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살아 있으되 죽은 자를 위한 부정적 정신분석

Kant 2024. 9. 18. 18:59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서 중요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필립 리프(1987)는 현대 사회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심리학화의 출발점을 자신이 '치료적 전환'이라고 부른 것에서 찾아낸다. 그는 이것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도입과 거기서 파생되어 세계를 정복한 모든 형태의 심리치료와 연관시켰다. 심리학화 현상은 이제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심리치료의 장치들은 그것에 내재하는 긍정적 역동성에 의해 안내되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특성이기도 했다. 심리 산업(psy-industry)은 세계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전문 지식의 한 사례로 자리 잡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자신, 타인,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집단과의 관계를 형성할 때 의존하고 있는 내면화된 지식으로 변했다. 그것에 따르면, 모든 관계는 건강해야 한다. 즉, 정신적 고통이 없어야 한다. 치료적 사회에 내재하는 긍정적 역동성 안에서는 모든 부정적인 것이 ‘장애’ 또는 ‘표준에서 벗어난 상태’라는 용어와 연관된다. 존재의 부정적인 측면은 낙인찍히고 개인에서 소외되며, 정신 전문가들은 이를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치료적 전환 이후, 사회는 모든 사람을 환자로 간주하는 대규모 심리치료사의 사무실이 되었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 즉 정신적 고통이 없는 사람이라는 유령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측정한다. 치료적 세계관은 이상적인 인간의 원형을 정신적으로 고통받지 않는, 즉 외상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한다. 심리치료가 사용하는 장비는 우리가 이 이상적인 상태에 더 다가가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심리 전문가들은 더 이상 고통이 없는 미래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해 간다. 고통은 잊혀졌고, 그것이 마땅히 속할 곳에 있을 것처럼 보인다. 바로 건강이 질병을 정복하고, 생명이 죽음을 이길 곳, 밤이 다시는 드리워지지 않을 세계 말이다.

 

필립 리프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은 종교를 대체하게 되었으며, 많은 측면에서 종교가 수행하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심리적 인간은 심리적 전환으로 인해 새로 나타난 인간 유형이다. 심리적 인간은 주로 자신의 심리적 안녕과 정신적 고통의 회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영혼 구원에 신경 쓰지 않는다. 리프는 말한다. “종교적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태어났으며, 심리적 인간은 기쁘기 위해 태어났다”고(p. 25).

 

한편, 프로이트는 종교를 비판하고 그것을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간주했다. 그는 종교가 유치하고 순진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종교가 그 자신의 설명적이고 규제적인 기능에 위로라는 기능을 혼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종교는 현실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지만, 권위를 내세우고자 위로의 메시지를 보태고 또 설명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종교의 일반적인 형태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이 세상의 수수께끼를 부러울 만큼 완벽하게 설명하는 교리와 약속의 [한] 체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중한 섭리가 그의 삶을 지켜보고 그가 여기서 겪는 어떤 좌절도 미래의 존재에서 보상해줄 것이라고 확신시켜줍니다. 일반인은 이 섭리를 엄청나게 고양된 아버지의 모습 이외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런 존재만이 인간 자녀들의 필요를 이해하고 그들의 기도에 의해 온화해지고 그들의 후회의 표시에 의해 노여움을 삭힐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유치하고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인류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대다수의 인간이 이 삶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합니다.(1930, p. 74)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이 종교에 비해 더 현실적이고 덜 위로하는 세계 이해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저는 제 동료들 앞에서 예언자로서 일어설 용기가 없으며, 그들에게 위로를 제공할 수 없다는 비판에 동의합니다”(1930, p. 145)라고 선언한다. 한편, 초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의도는 종교의 위로적 의도와 크게 일치한다. 정신분석 치료를 포함한 대화 기반 심리치료는 많은 면에서 종교와 유사하다. 종교가 사후 구원을 제공하는데 비해, 심리치료는 영원한 천국의 형태가 아니라, 이생에서의 최적의 지상적 안녕이라는 더 현실적인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역할을 위로에 관한 환상을 깨뜨리는 것으로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라기보다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고통을 줄이거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고통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결과에 관한 약속에서 현실적이며 겸손한 태도를 취하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히스테리 연구》(1895)에서 그는 유리한 결과에 관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만약 우리가 당신의 신경증적 고통을 일반적인 불행으로 변형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p. 159).

