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Kant 2022. 10. 10. 16:51

방 안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사람이 대부분의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은 도움을 주기로 한 사람이며 주로 상대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만 때때로 발언을 하기도 한다. 몇 달에 걸쳐 두 사람은 총 12시간 동안 만난다. 두 사람 사이의 일련의 대화만이 이러한 회기 중에 일어나는 유일한 활동이다. 열두 번째의 만남을 가진 다음, 고통받던 사람은 처음 도우미를 만나러 왔을 때보다 고통을 훨씬 덜 느끼게 되었다고 보고한다.

 

위의 시나리오는 한 세기 이상 동안 정기적으로 발생했던 일이다. 상담이 실제로 사람들을 돕는다는 강력한 경험적 증거가 있다(Wampold, 2001). 실제로 심리치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혜택을 받고 있다는 일관된 보고가 이뤄지고 있다(Seligman, 1995). 그렇다면 상담 시나리오에서 도움 효과를 일으키는 구성 요소는 정확히 무엇일까? 이것은 상담 기간 동안에도 여느 상호 교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내담자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컨대, 인지 재구성 또는 무의식적 갈등에 대한 해석 등과 같이 상담사가 사용하는 전문 기술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내담자의] 상담사와의 관계가 긍정적인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기술은 거의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또 도움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상담사의 개인적 자질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아마도 내담자는 단순히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게 되어 더 나아질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는 상담 시나리오 전체를 공들인 일종의 위약(an elaborate placebo)으로 만들어 버리는 셈이다. 나는 이 같은 목록을 계속 늘려가며 수십 가지 다른 가능성들을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호 작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너무 풍부하고 서로 얽혀 있어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상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을 실험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약품 연구자는 여러 성분들의 화합물이 치료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각 성분을 분리하고 독립적으로 테스트하여 어느 것이 효과를 나타내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담 기술들을 사용하는 상담 관계에서는 그 기술들을 어떻게 실험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있을까? 인간의 상호작용에 기여하는 다양하게 얽힌 요소들이 과연 독립적으로 분리되고 테스트될 수 있을까?

 

효과에 관한 질문에 좀더 철학적인 요소를 추가해보자. 효과적인 도움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정확히 무엇이 좋은 치료 결과를 구성하는 요소일까? 전통적인 정신 분석가라면, 유일하게 좋은 치료 결과란 구조적인 성격 변화라고 주장할 것이다(예: Brenner, 1973). 내담자의 성격이 방어기제, 원시적 대상 관계 패턴 등에 대한 철저한 작업을 통해 바뀌게 되면 증상 완화가 뒤따를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수련 기간 동안 나는 설령 정신분석 치료가 증상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내담자에게 큰 이점을 제공한다고 배웠다. 내담자가 이전에는 무의식적이었던 갈등에 대해 의식적인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무의식적 과정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자신의 삶에 대해 충분한 정보에 입각하여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러한 추론이, 오랜 기간 동안 고객을 만나 생계를 유지하되 책임에 시달리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개업의들에게 혹시 이기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정신분석적 가정에 교육적으로 세뇌되었다. 언젠가 한번은 수련 중에 한 내담자의 상태를 감독관에게 보고했던 일이 있다. 약 10회의 세션을 가졌던 그 내담자는 치료를 찾게 만들었던 자신의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했었다. 이 말을 들은 수련 감독관은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전이 치유”라고 말했다. 나의 감독관은 구조적, 성격적 변화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따라서 치료라고 여겨진 것이 실제로는 내담자의 내적, 심리적 변화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치료의 외적, 관계적 요인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환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내 내담자는 치료가 성공적이었다고 보고했지만, 더 잘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나의 감독관에 따르면 그 사례는 실패였다.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 있는 전통적인 행동주의자들은 문제를 일으키던 행동이 감소한 정도에 관한 엄격하고 정량적인 설명에 의거해 치료의 성공 여부를 판단한다. 내담자가 금연을 원했거나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했거나 화를 자주 내는 경향이 있던 경우, 행동주의자의 치료 성공에 대한 합리적인 정의는 이러한 측정 가능한 문제들이 개선되었는지 여부다. 치료 효과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이 행동주의의 개념화에도 부적절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개의 행동에 관한 불만을 가지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지 않는다. 심리적 문제는 일반적으로 복잡하고 동시에 발생하며 다면적이다. 우울증과 같은 일부 문제는 필연적으로 내적인 고통을 수반하며, 일반적으로 별도의 행위 발산을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느낌은 성가신 행동이 제거되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아마도 심리적인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치료 효과에 기여하는 요인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어떤 효과가 수반하는지를 정의하는 데에 관한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은 도움을 제공하는 전문가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 질문은 내게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중요한 질문이다.

