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공동체 내지 시민 사회가 자연 상태와 다른 점은 -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시민 사회 사상가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이견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 그 공동체에 관한 모든 사안이 공적인 효력을 갖는 규칙과 그 절차에 의해 결정되고 이행된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만드는 권한과 그 규칙에 의해 구성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재단하는 판결 권한, 그리고 그 결과를 포함하여 규칙이 허용하고 부과하는 모든 공적 과제를 집행하는 집행권이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상호 견제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건 의무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면 다 아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오작동 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권력의 분산이란 권력층(입법, 사법, 행정)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만 존재할 뿐, 정작 권력자들 내부에서는 견제나 감시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권력 거래 내지 상대의 무리한 권력 남용에 대한 눈감아주기가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입법과 행정의 분리는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입법부든 행정부든 사법부든 ‘그 나물에 그 밥’ 같아 보인다. 이는 법안의 발의와 통과, 국정 감시 활동의 양상, 전관예우 등만 봐도 금방 확인된다.
물론 권력의 소재는 투표라는 절차를 거쳐서 결정되고 그 기한 또한 한정되어 있다. 우리 사회가 현재 민주화의 몸살을 앓고 있는 몇몇 국가들과 그래도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 규칙만큼은 그런대로 잘 지켜지고 있다는 점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일단 권력을 부여받은 자들이 자신들이 일한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그 권력을 불필요한 방식으로 사용할 일을 만든다는 데에 있다. 무슨 일이든 크게 한판 벌여야만 자신한테 주어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라는 발상은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산은 물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물론, 구성들 사이의 갈등만 첨예해지기 일쑤니 말이다.
교과부의 대학 간 통합 유도 정책도 그 중 하나이다. 한편으로는 전문대학을 지속적으로 일반대로 전환하거나 승격시키고 또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여전히 인가해주면서도 동시에 학생 수의 감소를 명목으로 대학들이 통합으로 나아가도록 압박을 가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지.
그러나 정작 더 실망스러운 일은 그렇게 모순적인 정책을 그대로 아니 알아서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대학 사회의 수준이다. 여기에는 권력 분산은커녕 오히려 집중으로만 나아가는 대학의 리더십도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대학 자신과 그 구성원에게 악재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리더십 하의 대학의 지위는 교과부의 말단 행정기관에 불과하겠으니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그동안 대학의 정책 결정이 얼마나 정치논리에 취약했는가는 의학전문대학원이나 학부제 실시 등 우리 대학의 역대 리더들이 구성원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추진했던 일들 몇 가지만 떠올려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엊그제부터 국공립대학의 단과대학 학장까지 총장이 임명하기 시작했으니 아마 머지않아 학무회의 구성원은 100% 총장 임명직으로 채워질 것이다. 교수회마저 공식적인 견제기구 역할을 보장받지 못한 우리 대학 같은 대학은 이제 명실상부 교과부의 수족(셔틀!) 노릇만 하게 생겼다. 교과부 말단 행정 기관의 말단 서기직 교수 시대가 열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