 

프로이트의 작업은, 특히 그것이 정신분석의 임상실천에 의해 틀이 짜여진 것임을 고려할 때, 아마도 더 현실적이고 온건하지만 여전히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작업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교회와 의료 기관으로부터 방어하려 했다. 그는 “나는 정신분석을 의사들로부터, 그리고 후자는 사제들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나는 그것을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의사가 될 필요가 없고 사제가 되어서도 안 되는 일반인 영혼 치유 전문가에 넘기고 싶다”고 썼다(1928, pp. 125–126). 정신분석이 종교에서 물려받은 세속화된 목표는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심리치료적 접근을 비판하고 정신분석이 “희석된 절충형 치료 절차”로 축소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정신분석이 오로지 치료적 기능으로 축소되는 것을 정신분석의 배신으로 여겼다. 프로이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에서 물려받은 치료적, 위로적, 구원 지향적 기능은 현대의 치료적 사회를 만들어 냈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치료는 바로 이러한 기능에 관한 비효율성으로 인해 정신분석을 비판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신분석과 그 영향에 두 가지 차원 또는 의도—긍정적이고 부정적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정신분석은 치료적 전환의 원인이자 긍정을 지향하는 심리 산업의 선구자였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의 긍정적인 외면이 지닌 상대적으로 일관된 부분이 되었다. 이 차원 안에서 그것은 치유, 고통 완화, 인간의 삶 개선을 위한 도구 역할에 대한 요구를 충족하도록 재수용되고 현대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분석에는 부정적 의도가 있는데, 이는 내가 보기에는 그것의 내면이 지닌 신성한 차원이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후기 작업에서 어두운 빛을 발하는 그의 사고의 비극적 측면이다이것은 그 자신의 정신분석의 후기 버전처럼 위로받지 못하고 부서진 프로이트다. 전통적으로, 위로하는 프로이트와 실망시키는 프로이트 간의 균열은 1920년에 발생했다고 여겨져 왔다. 그 시점에 그는 "쾌락 원칙 너머(Beyond the Pleasure Principle)"에서 죽음의 본능 개념을 채택했다. 죽음의 본능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정신분석가 자비나 슈필라인으로, 그녀는 1912년의 논문 "존재로 나아가는 원인으로서의 파괴"에서 이 개념을 제시했었다. 그녀의 초기 시도는 프로이트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프로이트는 나중에 이를 받아들이고 슈필라인이 자신의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했다.

 

프로이트의 개인적 비극과 슬픔도 이 시기를 물들였다. 프로이트는 우울증과 불안 발작으로 고통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쾌락 원칙 너머" 작업 시기에 그는 죽음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을 겪기도 했다 (Jones 1972). 그리고 1920년 1월,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자녀 소피를 잃었다. 소피는 스페인 독감 팬데믹 기간에 감염으로 사망했는데,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 너머"를 출판하여 그녀를 금전적으로 지원하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루드비히 빈스방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슬픔이 무한하고 위로받을 수 없는 본성의 것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런 상실을 겪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심각한 애도 상태가 수그러들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결코 위로받지 못하고 그 대체물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 간극을 메우더라도, 또 심지어 완전히 메운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바로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랑을 영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1929, p. 386)

 
 
Julie Reshe, Negative Psychoanalysis for the Living Dead. Philosophical Pessimism and the Death Drive, Palgrave Macmillan 2023 중에서
 
[모든 치료 이론과 작업을 허망하게 만들 수 있는 부정적 정신분석. 정신분석은 참 이래저래 문제아 답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어는 없앴으면 좋겠다. 그나마 Binswanger에게 털어놓은 솔직한 심정에는 공감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