 

 

위의 질문이 지니는 개인적인, 그리고 전문적인 중요성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정신분석적 성향이 강한 심리학 박사 과정을 의도적으로 찾았다. 내가 접한 모든 이론가들 중에서 프로이트의 아이디어가 (단연코) 가장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트 이론 전공 교수들과 함께 6년 동안 정신분석학 연구에 집중할 경우 정신분석학적 아이디어와 임상을 마스터하려는 나의 욕구가 충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러한 선택을 해서 기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내가 무엇에 빠져들게 될 것인지 잘 몰랐다.

내가 이수한 대학원 프로그램이 정신분석 지향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절제된 표현이리라. 사실, 나의 임상 지도 교수들은 다른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비관용적인, 엄격한 프로이트주의자였다. 심리학과는 연구에만 전념하는 비임상 교수진도 고용했지만, 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그들이 담당했던 과정들을 대충 때웠다. 그들은 프로그램 운영을 담당하던 정신 분석 학부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던 지위, 명성 또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내 훈련 프로그램 내에서는 “무엇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대답은 정신 분석적 방법이라는 단 하나의 대답만 존재했다.

 

나는 임상 지도 교수들이 어떻게 학생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인 목조르기를 시도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례 연구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어떤 내담자의 사례를 발표하며 그 내담자에게 비정신분석적 개입을 시도해볼만하다고 천진난만하게 제안했던 몇 번의 사례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과정을 담당했던 모든 정신 분석의 대가들(gurus)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아이디어를 제안한 학생을 미묘하게, 또 때로는 그다지 미묘하지 않게 꾸짖었다. 실제로 한 인지 행동 심리학의 배경을 가진 젊은 교수가 이 사자굴에 들어왔던 때가 기억난다. 사례를 들은 후 그녀는 일부 인지 심리적 전략이 내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을 했다. 이에 대해 정신 분석학 원로 교수는 그녀를 매우 무례하게 대했고 적극적으로 멸시했다. 난 학회 초청을 거절할 줄도 몰랐던 그 젊은 교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그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원에서, 나는 나의 정신 분석학 교수들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진실에 대해 독과점을 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무시하기 어려웠던 한 가지 증거는, 그 대가들이 결코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대학원 첫 2년 동안 나는 각각 다른 교수가 담당했던 두 개의 사례 컨퍼런스 코스에 참석했다. 두 코스가 같은 요일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개설되었다. 학생들은 그 과정 요구 사항의 일부로서 자신들이 대학 진료소에서 본 사례를 발표해야 했다. 동일한 사례가 오전 코스 담당 교수과 오후 담당 교수에게 제시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두 대가들 모두 이론적으로 정신 분석적이었지만 사실상 항상 동일한 사례를 다르게 개념화하고 완전히 다른 치료적 개입을 추천했다.

 

이 무렵부터 내 의식의 주변부에서 흐릿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이 교수들이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과연 무엇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진실을 배울 수 있을까? 진리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다. 그렇다면 그들 중 누가 진실을 알고 있는 걸까? 확실히 그들은 모두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오전 사례 컨퍼런스에서, 발표된 임상 자료를 해석하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 오전 교수의 관점이라는 확신을 갖고 자리를 떴다. 그러다가 오후 교수의 개념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정당화 설명을 듣고 나서는 다시 그가 옳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러한 [모순적인] 증거가 주어졌을 때 어째서 나는 교수들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에 관한 진실을 정말 알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일까? 비록 내가 어렸었고 겁을 먹기도 했었지만, 이 질문을 하기를 꺼렸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실, 내 마음의 사적인 영역에서조차도 나는 그들에게서 진리를 배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가끔 대가들에게 질타를 받는 학생들과 손님들에게 미안하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욕설을 하는 교수들을 내가 개인적으로 자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내 교수들이 나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지혜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내 교육을 훼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을 의문시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일부는 자신을 그 이데올로기적 침략자들과 적극적으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당시 내가 인지 부조화 때문에 명백히 했어야 할 비판적 사고를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 방해 받았다고 생각한다. 인지 부조화 이론은 상충되는 생각이나 신념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주장한다(Festinger, 1957). 예를 들어, 당신은 100달러짜리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따기도 전에 그 와인의 맛이 항상 훌륭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많은 돈을 들이면서 동시에 그 결과에 실망하게 되리라는 마음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에 엄청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했다. 나는 내 모든 미래를 나의 교육에 걸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 교수들이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실제로, 나에게 유일하게 안전하고 편안한 선택은 대가들을 이상화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더라도 그들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중에 내가 훈련을 받았던 시절엔 특히 수련 프로그램들이 특정 방향을 독단적으로 옹호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Fancher, 1995). 특히 정신분석학 연구소들은 이론적인 독단주의로 악명이 높았다(Kirsner, 2000).

