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한 자식들이 부모에게 진 빚은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아무것도 없다”라고 주장하겠다. 나는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데 동의하지만, 자녀들이 무언가를 “빚진”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난 부모의 자발적인 희생은 “갚아야 할 채무”를 만든다기보다 “사랑”이나 “우정”을 만든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장성한 자녀의 의무는 친구들 사이의 의무와 비슷한 것이며, 부모의 이전 희생에 대해 갚아야 할 의무가 아니라, 그들과 부모 사이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의무나 책무(a duty or obligation)가 있을 때마다 “빚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철학자들을 반대할 것이다. 어떤 도덕적 상황에서는 “빚”이라는 은유가 적절할 수도 있지만, 내 주장은 사랑의 관계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와 성장한 자녀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오해는 “빚진”(owing)이라는 용어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모가 이렇게 불평하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우리가 너를 위해 희생한 모든 것(피아노 수업료 지불, 너를 대학에 보내준 것) 때문에 집에 편지를 써야 할 것을 빚지고 있어(피아노 연주를 계속하고 히피 생활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도).” 이럴 때 간혹 자녀는 “전 (피아노 레슨을 받고, 대학에 다니고 싶어서) 태어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이러한 부적절한 일상어 표현은 효도의 올바른 근거인 사랑을 모호하게 하거나 심지어 약화시키기도 한다.
호의(favors)는 부채(debts)를 만든다
은유이긴 하지만 “빚진”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적절한 경우도 있다. 이웃에 새로 이사온 맥스는 이웃인 니나를 거의 알지 못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이 한 달간 휴가를 떠나 있는 동안 우편물을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동의한다. 그 후 니나가 맥스에게 그녀를 위해 똑같이 해 달라고 요청하면 맥스는 동의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니나가 그에게 똑같은 일을 해주지 않았다면 그가 갖게 되었을 것보다 더 큰 정도로). 그 일이 니나가 그로 인해 짊어졌던 짐에 비해 훨씬 더 큰 짐이 될 수도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이것을 호의(a favor)라고 부를 것이다. A가 B의 요청에 따라 B를 위해 약간의 부담을 졌을 때 B는 보답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이 경우, 맥스가 니나에게 빚을 졌다는 은유는 적절하다. 물론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부채는 아니다. 그래서 니나는 차용증서를 상속인에게 전달하거나, 아니면 맥스가 쓰레기를 버리는 형태로 그것을 지불하라고 요구하거나 그를 고소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스는 그 대가로 비슷한 성격의 행위와 희생을 수행해야 하므로 이 용어는 암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가 보답하면 부채는 “탕감”된다. 즉, 그들의 책무는 맥스의 최초 요청 이전 상태로 되돌아간다.
맥스가 그저 휴가를 다녀왔을 뿐인데, 놀랍게도 그가 없는 동안 이웃이 일주일에 두 번이나 자신의 잔디를 깎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것은 호의가 아닌 자발적인 희생이며, 맥스는 이에 보답할 의무가 없다. 그가 자원해서 그렇게 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과도한(supererogatory) 일을 하는 것이다. 니나의 행동은 호의라기보다는 친절한 몸짓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맥스가 울타리 너머로 수다를 떨거나, 집을 뛰쳐나간 그녀의 반려견를 잡는 일을 돕거나, 또는 이와 유사한 것을 해줄 것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녀는 우정이 발전하기를 기대할 수 있지만, 맥스는 그녀가 풀을 깎아준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우정으로 (또는 무슨 이유로든) 그녀와 함께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녀의 친절 행위를 되갚아주지 않으면 그녀는 거절당했다거나 화가 난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맥스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분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빚진”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는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기 마련이고, 또 호의를 교환하는 사람들은 친구가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호의와 비호의를 구별하는 것은 때때로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테스트 가능성은, 맥스의 동기가 어떠했는지를 물어 보는 것이다. “니나에게 잘해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녀가 나를 위해 x를 해주었기 때문”인가? 호의는 우정으로 발전하지 않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도 자주 베푼다. 그렇지만 상환의 기회가 전혀 발생하지 않더라도 일시적인 구속성(obligation)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완전히 낯선 사람들인 오스카와 마틸다가 슈퍼마켓의 계산대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가정하자. 오레가노를 깜박한 오스카가 마틸다에게 카트를 좀 봐달라고 부탁하자, 그녀가 그렇게 한다. 이번엔 마틸다가 토마토 소스를 고르는 동안 오스카에게 똑같은 일을 해달라고 요청하면, 그는 동의할 의무가 있다. 비록 그녀가 그의 카트를 보아주지 않았더라도 자기가 잡지를 읽어야 한다면서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의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녀에게 그것을 “빚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에게 같은 일을 했다면 그는 도와야 할 추가 책무를 지게 되며, 이 경우 “빚진”이라는 말은 적절하다. 그것은 평등하고 호혜적이며 희생한 것을 없애는 합의를 뜻한다.
