 관계의 징표로 여겨지는 사랑과 애정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편안함을 제공한다고 여겨지는 유대감에 관한 심각한 왜곡이다. 그게 아니라면 일종의 잔인한 귀류법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즉, 그 유대감은 사랑과 기쁨을 희망하며 여러 차례 대가를 요구했고 또 아마도 한때는 그것을 성취했을 수도 있으나, 결국엔 당사자를 질식하게 만드는 멍에임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의 출산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던 엄마가, 자신의 아이가 장애를 가졌으며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자신이 원했던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며,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면서 그녀가 상상 속에서 그렸던 미래, 즉 좀더 자애로운 삶에 대한 염원에 상응하는 종류의 엄마 역할을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 사실은 그 엄마에게 무엇을 뜻할 수 있을까? 뇌졸중 환자의 젊은 아내가 결혼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 또는 사회과학자들이 너무도 냉혹하게 "역할 기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을 뜻하는 호혜성이, 그리고 한 때 실제로 그렇게 작용했던 호혜성이 거의 재구성될 수 없을 수도 있다. 만약 남편이 사회 생활에 필요한 평범한 요구 사항들에 잘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부부의 친구 관계는 축소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모든 부담에 더해 사회적 고립마저 생기게 된다. 때때로 낙인 효과도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예측에 관한 문제도 있다. 예측에 관한 불확실성은 재활 치료 돌봄의 큰 부담 중 하나로 보인다. 치료가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만성적 치료 돌봄으로 전환될 것인가? 간병인이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인가, 아니면 단기의 형을 선고받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큰 비율의 감정적 널뛰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간병인은 어느 날 아주 희미한 개선의 징후에서도 진전을 보게끔 현혹되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에는 아무런 변화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부분은 희망에 대한 가능성이다. 요구되는 시간과 깊이가 한정되어 있다면 어떤 일이든 견딜 수 있겠지만, 설령 일상의 부담이 터무니없이 과중하지 않다 하더라도 출구가 전혀 없는 미래는 분명 슬픔과 우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신기한 현상이다. 우리의 과거는 항상 지나가 버린 것이고, 현재는 덧없고 순간적인 것이다. 현자는 아마도 그 덧없는 현재에 살면서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겠지만, 만일 현재가 가차없이 요구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미래뿐이다. 구원에 대한 기약이 없는 미래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일은 없다. 이것이 바로 “절망”이라는 단어의 의미이자 인간을 궁극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흔히 말하듯) 시간이 짝사랑에 대한 치료제라면, 그것은 또한 보답된 사랑의 경우엔 우리를 간병 돌보미로서 누군가에게 영원히 묶어 놓는 저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가족 간병인에게 부과될 수 있는 도덕적 요구의 세부 사항에 대해 숙고해왔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주 극단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가족]을 위해 특정할 수도 없고 아마 종료될 수도 없을 기간 동안 자신의 자아와 자신의 미래를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적어도 처음에는) 그런 운명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사랑이나 의무 또는 둘 다의 유대로 인해 그들에게 던져진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애초에 그들이 자발적인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 선택이 의미한 끔찍한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이 아무리 예상하지 못했고 원하지 않았던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이 그 부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도덕은 그들이 이전에 했던 헌신,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들을 믿었던 사람들의 삶을 배반하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엄격하게 약속을 이행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과 미래를 희생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공정한 일일까, 또한 우리 자신에게도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
마지막 질문을 다루기 위해 나는 여기서 도덕적 책무[구속성]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특히 이러한 경우에 나타나는 의무의 종류와 근거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도덕적 책무로,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편리하든 만족스럽지 않든 우리가 정당화할 수 있는 주장을 의미한다. 불행이나 불편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더 높고 더 포괄적인 도덕적 책무만이 [이것과 비교가 되는] 어떤 다른 도덕적 책무를 대체할 수 있다.
가족 관계에서 과연 이 도덕적 책무의 근거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여기서 많은 구별을 하고 싶어진다. 부모가 자녀에게 빚진 것, 아내가 남편에게 빚진 것, 형제가 자매에게 빚진 것, 자녀가 연로한 부모에게 빚진 것 등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명백해 보이지 않는가? 혼인으로 맺어지는 유대를 만드는 계약 관계의 종류와, 부모-자식 관계의 생물학적 기원은 서로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완전한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겠지만,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가 가지는 특별한 성격이 관계의 특별한 특징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제안하고 싶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특징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가족 구성원의 궁극적인 필요와 취약성이다. 이러한 궁핍의 완벽하고 고전적인 모델은 유아가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우다. 유아의 취약성은 너무 완벽해서 그것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유아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역경의 상황 역시 사람들을 거의 취약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익명의 유모가 굶주린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이 보살핌을 제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용되어 교대로 일하는 무관심한 간호사들이 노인들의 신체적 필요를 돌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대신, 아프거나 부상당한 가족 구성원의 취약성에서 중요한 측면은,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가까운 사람만 제공할 수 있는 종류의 보살핌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자신을 돌볼 누군가가 아니라 꼭 남편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한때 그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를 알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방식으로 수년에 걸친 노고를 치루었다. 더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은 그녀의 복지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취약성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갖고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충실함이란 도덕적 의무나 보편적인 사랑의 대상에 대한 충실함이 아니라, 특별하고 독특한 사람인 우리[나]에게 충실하는 것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이 말하고 있는 사실은, 모든 중요한 도덕적 책무의 핵심에는 어떤 다른 사람의 취약성이 있는데, 가족 생활과 질병의 맥락에서 그 취약성은 가족 구성원만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반적인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는 많은 예외와 사소한 비판이 따를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내 주장의 요점에는 중요하지 않다.
