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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결단을 위한 지침(번역)

Kant 2007. 8. 8. 18:01
 선택을 위한 세 가지 방법들


이냐시오는 우리가 수시로 적용해 볼 수 있는, 선택을 위한 세 가지 방법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그 첫째 방법을 직접적 직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갑작스런 체험 즉, 직접적인 신적 계시 내지 영감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할지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전형적인 예가 다마스커스에서 사울이 겪은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체험을 보통 희귀하고도 기이한 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을 믿어도 될까요? 대체 그러한 체험이 진실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추측건대 그러한 종류의 체험은 사람들이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냐시오에 의하면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러한 경험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경험은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의외의 순간에, 그리고 과분하게.

선택을 위한 두 번째 방법은 자신 안에서 “자극들”을 자각하고 구분하는 일입니다. 자극들은 정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특히 행위 대안들을 놓고 진지하고도 깨어있는 자세로 명상하고 기도할 때 생겨나는 감정들입니다. 이때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우리가 그 정신으로부터 “구별해”내고자 하는 망령(Abergeist)도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선택을 위한 세 번째 방법은 자극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우리가 감정들 속에서 전혀 혹은 거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경우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을 위한 [이른바]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행위 대안들 하나하나를 놓고서 그것들을 지지하거나 거절하게 만드는 근거들을 검토하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때 합리적인 논거들의 총합과 무게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냐시오가 합리적인 인물이었고 지성을 과신했던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세 번째의 합리적인 방법을 일종의 비상수단 정도로 간주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경험은 결단이 대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식의 결합으로 수행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감정상의 자극들 그리고 논리적인 근거들을 검토함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러 선택의 가능성들과 관련해서 자신들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애착이나 거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또한 행위 대안들의 장단점들을 사실대로 검토하는 것입니다. 이 두 차원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충해주며 서로에게 흡수되어 들어가고, 서로를 확증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 비록 우리가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지만 - 적어도 선택의 첫째 방식[즉, 직관의 방법]에 대한 감(感)이라도 보태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결단을 위한 십계명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고려해본 열 가지 주요 지침들을 요약하고 약간의 내용들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결단을 앞두고 있는 사람은 [아래의] 지침들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부분에 강점을 그리고 어떤 부분에 약점을 가지는가를 검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강점은 장려할 수 있을 것이고 약점은 주의를 기울여 파악하여 그것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라. 구체적인 것과 사소한 것에 주의하라.   


모든 결단은 주어진 것에 대한 다가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인정되어야만 하며 평가되어야만 합니다. 현실에 대한 일종의 순종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순종의 첫째 방식이자 가장 중요한 방식일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주 현실보다는 이상 속에서 삽니다. 이상들은 중요하고 또 옳은 것들이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현실과의 긴장감 넘치고 창조적이며 풍요로운 관계 속으로 가져와야만 합니다. 노인들은 자주 그들이 영광스럽게 묘사하거나 저주하는 과거 안에서 삽니다. 여기에서 과거와 현재를 풍요로운 관계 속으로 가져와야 할 필요성이 존재합니다. 두 가지가 모두 훈련을 요구합니다. 모든 상(像)들, 환상들, 꿈들, 감정들과 사상들은 항상 현실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며 현실에 의해 상대화되어야 합니다. 이때 규칙적으로 하루를 되돌아보는 일이 현실을 보다 더 잘, 진솔하고 냉정하게, 겸허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해 진솔하고 참여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현실이 과거에 어떠했던가 혹은 사람들이 그것이 어떠하기를 바라는가뿐만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지요. 또한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성실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더 크고 중요한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줄 알게 됩니다.


(2) 올바른 내면의 시간감각을 키워라. 서두르지도 말고 지연하지도 말라. 외부적인 시간 압박이나 과도한 시간 지연에 현명하게 대처하라. 당신의 결정을 단계별로 나누고 그것을 현실적인 시간 계획에 의해 실시하라.


시간을 올바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고 훌륭한 삶을 위한 위대한 기술에 속하는 일입니다. 영혼은 리듬을 가지고 있고 또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이 리듬을 따르지 않게 되면 결단에 있어서도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게 함정을 판다면 - 시간을 잘못 사용한다든지 다른 일들에 의해 - 그 사람은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하며 유연하고도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결단의 과정에서 시간의 경과는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결단의 이전과 그 한가운데,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만족스러우며 위안을 주는 기본 감정이 지배해야 합니다. 급작스러운 통찰도 좋은 감정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일상 가운데서 오랫동안 위안과 안정을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감격과 같은 지푸라기불은 그것이 금방 좌절감이나 음울한 감정으로 바뀐다면 바람직한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결단의 개별 단계들을 너무 경직되게 정리하고 시간 계획에 [억지로] 짜맞추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3) 당신의 생각들을 당신의 친구들의 비판적인 시선에 노출시켜라. 현명한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라. 당신의 대안들을 현실적인 실험을 통해 검증하라.