우정의 의무
“빚지다”와 “갚다”라는 용어는 호의의 경우에 유용하다. 왜냐하면 양측의 희생 금액의 동일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금전적인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호의가 동일한 양의 희생에 관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정은 호혜성보다는 상호성에 의해 특징지어져야 한다(friendship ought to be characterized by mutuality rather than reciprocity). 친구는 주고받는 이익의 총액에 상관없이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을 제공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수락하며, 상환에 대한 전망보다는 사랑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 따라서 “빚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정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알프레드가 비트리스에게 값비싼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극장에 데려갔다고 가정해 보자. 비트리스는 굿나잇 키스나 약혼 등으로 그에게 “갚을” 의무가 없다. 만약 알프레드가 그녀가 그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불평한다면, 그는 그녀가 호의를 갚아야 한다는 가정 하에 행동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의 행위는 오히려 우정을 쌓기 위한 관대한 제스처였다. 만일 그것이 우정이 아니라 갚아야 하는 빚으로 행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가 그녀의 상환을 섹스나 관심의 형태로 바라지 않기를 희망한다. 알프레드가 이런 식으로 추리하는 경향이 있다면, 비트리스는 초대를 거절하거나 자신의 저녁 식사 비용을 스스로 지불할 것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므로, “투자”에 대한 “수익”을 기대하는 그의 태도는 우정의 발전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 비트리스는 우정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경우에만 그의 제스처에 보답해야 한다.
“빚진”이라는 관용구의 또 다른 일반적인 오용은 스미스씨네가 존스씨네에서 네 번 식사를 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한 번일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흔히 “저희가 세 번의 저녁식사를 빚지고 있네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업상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적절할 수 있지만 친구 사이에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존스 부부는 스미스 부부를 초대한 이유가 밥을 먹이거나 배불리 먹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우 보통 양쪽 집 모두가 누리게 되는 우호적인 만남 때문이다. 만일 스미스씨네가 존스씨네에 대해 우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초대를 거절할 수 있고 존스 부부를 초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 아무것도 빚진 것이 아니다. 물론 자원과 필요가 거의 동등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동등한 희생(반드시 대략 동일한 저녁 식사가 아닐 수도 있지만)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희생이 자원에 크게 비례하지 않는 경우 그 관계는 우정보다 노예에 더 가깝다.
호의와 우정의 또 다른 차이점은, 우정이 끝나면 우정의 의무도 끝난다는 점이다. 덜 희생한 쪽은 상대방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엘머가 그의 아내 도리스가 수술에 필요로 하는 1 파인트의 혈액을 기증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혼한 지 몇 년 후, 엘머는 사고를 당해 1 파인트의 피가 필요하게 되었다 치자. 그의 새 아내 코라 역시 같은 혈액형이다. 도리스는 엘머에게 피를 “빚”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새 아내 코라가 기부하기로 자원했다면 앞으로 나서는 것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도리스가 기부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신혼 부부의 우정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엘머가 단순히 도리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보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피를 주었다고 암시함으로써 도리스와 엘머의 이전 관계를 얕잡아 보는 것이다. 이혼의 가슴 아픈 특징 중 하나는, 이전에 상호성으로 특징지어졌던 관계에서 양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코라가 기증할 수 없다면 도리스의 의무는 혈액이 필요한 여느 이전 배우자들의 의무와 동일할 것이다. 엘머가 그녀를 유사하게 도왔다는 사실에 의해 증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친구일 경우 그 정도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는 결국 엘머의 기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요컨대, 호의로 인한 빚과 달리 우정의 의무는 동일한 양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동등한 희생을 하는 것이 호의의 빚을 갚는 것처럼, 우정의 의무를 취소하지는 않는다. 요청하지 않은 희생 자체가 빚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는 우정을 요청하거나 시작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의무를 지닌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상호 이익이 동기가 될 수 있지만, 친구는 애정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우정 관계의 특성은 “빚진”이라는 말에 의해 왜곡된다.
