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갈과 "번아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경험들이 더 큰 성장을 위한 촉매제가 될 수 있으며 더 큰 능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가 말하는 "돌파"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 단어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는데, 한 번의 돌파만으로 모든 일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더 큰 관점으로의 돌파이며, 새로운 에너지와 영감의 원천으로서의 돌파이다. 더 큰 그림 속에서 더 넓은 범위의 경험, 더 넓은 범위의 고통에 직면할 수 있게 되는 돌파이며, 이를 통해 좌절이나 실망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희망은, 고통이 너무 커서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는 계속할 수 없을 때, 자신을, 자신의 능력 세트를, 자신의 일과 직장을 재검토하게 된다는 점에 존재한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일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고통은 변화의 강력한 동기이며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는 과정이다.
고갈을 번아웃이 아니라 돌파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고통의 범위를 보지 못하면, 가능한 변화의 범위를 상상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를 외면하는 것을 그 자체로 역경, 스트레스,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라 여긴다. 즉,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회피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심지어 그 한가운데서도—예를 들어, 트라우마 병동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례들의 경우처럼―이를 인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때 세부 사항이 중요하다. "나는 지쳤어, 휴가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라.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환자나 동료들과의 수십 가지 상호작용을 설명해 보라. 그것들의 무엇이 그렇게 힘든가? 그리고 지루함에 대해서도 그렇게 살펴보라. 그 감정이 몸에서 어떻게 느껴지는가? 어디에서 느끼는가? 언제 그런 느낌이 드는가? 그것이 정말로 지루함인가, 아니면 탈진인가, 혹은 갇힌 느낌인가?
그리고 환자들—그들이 가장 흔하게 겪는 증상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 귀 감염들이 지긋지긋하다. 쥐에게 물린 상처들이 내게 끔찍하다. 나는 매번 같은 상처들을 본다." 당신의 하루 중 무엇이 가장 좌절감을 주는가? 어떤 사람들은 "부모들이나 학교가 X, Y, Z를 했더라면, 이 아이들이 이런 감염이나 물림,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은 "버몬트에서 일어나는 일은 온통 귀 감염뿐이다. 사람들이 병원에 오는 유일한 이유가 귀 감염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지루하다"거나 "피곤하다"는 말로 끝내선 안 된다.
치유의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변화의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고 그것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과정이 어떤 모습일지 하나의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바는, 고갈과 좌절의 시기에 접어드는 것은 이 발전 과정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이며, 실패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통의 현장에 들어가면, 우리 자신도 환자들 옆에서 역동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우리는 정체된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다. 압박과 요구가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이 과정에 더 의식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그 과정은 더 변형적이고, 힘을 발산하며, 생명을 주는 과정이 될 수 있다. 핵심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현재 시간, 미래 시간, 과거 시간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 모두가 우리가 던져져 있는 상황에서 하나로 합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희망은 언제나 구체적인 것 안에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추상적인 것이 주로 개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적 경험도 추상적일 수 있다. "피곤하다" 또는 "지루하다"라는 말은 추상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의 함정이다. 왜냐하면 그 말만으로는 새로운 전략이 무엇이 될지, 해결책이 무엇인지, 또는 실제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피곤하다"와 "지루하다"라는 간단한 표현은, 실제로는 “나는 갇혀 있다, 근데 그게 마음에 든다”라는 표현에 대한 무미건조한 번역일 때가 많다. 내 경험으로도, 사람들이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격려받고 기회를 얻게 되면, 비록 그 구체적인 설명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울지라도, 거의 언제나 생기가 돈다.
구체적인 것들의 기본적인 나열만으로도 단순한 서술을 압도할 수 있는 잠재력이 그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자신이 가진 환자 집단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가령 다른 종류의 환자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중에는 자신이 지금 돌보고 있는 환자들보다 더 돌보고 싶은 환자도 있을 것이고, 분명히 그렇지 않은 환자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무한히 유연한(plastic)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알지 못하며, 결국 보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의 활력은 구체적인 것 안에 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추상적인 상태로 빠져들면,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회피하게 된다. 일어나는 일의 복잡성(thickness) 안에는 힘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다음 장소로 나아갈 에너지를 제공하는 곳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번아웃의 위험 중 하나가 부정적인 감정의 반복적인 고리에 갇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을 보지 않는다. 그저 "지루하다", "피곤하다"라고 말하고 끝낸다. 그러면 우리는 갇히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없어진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삶을 실제 세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일 자체로도 어느 정도 무감각함을 깨뜨리게 된다. 그것은 아플 가능성이 크다—그리고 이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고갈과 번아웃에서 진정으로 위험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무감각이기 때문이다. 무감각함은 더 이상 어떤 것도—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혹은 무관심이든—느끼지 않으려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돌파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발달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가 도움이 된다—고통과 부정의 반대편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 말이다. 내가 여섯 국면의 유형론을 도입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번아웃을 이겨내는 데 방해가 되는 것 중 하나는 그것이 일종의 막다른 길로 묘사되곤 한다는 점이다. "이 상태에 도달했다면 당신은 실패자다"라는 식 말이다. 하지만 이 변화들이 어느 정도 불가피한 발달 과정의 일부로 보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막다른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덤불 속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두운 숲 속에 있는 것이다. 덩굴에 얽혀 있고, 진흙탕 속에 무릎까지 빠져 있을지라도—적어도 길은 있기 마련이다.
David Schenck & Scott Neely, Into the Field of Suffering. Finding the Other Side of Burnout, Oxford University Press 2023 중에서
세부적인 것에 주목하고 집중하라는 조언은 hic et nunc를 강조하는 여타 치료이론들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해도 될성싶다. 발달적인 관점도 그 자체로 특별히 저자만의 새로운 관점은 아니라 여겨진다. 물론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