이냐시오에 따르면 “악한 영” 자주 교활한 수법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비밀을 간직하도록 유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을 숨기고자 하는 소망 뒤에는 이미 흔히 나쁜 양심이 숨어있습니다. 이에 반해 친구들과 조언자들 앞에서 자신의 의도들을 설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건전한 인간 이성과 현명함 그리고 경험에 [자신이 수용할] 공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특히 그 사람들이 문제의 인물을 알고 있고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면 종종 당사자보다 당사자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더 잘 지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함정들과 많은 오류들을 더 빨리 알아차립니다. 조언자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최소한 하나의 허구적인 관객이나 자신만을 위해서라도 명료하게 표현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미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은 더 나아가 행위 대안들을 실습이나 실험적인 적용을 통하여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얻은 “현실의 반응” 역시 결단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언들 또한 다시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시험들은 단지 제한적으로만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지요. 최고의 조언과 모든 실험을 거쳐서도 불확실성의 찌꺼기는 남습니다. 어쨌든 언젠가는 이른바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필요한 법입니다.


(4) 당신의 머리, 가슴, 직관이 말하는 바에 귀 기울이라. 이러한 “당신의 영혼의 목소리”를 당신의 계획 전체 안에 포함시켜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는 사실적, 기능적, 합리적으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특징을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상 가운데 우리는 우리가 의욕하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 그렇게 기능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성의 지배력이 중요한 결정들에 있어서 다른 힘들을 압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감정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것들을 평가해야 하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특히 불쾌한 감정들이나 원하지 않는 감정들일 경우에 더욱 그래야 합니다. 때로는 이와 반대로 특히 영적인 공동체 안에서는 감정을 과도하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모든 결정이 사태에 적합하고 논증적으로 내려져야 한다는 점 또한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영역에서 자신의 일면성을 인식하고 그때그때 다른 측면들을 고려하고 포용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급작스런 “영적 직관”에 의해 결정을 하는 경우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선물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결정을 하게 되든지 그 결정이 직관의 계기를 통하여 - 이것은 소박하고 온아한 것일 수 있습니다 - 보충되고 확증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커다란 은총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위해 기도할만한 것입니다. 이냐시오의 세 가지 선택 방식들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며 생산적인 방향으로 서로를 촉진합니다.


(5) “악한 영”이 실제보다 자주 결정을 복잡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그는 불안을 동원한다. 신뢰와 단순함을 추구하라.


많은 사람들은 복잡한 결정에 직면하여 수천 가지 사소한 부분들로 인해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들은 그 사소한 부분들을 급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 하고 골머리를 썩히다가 신경쇠약에 지쳐 포기합니다. 우리는 결단에 직면하여 무엇이 - 단순하게 바라보았을 때 - 사태의 핵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결단이 어떠한 - 소수의 - 가치들과 목표들을 “본래” 그리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제 삼는 것인지도 물어야 합니다. 실험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분명하게 정리된 물음들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하는지, 또 정글을 통과하게 해줄 구원의 길을 여는 데 어떤 단순한 수단이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우리의 신경을 괴롭히는 수많은 사소한 부분들을 핵심 주위에 분류해 놓을 수 있으며 그것들에게 적절한 비중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머리는 혼란스러워하지만 가슴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일 수 있습니다. 혹은 가슴은 주저하지만 머리가 분명하게 아는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혼란스런 부분을 단순하게 그러나 단호히 정리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대처할 수 있습니다. 불안의 경우도 이와 유사합니다. 불안이 비합리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굳세게 저항할 수 있으며 신뢰와 용기를 갖고 행동해야 합니다.


(6) 당신이 위기 가운데 있다면 선택하지 말라. 모든 일에서 더 커다란 위안과 결실을 추구하라. 당신이 동경하는 바를 따르라. 급진적이 되어라.


