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는 시점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치유의 소명에서 첫 세 국면—소명, 형성, 숙달—에서는 타인의 취약성과 세상의 상처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세 국면—고갈, 돌파, 재충전—에서는 자신의 상처가 필연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자신의 상처와 타인의 고통 사이에서 반복되며 울려 퍼지는 것을 나는 도덕적 고통이라고 부른다. 이 고통은 분명히 고갈의 원인이 되지만, 역설적으로 돌파와 재충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고통을 인식하고 다루는 것이 치유의 소명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발걸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치유의 소명의 여섯 국면 각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도전은 상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1. 소명—세상의 상처에 관심 갖기
2. 형성—상처와의 만남을 준비하기
3. 숙달—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성공하기
4. 고갈과 번아웃—자신의 상처가 드러남
5. 돌파—자신의 상처와 타인의 상처가 교사가 됨
6. 재충전과 갱신—자신의 상처와 타인의 상처가 자원이 됨
우리는 치유의 과정에서 매 국면마다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고, 그 상처로 인해 고통받으며, 그 상처로부터 배우고, 그 상처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은 취약성, 상처, 그리고 치유에 대한 질문을 지속하게 만든다—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 어느 쪽이 지배적인지,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함께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들 말이다.
자신의 상처를 다룰 때, 대략적으로 세 가지 유형의 상처와 이를 접근하는 주요 전략들을 구분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현재 시점의 상처이다. 예컨대 지금 일어나고 있거나 최근 몇 달 동안 일어난 직장 내에서의 스트레스와 상처다. 둘째로는 역사적 상처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 경력이나 성인기의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으며, 여전히 일상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원형적인 상처가 있는데, 이는 어린 시절에 발생한 사건들—신체적, 성적, 정서적 학대, 그리고 이와 유사한 정도의 다른 트라우마—로, 경력 형성 이전에 일어난 일들이다. 경력이 쌓여갈수록 원형적 상처를 다루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데, 초기의 광범위한 상처가 탈진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 관련 문제에서 흔히 발생하는 현재 시점 및 역사적 상처의 근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치유자에게 도전으로 여겨지는 환자들 (특히 폭력적이거나 학대적인 환자들)
· 전염병 (AIDS, COVID-19)
· 총기 난사 사건
· 자연 재해 (카트리나 때의 메모리얼 병원)
· 내전 및 국제 전쟁
이러한 현재의 사건들로 인해 압도당할 때에도, 역사적 상처를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AIDS 전염병 동안 의사들이 직면했던 도전 과제를 검토한 것이 COVID-19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했는데, 당시의 제도적 실패, 정치적 혼란, 그리고 놀라운 질병 양상 등이 공통된 주제였다. 그러나 이처럼 큰 규모의 현재 사건이 발생할 때, 원형적 상처를 다루기 위한 심층적 작업에 필요한 안전과 자원을 제공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한계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선배 동료들과의 정기적인 브리핑과 동료의 지속적인 지원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개인적, 제도적, 정치적, 사회적, 지역적, 국가적 모든 수준에서 지지 기회를 추구하는 것도 유익하다.
역사적 상처를 탐구하는 데는 대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그룹을 설정해서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상처는 주로 매우 감정적이고 미해결된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안전을 보장하고, 지침을 제공하며, 안심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원형적 상처를 다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반자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혼자서 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치료사, 직장의 전문 상담사, 성직자, 지역사회 원로, 또는 믿을 수 있는 선배 동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감정적, 신체적으로 안전하고 안정적인 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만 치유가 가능하고, 상처가 다시 재현되지 않는다.
