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본 노화

Kant 2022. 8. 22. 18:42

노년은 인간 조건의 급진화로 간주될 수 있다. 삶의 근본적인 관계성은 삶의 이 단계에서 극단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개인적인 관계가 강화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의존성과 외로움에서도 그러하다. 근대성에 관한 지배적인 담론에서 관계성(relationality)은 개인의 독립으로서 이해되는 자율성(autonomy)과 경쟁하거나 기껏해야 그 자율성에 추가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기서 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개별적인 행위 주체성과(individual agency)과 의존성(dependency)을 모두 포함하는, 인간 삶에 대한 응답적인 이해(a responsive understanding of human life)의 관점을 발전시킬 것이다.

발전된 자유주의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노인 담론의 세 가지 => ①political elderly discourse: 노인을 정치적 인간 내지 사회적 동물로 간주하며, “성공적인 노화” 또는 “적극적 노화”를 정책 목표로 설정한다. ②medical aging discourse: 노화의 신체적이고 생의학적 측면에 집중하며, 관계성을 운동성의 감소, 사회적 활동 반경의 축소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 네트워크가 가족 구성원이나 아주 가까운 이웃에로 한정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③existential growing older discourse: 인생 코스의 한 두드러진 국면으로서의 노년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담론은 위의 두 모델과 달리 노년을 3인칭 관점에서, 즉 사회 구조적 관점이나 의료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노화의 경험을 일인칭과 이인칭 관점에서 다룬다. …

 

현상학적 의미에서 “의미”는 인지적-반성적 개념이 아니라, 세상과 나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든 (여전히) 상응하고 있는 원초적인 경험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적 노화의 도전은, 우리의 도덕적 행위 주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이 압박 받게 되는 노년에 이르러, 임박한 무의미함에 직면하여 의미를 정복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노화에 대한 실존적 윤리학은, 한편으로는 연약하고 취약한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던져져 있는 세계사이의 의미 있는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 한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마지막 호흡을 다할 때까지. …

 

Waldenfels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응답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인간의 삶을 산다는 것은 타자의 호소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타자의 타자성(otherness)은 항상 기이하고 알려지지 않은 낯선 무언가를 포함한다(Waldenfels 2006). 이러한 맥락에서 “응답함”은 좁은 언어적 의미가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즉 우리 신체 경험의 모든 기록을 통해 응답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 욕구, 기억과 기대, 공간적 지향성, 다양한 기술적 장치를 포함한 말과 행동으로 응답한다. 게다가 우리는 말로 응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침묵을 지킴으로써도 응답할 수 있다. 속담이 말하듯이 답이 없는 것도 답이다. 우리는 시선과 몸짓으로 응답할 뿐만 아니라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고 행함으로써 응답한다”(Waldenfels 2015, 423).

 

따라서 행위 주체성은 우리 자신 안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시작한다. 그것의 기원은 다른 곳에 있다.[레비나스와 한참 유사!]

 

하지만 그 상호작용에는 알려지지 않은 기이함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갑자기 유방에서 이상한 반점을 발견하거나 이상한 기침을 할 수도 있다. 너무나 익숙한 내 몸에 뜻밖의 타자성이나 이질성, 낯설음(Fremdheit)이 드러나면 나는 그것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모른다. 사용할 수 있는 대본이나 표준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바로 다음 순간에 대응해야 하는 예외적인 상황은 많다. 피난처를 요청하는 난민, 교통 사고, 파트너의 돌연사, 테러 공격 등.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예상치 못한 사건에는 완전히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기이함, 즉 헤테론(a heteron, 다른 것)이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를 인간으로 구별하게 해주는 것은 로고스다. 그것은 상징 수준에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이해하다’의 독일어, 네덜란드어 및 영어 표현인 ‘begreifen’, ‘begrijpen’, ‘to grasp’은 어원학적으로 ‘greifen’, ‘grijpe’, ‘to grab’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로고스는 부분적으로 일종의 파토스(pathein, 즉 ‘견디다’에서 파생된)에서 비롯한다. 무언가가 우리를 압도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놀라움이나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거기에서는 미리 결정된 형이상학적 질서가 대번에 발견되지도 않고, 나중에 구성될 일관성 있고 정돈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은 시간에 내재한다. 우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의 새로움과 기이함(the newness and strangeness)에 반응해야 하는데, 이 낯설음은 심지어 친숙해 보이는 것에도 숨겨져 있다.