위기 가운데 있고 그래서 “위안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은 일단 가능한대로 상황이 나아질 때를 기다린 다음에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족과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만이 자신의 훌륭한 대안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자유롭고 개방된 자세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결단을 위해 가장 중요한 내용상의 기준들은 더 커다란 위안과 더 커다란 결실입니다. 어떤 대안이 더 많은 내적 평화, 기쁨, 희망, 편안함, 의미를 가져오는가? 어떤 대안이 더 많이 정의로움에, 평화에, 믿음에, 사랑에 기여하는가? 이 두 기준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갑니다. 그것들은 포괄적이며 충분합니다. 이때 동경의 흔적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가슴이 동경하는 바를 감지한다면 그것을 이기적인 충동들로부터 정화시켜 그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확신이 선다면 말입니다. 결단은 항상 어떤 성장, “좀더 [나음]”에 관여합니다. 어느 정도의 급진성 - 문제를 그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열심히 관여하는 것 - 은 대개 선한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적절하게 과장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7) 당신의 한계를 배워라. 그것을 인정하고 주목하라. 십자가를 지려하지 말라. 그러나 하느님이 그것을 원하시면 사랑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하나님의 의지는 외부로부터 어떤 생소한 것으로서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당신 가슴의 동경과 위안 그리고 결실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단점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현명하게 다루는 일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정은 인간적인 그리고 영적인 성숙의 핵심을 차지합니다! 그 과정은 일생 동안 공을 들일 것 그리고 겸손과 분별력과 사랑을 요구합니다. 결단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너무 불안해하거나 너무 용감하게 전진하지 말고 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고난이나 포기나 고통을 추구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들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에 의해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수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적절한 근거들이 존재할 경우에만 우리는 “십자가”를 하느님의 의지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자주 다가옵니다. 이 세상이 부패했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그 부패 상태를 인정하고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을 “내부로부터”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동기들을 정화시키고 우리의 목표들을 놓치지 않는 상태에서 무엇이 명백히 더 나은 길이며, 우리가 무엇을 올바른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또 그렇게 간주하기를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의지로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8) 당신이 선택하지 못한 가능성들과 당신이 놓쳐버린 기회들을 슬퍼하라. 당신의 삶은 내려놓음과 죽음을 향한 길이다. 당신이 삶을 그와 같이 바라본다면 당신은 자신을 덜 구속시키고 더 만족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젊은 이상주의자는 모든 것들을 원하지만, 성인(成人)은 약간의 것들에 대해서만 자신을 구속시킵니다. 하나에 대해서 긍정을 표하는 자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부정을 표해야만 합니다. 그는 이 부정을 의식적으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가슴 안에서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것[내려 놓은 것]을 슬퍼하고 탄식해야만 우리가 선택한 것을 더 자유롭고 감사한 마음으로 긍정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점점 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모든 내려놓음은 곧 작은 죽음이며, 우리가 모든 것을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다시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하는 시기, 즉 궁극적인 죽음을 선취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적은 것들과 더불어 살고 그것들과 깊이 있게 사는 사람은 - 그것을 “내부로부터 감지하고 음미하는”(『영성수련』2) 사람은 - 궁극적인 충만을 예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즉 위안과 기쁨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9)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결단의 규범이요 원형이자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속에서 진실한 인간 존재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확실한 길을 안내하는 척도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 -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설교하신 내용 - 을 통해, 본보적인 행동 - 어떻게 사람들을 자비롭고, 진실되며, 성심껏, 정의롭게, 사랑으로 대하셨는지 - 을 통해, 아주 특별하게는 자신의 인격 - 어떻게 사람들을 감화시키셨으며 감화시키고 계신지 - 을 통해 우리를 도우십니다. 언제나 반복해서 그 분을 바라보고 깊이 이해하며 사랑하는 일(『영성수련』104 참조)은 그 분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 각인시키며 우리를 그 분의 형상에 따라 변화시킵니다. 일상 속에서나 고요한 때에 자주 그리고 깊이 있게 성경을 읽고 생각에 잠기는 일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영위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10) 결단을 하다보면 당신이 끊어버려야만 하는 매듭과 같은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며 그것을 내려놓아야만 하고 뛰어넘어야만 한다. 그때 삶과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근본적인 믿음이 당신을 도울 것이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주인이 된다는 전설이었지요. 그러나 그 매듭이 원체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아무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문제를 알렉산더 대왕에게 가져오자 그는 자신의 칼을 들어 매듭 가운데를 잘라버렸습니다. 복잡하고 세부적인 문제들로 갈피를 못 잡아 결단을 못 내리고 너무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명쾌하고 강경한 절단만이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 그는 그가 도저히 도외시할 수 없으며 불안해하는 손실들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가 사전에 “영들을 구별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적절한 시기를 찾아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면, 해방을 위한 일격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믿음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결정됩니다. 만일 [그때 믿음이] 충분히 자리잡지 못했다면 나중에 공을 들여서 확립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일생 동안 가꾸고 단련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니는 자만이 결단할 수 있습니다. 너무 믿음이 적은 사람은 그것이 여전히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 그리고 훌륭한 결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Stefan Kiechle: Sich entscheiden (결단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