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믹한 세계 속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주장을 3인칭으로 표현하는 습관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습성이 존재한다. 어떠한 주장이든지 그 주장이 참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주장이 자기 자신만의, 그러니까 주장자의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를 지닌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 특히 자연과학에서는 객관성의 확보야 말로 알파요 오메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약간의 주의력만 있는 독자라면 지금 이 글을 PC 자판으로 두드리고 있는 나 역시 익명의 주체 뒤에 “나”라는 주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의 말버릇이 보이는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 익명의 주체를 언제나 복수, 즉 “국민”으로 대체한다는 점일 것이다. ‘‘국민이 사법개혁을 원하니까 ...’, ‘국민이 경제 활성화를 정부의 최대 과제로 간주하니까 ...’, 반값 등록금은 국민의 뜻이니까 ...’, 등등.
어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먼저 그 주장의 객관성을 확보하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개인의 행동이나 사회 차원의 행동, 공공정책의 수립이나 그 실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가능한 한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 때 탄력을 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객관성의 확보 절차에 있다. 어떤 주장이든 그 주장의 참에 대한 최초의 책임 소재는 그 주장을 제시한 당사자에게 있기 마련이다. 본인의 판단과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주장은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진대, 자기도 믿지 못하는 주장을 남에게 믿으라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기 확신이 서면 그 다음 단계는 아마도 그 주장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에게 평가를 받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굳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안이라면 곧바로 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물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장이나 정책의 수용여부가 가져올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되면 될수록 그러한 객관성에 대한 검증 절차는 요식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입안과 채택이 일단락된 공공 정책조차 객관성 확보 절차를 걸고넘어지며 막무가내로 반대시위를 하거나 하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거나 원안이 수정되기가 일쑤다. 이제 이런 일들은 너무나 흔한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비용이 낭비된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러한 사회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늘 심각한 스트레스가 따른다.
해결책?
서구의 ‘개인주의’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핵심은 자기 책임성이다. 나는 내 생각과 행동의 주체로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너 또한 네 생각과 행동뿐 아니라 내 생각과 행동에 대한 책임 있는 평가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너를 얼버무리고 애매모호한 ‘그’ 또는 ‘그들[국민]’ 뒤에 숨어 눈치나 보며 객관성을 능욕하는 일이 사라져야 한다. “본인이 다 안고 가겠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정치가나 polifessor의 애매한 수사 대신, “내 생각은 이렇고 내 행동이 이러 했으니 여기까지가 내 책임이라고 본다”라는 명쾌한 진술이 듣고 싶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삶을, 너는 너의 삶을 사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삶과 역사를 사는 것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