부모와 자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호혜적인 호의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성을 특징으로 하는 우정의 관계여야 한다. 부모가 지불한 희생의 양은, 성장한 자녀가 어떤 의무를 가지는지를 결정하는 것과 무관하다. 장성한 자녀가 늙어서 병든 어머니에게 제공해야 할 의료 지원은 예를 들어 어머니가 과거에 어려운 임신을 견뎌냈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머니의 필요에 달려 있다. 또한 “부채를 탕감하다”라는 문구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양의 희생이 수행된다고 해서 부모에 대한 의무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녀가 부모를 위해(그리고 자녀를 위해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1) 각자의 필요, 능력, 자원 그리고 (2)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속적인 우정의 정도에 달려 있다. 따라서 어린 시절에 지불된 희생의 양에 관계없이 유능하고 부유한 자녀는 궁핍한 자녀보다 궁핍한 부모를 더 많이 도울 의무가 있다. 예를 들어, 세실과 다나 자매는 부모에게 똑같이 사랑받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세실은 돌보기 쉬운 아이이고 거의 아프지 않은 반면, 다나는 비행 청소년으로서 자주 아프고 약간의 문제를 일으켰다. 다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로서 부모의 집에서 먼 곳에 사는 반면, 세실은 근처에 사는 부유한 변호사다. 부모가 방문과 재정 지원이 필요할 때 세실은 이러한 부담을 동생보다 더 많이 져야 할 책무가 있다. 이것은 이전에 부모가 희생한 양보다는 그녀의 능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희생은 지속적인 우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인과적 역할을 하는데, 이는 책무[구속성]의 근원이 희생이라는 부정확한 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근원이 우정이라는 사실은, 희생이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우정이 발전하지 않거나 지속되지 않은 경우를 조사함으로써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입양시키기 위해 포기했고, 그 결과 어느 쪽에서도 아무런 사랑의 감정도 발전하지 않았다면, 성장한 아이는 임신 중 그녀가 치른 희생에 대해 그녀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입양된 자녀는 만일 양부모와의 사랑의 관계가 손상되지 않았다면, 친자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다.
장성한 자녀의 효도[책무]는 봉사에 대해 져야 할 빚이 아니라 우정의 결과다. 밴스가 가족이 믿는 종교 안에서 결혼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강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롤라와 결혼했고 그 결과 부모가 밴스와 다시 대화하기를 거부했다고 가정해 보자.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는 밴스의 문제들, 그의 성취, 그의 자녀의 탄생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된다.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이 그 사건과 30년 간의 단절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 시점에서 밴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반적인 의무 외에 노년의 부모의 의료비를 지불할 책무는 없는 것 같다. 추가적인 효도의 책무는 그가 여전히 그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사랑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의 부모가 “네가 어렸을 때 우리가 널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보거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 희생은 호의가 아니라 그 당시엔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는 우정의 일부로서 발생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더 적절한 메시지는 “우리는 여전히 널 사랑하고 있고, 우리의 우정을 새롭게 하고 싶구나”가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자녀가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널 위해 y를 했기 때문에 넌 x를 해야 한다”라는 부모의 주장은, “우리는 널 사랑하고, 네가 x를 하면 넌 더 행복할 거야”, 또는 “우린 네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x를 할 것이야”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부모의 희생이 호의였다고 한다면, “저는 당신들에게 제게 해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자식의 반응이 적절한 대답이 될 것이다. 부모의 말이 수정되었다면, 이 대답은 명백히 부적절할 것이다. 자식은 x를 행하거나, 아니면 부모의 주장 중 하나에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x를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지는 않는다거나, 그 또는 그녀가 x를 하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녀에게 집에 편지를 쓰고 방문하며, 인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적절한 양의 정서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해달라는 부모의 요청은, 우정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충분히 근거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그 사람들을 돌보고 돌봄을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자녀가 생활 방식이나 삶의 목표 등과 관련해서 보다 전면적으로 변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부모들의 요청은, 일단 [그 같은 돌봄에 대한 요구의] 정당성을 갚아야 할 빚에서 사랑에게로 옮겨 놓는다면, 지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호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네 대학 학비를 지불했기 때문에 넌 록 음악가가 되기보다는 엔지니어 경력을 쌓아야 할 빚을 우리에게 지고 있어”와 같은 추론을 암시한다. 이것은 등록금 지불을 사랑에서 나온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마치 자녀의 삶의 목표를 “구매”할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보답을 위한 투자로 묘사하기 때문에 애정을 더욱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주장의 근거를 사랑에서 찾을 경우, 다른 패턴의 추론이 등장하게 된다. 억압된 전제, 즉 “만일 A가 B를 사랑한다면, A는 A의 평생 경력과 관련해 B의 바램을 따른다”는 단순히 거짓이다. 사랑은 자녀가 대안적 삶의 목표가 바람직한지에 관한 부모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것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 부모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장은, “우리는 널 사랑한다. 우리는 네 행복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넌 엔지니어로서 더 행복할 것이야”이다. 이것은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 경험적 주장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상의 예들의 기능은, 부모와 성장한 자녀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우리의 숙고된 판단들을 도출해 내고, 나아가 그 판단들이 얼마나 호의의 모델에 들어맞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지속적인 우정이다. 그 관계가 비록 부분적으로는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의 결과로 발전해 나온 것이긴 하지만, 성장한 자녀의 부모에 대한 의무는 희생보다는 우정에서 비롯된다. 부모에게 호의[은혜]를 입었다는 관용구는, 만약 그것이 상호성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양적 호혜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면, 정말로 파괴적일 수 있다.
Jane English, “What Do Grown Children Owe Their Parents?”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