 

졸업하고 몇 년 후, 나는 상담학과 교수직을 수락했다. 따뜻하고 개방적이며 수용적인 전문직 상담 문화를 발견했는데, 이는 나의 옛 심리학 프로그램의 군국주의적이고 위계적인 문화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신선한 변화였다. 나는 내 일에 관한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오직 한 가지 문제만이 있었는데, 나의 새 동료들은 정신분석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 그들은 종종 그것을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나의 딜레마를 더 악화시켰던 일은, 인본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한 상담사들이 명백하게 내담자들에게 매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 관찰에 따르면, 그들은 정신분석 임상 전문가들보다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관찰에 대한 설명이 내게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분석과 인본주의는 비록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지만 여러 면에서 이념적으로 상반된다(Hansen, 2000). 이러한 치료 방향들이 내세우는 변화 이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 개입 방법들은 완전히 서로 다르며,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개념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두 방향이 모두 다 효과적일 수 있을까? 한 의사는 항생제를 사용하여 감염을 치료하고 다른 의사는 거머리를 사용한다면, 그 가운데 감염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진실에 더 가까운 방법이 당연히 더 나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관점이 어떻게 모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나는 이와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던 나의 옛 심리학 프로그램 졸업생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방어적으로 정신 분석학적 사고로 되돌아갔는데, 이들은 대안적 방향을 지지하게 된 동료들을 개인적으로 비난했다. 그들이 내담자의 문제에 대해 “반창고 솔루션”만을 제공했다고 말이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인지 행동 접근법은 문제를 은폐할 뿐인 데 반해 정신 분석은 핵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속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고.

 

내가 그와 같은 해결책을 채택하지 못했던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그것은 내 관찰과 일치하지 않았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인본주의적 상담가의 내담자는 반창고 솔루션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도움을 받았다. 둘째, 나는 새 동료들이 좋았다. 마치 내가 상담이 효과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처럼 거창하게 행동하여 그들을 소외시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나 자신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지도 않았다. 아무도 자신의 동료가 거창한 바보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셋째, 나는 대학원에서 충분히 멀어졌기 때문에 정신분석적 아이디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협화음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나의 교수들이 가르쳐준 내용이 다 거짓이라 해도 난 그 학위로 좋아하는 직업을 얻지 않았는가. 나는 행복하게 고용되어 너무 고마웠기 때문에, 내가 과연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진리를 배웠는가 여부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의 불협화음을 기회로 보았다. 대학원 시절에는 견디기 힘들었던 반항적인 생각을 드디어 탐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새로운 전문직을 맡게 되면서 나는 실제로 그것들을 탐구하면서 돈도 벌 수 있었다! 그 시점부터 나는 나의 학문적 경력의 상당 부분을, “무엇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개념적 해답을 얻는 데 쏟아붓기로 결심했다.

 

나는 정신분석적 독단주의에 대한 나의 투쟁을 기록하고 있는 이 심리학적 설명이, 특정한 방향에 묶여 있지만 때때로 자신들의 충성심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수련생들과 전문들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론적인 방향들은 미로와 같아서 그것들 안에서 당신의 방법을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도움을 주는 직업에 종사하는 수련생들은 종종 특정한 이론의 방향에 푹 빠져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문화화 과정뿐만 아니라, 도움 시나리오가 지닌 고유의 모호성, 고급 교육에 필요한 자원의 희생과 헌신, 치료에 종사하는 다양한 방향들이 종종 완전히 양립할 수 없는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이 선호하는 관점을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수많은 설득력 있는 대가들 등은, 남을 돕는 전문직 수련생들이 걸어가야 하는 심리학적 경로를 어렵고 갈등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수련생들이 성숙한 도우미가 되는 과정에서 겪는 심리학적, 이념적 투쟁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투쟁에 대한 해결책은 종종 이론적 독단주의로 귀결되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객관적으로 고려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그러나 도움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제쳐두고 독단적인 유대 관계를 포기하더라도, 무엇이 상담을 효과적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담자가 상담을 받을 때 그들은 취약하며 고통 가운데 있다. 이러한 전문적인 상황에서 상담사는 효과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과정에 대해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 있는 4가지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이 장에서 고려하는 질문은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질문일 것이다.

 

James T. Hansen, “What Makes Counseling Effective?” 중에서

 

[우리는 언제쯤 이 같은 심리치료사 또는 정신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