응답적 현상학(Responsive phenomenology)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이러저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에 충격을 받으며 또 무엇에 응답하는 것인가?’ 무언가가 나를 놀라게 하고 압도한다. 또 누군가는 요청, 약속 또는 심지어 폭력 행위로 내게 말을 건다.”(Waldenfels 2015, 424) 현상학적 키워드인 “지향성”(intentionality)은 그럼에도 여전히 스스로 창의적으로 의미를 구성하는 그 의미 근원의 주체를 암시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응답성”(responsivity)은 세계가 “사건”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를 세상과 연결하는 “지향적인 실마리”는 항상 낯선 것(das Fremde)에 의해 어느 정도 단절되거나 유보된다. …

 

건강, 친척, 사회적 지위의 상실을 경험하지 않고서 90세가 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노인 대부분은 노년을 의미와 무의미라는 경험이 우선 순위를 놓고 경쟁하는 매우 양면적인 삶의 단계로 인식한다. …

우리가 삶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주어짐(datum)을 선물(donum)로 경험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쨌든 응답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삶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며, 나 말고는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나는 삶의 기이한 부름에 “예”라고 대답하고 그것을 삶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 삶은 타인과 나누어 가질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또 “Es muss ‘mich’ nicht geben”(Rendtorff 1990, 66) -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노년기는 인간 조건의 강화와 급진화로 간주될 수 있다. 노년기에 삶에 “예”"라고 말하고 그것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관련시키는 작업은, 잘 정의된 사회구조적 각본(교육, 경력)이 문화적인 루틴과 기대에 따라 우리의 응답을 유도하는, 삶의 이른 시기의 단계에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은퇴하고 나면 우리는 노인의 “역할이 없는 역할”(Burgess 1960)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의 서사에 새로운 장을 써야만 하는데,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플롯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적으로 70대와 80대를 살아가는 과정은, 죽음이 코 앞의 수평선을 이루고 있는 무인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험일 수 있다. 삶의 전체 과정에 걸쳐 존재하는, 그 삶이 지닌 불안한 기이함이 더욱 뚜렷해지는 시기다.

 

나는 왜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새로운 날의 밝음에 응답하는가? 굳이 살아야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거부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철수할 수 있다. 자살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라는 카뮈의 주장(Le mythe de Sisyphe 1942)은, 우리가 종속하게 되는 상실과 손상에 의해 어두어진 노년기에 더욱 격렬하게 자신을 강요하는 것 같다. 내가 거기에 더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삶이 점점 더 아프게만 하는데, 어째서 여전히 삶을 사랑해야 할까?

T. F. Powys(1875-1953)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무, 바다, 심연이 차례로 말을 거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무는 그들에게 “왜 저 연못으로 들어가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바다: “자, 파도가 깊어질 때까지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걸어가 봐.” 심연: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어? 뛰어내리거나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뭐야?”(Powys, Mulder 2014, 26에서 인용).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닌데도 일부 사람들은 노년기에 용기가 부족할 뿐이다. [그만큼 노년기에는] 죽음의 끌어당김[유혹]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

 

누군가는 노년의 삶의 부름에 여전히 기쁘게 “예”라고 말하는데 비해, 다른 사람들은 의미 투쟁을 계속하라는 요구에 “난 그러고 싶지 않아”라고 대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같은 물음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침은 없다. 삶의 부름에 대한 응답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시간 간격, 즉 부름과 응답을 구분하는 사이(an inbetween)에서 발생한다. 죽음의 매혹적인 힘은 ‘내가 거기에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놀라움과 균형을 이룰 수도 있다.