이 부분이 나를 도덕적 문제의 핵심으로 이끈다. 만일 우리가 한 가족 구성원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보살핌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 다른 가족 구성원만이 그 필요에 충분히 적절한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사실이 자동적으로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의 권리(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를, 그리고 그러한 보살핌을 제공해야 하는 가족 구성원의 책무를 수반한다고 보아야 할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해 환자가 처음에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돌보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결국에는 충분히 그리고 일반적으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즉시 대답할 수도 있겠다. 또는 재활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신체 및 건강 관리를 다른 사람들이 제공해주기를 선호한다는 점을 언급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지 않으며, 단지 가족 구성원들의 요구가 쉽게 해소되지 않는 상황들에 좀 더 첨예하게 초점을 맞추고 싶을 뿐이다.
나는 돌봄에 관한 요구 사항이 크거나 과하지 않다면 부모는 아픈 자녀를, 남편은 아픈 아내를, 자녀는 늙고 아픈 부모를 돌보아야 하는 강력한 가족 책무가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가정하겠다. 최소한의 품위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제한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은, 무거운 그리고 아마도 증가해 가는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반대 의견의 한 방향은 주로 실천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데, 만일 “당위”가 “능력”을 함축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아주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중압감으로 무너질 것이고, 아마도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사람들의 문제를 그저 가중시키기만 할 것이다. 이 입장은 보다 광범위하게는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사회 정책으로서 가족 돌봄을 촉진시킨 결과가 이혼, 신체적 정신적 학대, 광범위한 방치 등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고, 또 요구 사항이 너무 가혹하여 널리 감당할 수 없다는 증거가 쌓여만 간다면, 그런 정책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책무의 한계를 설정하는 방법으로서, 자기애와 자기 이익에 대한 도덕적으로 합당한 요구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반대 의견에 더 관심이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 도덕 철학자들은 명시적으로 이해되고 수용된 계약상의 합의를 훨씬 넘어서까지 도덕적 책무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예민해 한다. 행동이 도덕적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즉, 자율성을 기본적 요구 사항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비계약적인 도덕적 책무라는 아이디어를 상당히 문제시 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율성을 침해하며, 만일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면 공로, 칭찬, 덕, 교화의 영역에 해당되지만 도덕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기까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리한 구분선을 긋는 목적이 반드시 자아를 강화시키거나, 우리를 구속받지 않는 자기 이익의 푸른 초원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그것은 대부분 철학자들이 계약상의 요구가 아니라 삶의 맥락적인 요구에서 비롯된 비자발적인 자기 희생에 관한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확립하는 문제에서 봉착하는 근본적인 어려움에 기인한다. 나는 그 어려움이 현대 대부분의 영미 도덕 철학이 취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인 방향성에서 비롯한다고 믿는다.