위에서 권장한 탐구를 어느 정도 진행한 후에는 더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외부의 고통과 우리 내면의 상처 사이에서 연결고리와 연속성을 찾는 것이 새로운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왜 우리는 병동 간호를 선택했는가? 왜 정신 건강 분야를 선택했는가? 왜 가정 폭력 문제를 선택했는가? 우리 삶의 초기 경험들 가운데 특정 환자 집단을 돌보거나 특정 직장 환경에 몸담게 한 이유가 있을까? 돌보는 자로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우리의 역사적 또는 원형적 상처와 연결되어 있는가? 왜 특정한 유형의 고통과 마주할 때 우리의 에너지와 능력, 재능이 동원되는가? 이러한 역학 관계가 이전의 상처와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결코 우리의 소명을 경시하는 것도 또 동기를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더 많은 정보와 통찰을 제공하여 우리가 치유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더 키워줄 뿐이다.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일을 하라는 부름을 느끼고, 그 일에 마음을 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고통과 도전, 그리고 흔히 우리 삶에서 겪는 것을 넘어서는 고통에 마음을 열며, 기꺼이 그 일을 하려고 나아간다. 그 기꺼이 하는 마음은 무엇에서 비롯하는가? 그 중 하나는 분명히 연민(compassion)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 연결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을 느껴보려는 욕구다.
존스 씨 사례로 돌아가 보면, 나는 그가 죽던 밤에 함께 있었다. 나는 당시 비교적 신참 호스피스 자원봉사자였고, 어떤 자원이 있는지, 절차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는 당시 에이즈 환자에게 흔했던 극악한 결핵에 걸려 있었고, 결국 자신의 질병이 초래한 불안정 상태에 빠져, 이를테면 익사했던 것이다. 우리는 병원에 있던 것이 아니라, 에이즈에 걸린 노숙자들을 위한 시설에 있었다. 그의 가족 몇 명이 호스피스 약을 가지러 가겠다고 자원했다. 당시 그 약이 모르핀과 아티반[신경 안정제의 일종]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약을 가지러 갔다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 시간쯤 지나고 나서야 그들이 약을 가지고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환자의 고통과 불안, 그리고 산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약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호스피스나 병원에 전화해서 소란을 피우며 그곳의 누군가가 직접 약을 가져오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몰랐다.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극심한 산소 부족으로 몇 시간 동안 비명을 질렀다. 정말 끔찍한 죽음이었다. 물론 그가 완전히 혼자였다면 더 나빴을 것이고, 아마도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면 더 나빴을 것이다. 그날 밤 우리가 있던 곳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그의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실에 있었고, 환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한 명의 누이뿐이었다. 당시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 누이는 우리와 함께 그의 기저귀를 갈아주었지만, 방에 있는 내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날 밤에 존스 씨의 피부에 맨손으로 닿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그의 귀에 대고 말을 걸었다. 결코 잊지 못할 고통이었다. 내가 알았어야 할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그런 일이 누구에게라도 일어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그는 여전히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으니까. 그 일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죽음의 한 예이며, 나는 직접적인 책임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레지던트들과 학부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 덕분에 나는 10년 넘게 에이즈로 죽어가는 노숙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나를 넘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삶에 깊은 유산을 남겼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 배울 방법을 찾는다. 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예들일 뿐이다. 진실은, 우리가 자신의 가장 취약하고 부서진 부분들과 삶의 조각들을 억지로 밀어내 버리지 않고 그것들에 의해 찢겨지지 않면서 그것들을 부드럽게 다룰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서짐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부서짐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해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머물며 그 고통에 함께 있을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결코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고통과 함께할 것인지를 배우는 일―혹은 아마도 더 가능성이 있는 일은―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 고통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등과 관련해서는 엄청난 범위가 존재한다. 돌파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는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서 비롯된 일련의 기대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를 제한하거나 시야를 좁혔던 것들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가 함께 일하고, 대화하고, 배우는 사람들의 삶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된다. 돌파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또 더 비개인적인 수준에서, 더 활기차고 확장된 마음으로 치유자가 되라는 부름을 들을 수 있다. ...
[굳이 자신이 선택한 길과 자신의 내면의 상처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하라는 이유가 뭘까? 프로이트의 영향? 전이나 역전이의 가능성 때문?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로는 부족해서?]
David Schenck & Scott Neely, Into the Field of Suffering. Finding the Other Side of Burnout, Oxford University Press 202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