여기서 나는 폴 리쾨르(1913-2005)의 증언을 인용해 보겠다. 2003년 무더운 여름, 파리의 노년층이 무더위로 사망하던 때, 90세의 리쾨르는 갑작스러운 혈압 상승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다. 그는 책을 읽고 균형을 유지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우울해졌고 글쓰기도 포기해야 했다. 폐부종이 그의 상태를 악화시켰다. 나이가 그의 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그를 간병하던 친구 캐서린 골든스타인(Catherine Goldenstein)이 기록하고 있다. 리쾨르는 자신이 “자각적 우울증”이라고 불렀던 증세에도 불구하고 독서, 뉴스 따라잡기, 친구 맞이하기, 음악 듣기 등을 통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아서 존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철학자는 연약하지만 강인한 마음으로 그의 90번째 생일을 자축하면서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한 단순한 행복이 존재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삶에 대한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이렇게 내개 삶이 주어진 한에서 말이죠. 삶이란 처음 받아보는 선물, 그러니까 취임 선물 같은 거 아닐까요?” (Ricœur 2009, 94)

 

삶의 부름은 심각하게 양면적인 호소다. 대문자 L로 쓰여진 삶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항복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끊임없이 재확인되어야 하는 선택과 결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삶에 대한 추진력과 욕구는, 스피노자(Spinoza)가 존재에의 코나투스(connatus essendi)라고 부른, [베르그손의] 신비한 생명력(élan vital)에 의해 추진되는 것으로서, 그 호소가 들리고 확인되는 한도까지만 존재한다. 삶에 “예”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삶은 그것이 다음 장이든 에필로그든 계속해서 자신의 전기를 쓰고자 하는 개인적인 의지에 의해 응답되어야 하는 부름이다(Freeman 2011).

식물, 동물,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 분명 삶은 죽음과의 본능적인 싸움과 같다. 그 경우 삶은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인이 삶을 계속 살고자 한다면, 살고 생존하기를 원해야 한다. 당신은 “아니, 아직은 아니야. 나는 아직 삶을 중단하기를 원치 않아”라고 대답함으로써 결국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초대를 가능한 한 무시함으로써 삶의 부름에 응답한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삶의 무상함을 긍정하는 것은 믿음의 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90세의 나이에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하루를 맞이하는 것은 폴 리쾨르가 그랬던 것처럼 매일의 고백이자 종교적 의식인 것이다. ...

 

노화에 따른 삶의 어려움을 가장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우리 신체 안에서 그리고 신체를 통해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예측할 수 없고 고통스러워지는 우리 신체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상학은 신체(body)를 3인칭 대상인 육체(Körper)와 체화되는 1인칭 경험인 몸(Leib)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신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낯설게 보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이 1인칭 경험이다. 우리의 신체는 분열된 자아와 마주한다. [예를 들면] 녹음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영화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볼 때마다, 거울 속 우리 자신을 볼 때마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저게 나야? …

 

따라서 현상학적 전통은 우리가 동시에 몸과 육체, 즉 Leibkörper라고 올바르게 말한다. 이 내적인 극성(inner polarity)은 내가 내 신체에 익숙하면서도 그것의/나의(!) 경험에서 소외되는 이유다. 나는 내 신체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또 그것을 적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손을 인식하지 못하고 돌처럼 탁자 위에 떨어뜨리는 환자의 이인화(depersonalization)와 같이 병리학적인 경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병리학[적 상태]은 우리의 “정상적인”, 분열된 자아의 극단적인 경계적 사례다(Waldenfels 2006, 83).

우리 자신과 신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양가성은 노년기에 인간 조건의 급진화를 통해 강렬하게 경험된다. 고령화에 따른 피로감이 그 적절한 예다. Paul Valéry는 이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의 노트(Cahiers)에서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신체’는 피로를 통해 낯선 것이 된다.”(“Par la fatigue le ‘corps’ devient chose étrangère” - Waldenfels, 2006, 77에서 인용). 늙어가는 우리의 신체는 우리가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외계인, 기이한 타자가 된다. 생면부지, 심지어 적으로 변해 가는 신체와 어떻게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삶은 계속해서 내 몸을 사랑하거나 다시 친구가 되라고 내게 요구한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옵션은 무엇일까? …

 
 

Frits de Lange, “Responsive Aging. An Existential View”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