[이 밖에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지적 흐름들이 다소 다르면서도 수렴하는 접근 방식들을 제시한다. 페미니즘은 특히 자기 희생과 이타적인 삶을 너무도 쉽게 수용하게 된, 여성의 문화적으로 강화된 특성과 싸우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대부분의 가족 간병인이 여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비판은 특히 중요하다.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한 개신교 신학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기독교의 중심적인 덕목인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기애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한 보다 현대적인 통찰 사이에서 더 나은 적합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특히 사랑은 본성상 이타적이어야 하고 완전히 타인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을 분해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요한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열린 마음과 성실성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한계 설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것보다 도덕적 책무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그 가장 분명한 이유는 도덕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는 인간 능력을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하도록 자신의 감정적 능력에 상당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웅적이고 특별한 돌봄이 필요할 경우, 간병인에 대한 합당한 기대치를 쉽게 설정할 수 없다. 그런 종류의 돌봄은 간병인을 일반적인 도덕성의 한계 너머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현실은 도덕성 자체와 관련해 더 깊은 문제를 암시한다. 도덕성이라는 것, 특히 자기희생적인 도덕성은 의지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많은 세속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도덕이 공유하는 가정은,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행해야 하며, 도덕적 행동에 대한 좋은 이유는 그 자체로 충분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행동이 따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화를 누그러뜨리기 힘들어 하는 간병인들이 너무 많아서 그러한 견해를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견해는 심리학적으로 순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내면에서 우리의 판단과 의지를 채색하는)이나 우리 행동의 사회적 환경(외부에서 우리의 판단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소한 도덕 규칙들과 도덕적 요구, 의지만으로도 우리를 지탱할 수는 있다. 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도덕 규칙들을 지키면 실제적인 혜택이 따른다. 우리는 주는 만큼 돌려받지만, 이익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희생을 요구받을 때,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정한 방향에 따르는 삶을 박탈당하는 훨씬 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훨씬 더 적은 것을 돌려받게 된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계산적인 이성이 정당화할 수 있는 것 또는 거의 가장 완고한 의지만이 의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도덕적 행동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덕률을 지키거나 영웅적인 요구를 부과하는 것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완벽하게 정당한 주장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도덕성 자체보다 더 깊은 어떤 정당화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도덕성이라는 명목만으로 개인적인 비극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겠는가? 왜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위해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가? 규칙이나 의무의 도덕성, 그리고 옳은 일을 하려는 의지 등과 같은 나침반 안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훌륭하고 일반적인 대답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큰 희생을 베푸는 사람들을 칭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쉽게 정죄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도덕적 교착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결책이 있을까? 난 영웅적 자기 희생이란, 삶의 전체 방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교적 또는 더 높은 의미의 어떤 계획 안에서 설정된 삶의 방식의 맥락 안에서 이해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위에서 다른 사람들의 취약성이 우리에 대한 그들의 주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그리고 반드시 우리만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 즉 그저 궁핍한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보살핌의 사례들로서가 아니라 독특한 개인으로서 응답하는 보살핌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취약성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취약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 증여의 불가피한 대가는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간다. 그것은 우리의 희망, 우리의 정체성 등과 같은 핵심적인 어떤 것이다.
나는 만일 내가 우리들이 지닌, 서로에 대한 모든 필요와 취약성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그런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급진적인 희생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삶이 종종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바치려는 도덕적 요구가 너무 터무니없고 완전히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부류의 사회에서 매우 위협적인 일은,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는 도덕적 주장이 처할 수 있는 고립 상황이다. 우리의 필요가 무거워진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해 줄 것이라거나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희생이 모두 영웅적이고 따라서 완전히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된다면 어째서 그런 일을 기대해야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지원 시스템의 개선 방향을 가리킨다. 그들은 주 및 연방 기관의 재정적, 심리적 지원이 필요하며, 도움과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감적이고 민감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종류의 사회와 다른 종류의 도덕성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적절한 사회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비극에 직면해 있으며, 여전히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명령적인 의무들에 우리를 대면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덕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요구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도덕성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성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도덕성은 자력만으로는 자기 자신을 들어올릴 수 없다. 여기서 문제의 일부는, 우리가 재활의 필요성 뒤에 숨어 있는 부상과 질병으로 인한 피해를 부상 자체의 피해로 간주할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반응으로 간주할지에 달려 있다. 의학의 공격적인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전통은 부상 자체를 근절해야 할 악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부상은 자연의 우연적인 사건이다. 모든 악은 오로지 공동체가 그 사건들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호하는 궁극적인 해석이 무엇이든 간에, 보살핌을 제공해야만 하는 가족들로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개인적인 비극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그들에게 끔찍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에는 어떤 의미가 주어져야만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서 필요한 종류의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는 종교적인 문화뿐인 것 같다. 고통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보상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은 엄격하고 불쾌한 도덕적 요구에서 만족스러운 도덕적 소명으로 변해야 한다. 공동체에 의해 영예롭게 인정받고, 돌보는 사람 자신도,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겠지만 보살핌을 필요로 하게 될 때 동일한 것으로 돌려받는 것으로서 말이다. 취약성은 인간 조건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필요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더 큰 힘과 축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의무와 도덕적 영웅주의는 여전히 서로 구별되지만 의무의 수준은 훨씬 더 높게 설정되고 경계선에 관한 긴장이 덜하다. 또한 때때로 영웅주의는 모든 삶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사회는 필요와 강점에 부합하는 방법을 찾는 사회, 그리고 소수자와 기타 취약 집단에 가해지는 공적인 불의뿐만 아니라, 자연과 삶이 개인에게 가하는 사적인 불의도 돌보는 사회다.
나는 종교적인 문화만이 그와 같은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기획하고, 또 때로는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 종교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문제를 가진 셈이다. 부담을 완전하게 분담하는 세속적인 생활 방식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는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가족들에게 영웅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데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희생을 요구해야 한다면, 반드시 그들을 가장 잘 보상하고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Daniel Callahan, “Families as Caregivers: The Limits of Morality”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