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eous/etc.

피정에 대하여(번역)

Kant 2007. 8. 8. 18:08
 최선의 것

최선의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만일 여러분이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져본다면, 여러분은 이미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는 셈이 됩니다. 또한 여러분은 위대한 “인생의 탐구자”, 귀족이자 기독교인이며 수도회의 창시자, 피정을 위한 책 <영성 훈련>의 저자인 이냐시오 로욜라의 곁으로 다가선 셈이 됩니다. 이 책은 몇 안 되는 책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함, 특히 가톨릭교회의 영적인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삼십년 전부터 피정 참여 기회가 점점 더 초교파적인 방식으로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만). 이냐시오는 파리에 있던 자신의 옛 고해 신부에게 피정이야말로 “제가 이 생에서 생각해내고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피정으로부터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도움과 결실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도울 수 있고 또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훈련법으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찾거나, 충실한 삶, 하느님, 그리고 살아갈만한 인생을 추구할 때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나는 물론 여러분이 지금 곧 이냐시오의 피정 관련 서적을 구입할 것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책은 일차적으로 피정 지도자들을 위해 쓴 책이므로 마치 메뉴판을 읽는다고 허기진 뱃속이 채워질 수 없듯이, 대개는 정신적인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을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책은 여러모로 우리와 가깝기는 하지만 또 동시에 대단히 먼 체험 세계와 언어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 학교 친구 하나가 16살이던 때 제게 이냐시오의 그 책이 항상 식욕을 잃게 만든다고 말한 게 기억나는군요.


스스로 생각해볼 문제들

내가 가장 깊이 갈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게 최상의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 나로 하여금 회의하게 만드는가? 내가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들은? 나로 하여금 가장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게 만드는 것은?


저자 이냐시오와 그의 권위

“저자”라는 말과 “권위”라는 말은 라틴어 “augere”, 즉 “증가하다, 성장시키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성장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피정 서적을 지은 사람의 권위는 그 자신의 경험들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야말로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의 길을 가도록 자연스러운 도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의 삶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그는 바스크족의 한 귀족 가문에서 13번째 아이로 태어나서 가정교육을 받았습니다. 1521년 총탄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 후 “순례자”의 삶을 살며 유럽과 예루살렘을 여행했습니다. “영혼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기 위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534년 파리 몽마르트에서 자신의 주도하에 “주 안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고 1540년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정식으로 설립하였습니다. ......  


침묵으로 하느님께 다가가기

“뭐라구, 일주일 내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구? 난 그렇게는 절대 못해!” - 피정은 침묵하고 대화 없이 지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반드시 어떤 “짜임(Text)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며, 또 늘 온갖 소음으로 청각을 마비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침묵은 영적인 건강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한 젊은 의사에게 다음과 같이 강권했던 것입니다, “침묵하세요 - 치료가 가능하도록 말이지요!” 그는 침묵이 기도의 한 방편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점점 더 경건해지고 내적으로 성숙해지면 질수록 나는 점점 더 말이 필요 없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아주 조용해졌다. 말을 하기는커녕 나는 도리어 듣기만 했던 것이다. ... 그렇다. 기도란 자신이 내뱉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고요해지는 것이며 그 고요함 가운데 머무는 것이고, 기도하는 자가 하느님을 듣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듣게 될까요? 우리는 자주 우리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듣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사유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내려 하지요. 우리의 내적인 자극들과 감각들이 정말 “좋은 정신”으로부터 유래한 것들인지를 분간하기 위해 “영들을 구분”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언어를 당신의 언어를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창조가 곧 그분의 말씀이듯, 모든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사건들도 마찬가지지요. “주님이 현실을 통해 우리를 포옹하신다.”라는 감동적인 표현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침묵하고 듣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현실을 향해 개방시켜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만나고자 하시겠지요.


직접 해보기

침묵에 도움을 주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소음을 내는 것들이 많이 있듯이 침묵을 가능케 해주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예를 들어 봅시다. 매일 짧게 산책하기. 주의 깊게 듣기 (듣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지요). 격렬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느림을 발견하기”. 전화 통화 사이사이에 30초 동안 휴식 취하기. 배우자, 아이들, 친구들과 항상 집중해서 대화하기.

피정 기간에 침묵을 돕는 경험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긴 산책, “묵상 기도”, “멀고도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마주대해 보기, 반복 기도, 스트레칭이나 요가 같은 신체적 운동.

이냐시오가 침묵을 통해 약속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들을 좀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그가 아주 갈망하는 것을 열심히 추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하느님께 “다가가서 함께 생활하는 것” 말입니다.



[Willi Lambert: Das siebenfache Ja (7 가지 긍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