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숭고의 개념 설명
1. “어떤 것이 크다”고 할 때 ‘크다’는 개념 자체는 지성 개념도 아니고 감성적 직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성 개념도 아니다.
1.1 그 경우 ‘크다’는 판단력이 “주관적 합목적성”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
1.2 칸트는 여기서 ‘형식적 합목적성’ 또는 ‘형식의 합목적성’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어떤 것의 ‘무엇임’과 그 ‘무엇의 크기’에 대한 관계를 판정할 때 주관적 합목적성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Ex) “저 아이의 얼굴은 크다”고 할 때, 이는 ‘사람(아이)의 얼굴로서 크다’를 뜻할 것인데, 사람 얼굴임과 크기의 관계에 대한 객관적 규정에 따라서 그렇게 판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판단자 주관의 인식 능력들에 대한 어떤 합목적적인 관계[“그저 주관적으로 크기에 대해 반성하는 판단의 기초에 놓여있는 척도”ein bloß subjektiv dem über Größe reflektierenden Urteile zum Grunde liegender Maßstab; a merely subjective standard grounding the reflecting judgment on magnitude]가 고려되고 있다는 뜻. 그래서 이 판단에 대한 보편적 동의를 요구할 수 있다고 한다.
2. 크기에 대한 판단에서 반성적 판단력의 기초에 놓여 있는 주관적 척도(Maßstab)는 경험적으로나 아프리오리하게 주어진다.
2.1 경험적 척도: 대상의 평균적 크기를 일컬을 경우 (인간이나 특정 종류의 동물의 평균 크기, 나무들, 가옥들, 산들 등의 평균적 크기)
2.2 아프리오리한 척도: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주관의 결함 때문에 그 구체적인 현시가 주관적 조건에 제한되어 있는 척도 (어떤 ‘덕’의 크기, 한 국가에서의 ‘자유’나 ‘정의’의 크기, 측정의 정확성이나 ‘오차’의 크기 → 이념적인 척도로서 이성에 의해 충분히 사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
3. 크기의 경우, 그 대상(객체)의 형식적 요소와 무관하게, 다시 말해 몰형식적인 대상의 경우도 그 크기로 말미암아 만족감이 일어날 수 있다.
3.1 이 같은 점에서 크기에 대한 만족은, 반성적 판단력이 인식일반에 대한 관계에서 자신이 합목적적으로 조화(gestimmt)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미의 경우에서처럼 객체에 관한 만족이 아니라, 상상력 자기 자신의 확장에 관한 만족이다 → 고로 숭고의 감정은 미의 감정보다 더 주관적이다!
4. “단적으로(절대적으로, 모든 점에서,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 크다”고 할 때, 그 척도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므로 그 자신 안에서만 찾아져야 한다.[스피노자의 “신”과 유사한 의미?]
4.1 일체의 비교가 무의미하므로 이런 의미에서 숭고는 자연 사물에서 찾을 수 있다기보다는—왜냐하면 제 아무리 큰 자연 사물도 그 비교 대상에 따라서 무한히 작은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작은 사물도 마찬가지고)—우리의 이념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4.11 고로 감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숭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숭고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4.2 이념이란 절대적 총체성에 대한 요구가 개념화된 것이다.
Ex) 무한대, 무한소, 순수 진공 … → 감성으로 주어지는 어떠한 표상도 여기에 일치할 수 없다. 이 말은 아무리 상상력이 엄청난 크기의 감성적 표상을 포착해 제시하려 해도 그 이념에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4.3 감성계의 사물의 크기를 파악하는 능력인 상상력이 이념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그 자체가 우리 내부의 또 다른 능력, 즉 감성을 초월하는 초감성적 능력의 존재를 환기시켜 준다.
4.31 그러므로 숭고의 대상, 즉 단적으로 큰 것은 감성적 대상(객체)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 인해 야기된 정신 상태 또는 이념의 능력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 26 숭고의 이념에 필요한 자연사물의 크기에 대한 평가
1. 칸트는 크기의 평가, 즉 어떤 사물이 얼마나 큰가를 판정할 때 척도(수 개념)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1.1 그러나 척도로서의 수 개념, 수 단위(1cm, 1m, 1km, 1kg … )는 비교(상대)적인 척도이므로 그것들 중 어떤 것도 기본적인 또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간주될 수 없다.
1.2 고로 주어진 크기에 대해서는 “규정된 어떠한 개념(keinen bestimmten Begriff)도 가질 수 없다”.
1.3 “기본척도(Grundmaß)의 크기에 대한 평가”: 기본척도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하지만, 일단 크기 판정이 실제로 이뤄질 때 전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이뤄질 수는 없다고 보고, 그러한 크기 판단의 일반 기준을 염두에 둔 표현 같아 보인다.
1.31 기본척도의 크기에 대한 평가는 단지 상상력이 크기를 직접 포착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에 불과하다, 즉 상상력이 수 단위의 도움을 받아 그 직관의 크기를 현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선(先)개념적인 판단(?) 작용의 산물이다.
1.32 고로 자연의 대상들의 크기에 대한 평가는 모두 “감성적”(ästhetisch)이다. 즉 [상상력에 의해] 주관적으로 규정된 것이지 객관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2. 수 단위(척도)는 무한히 진행하기 때문에 수학적인 크기 평가에서 “최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2.1 그러나 감성적 크기 평가에서는 그러한 최대에 대한 이념을 상정할 수 있는 바, 그것보다 더 큰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판정할 수 있는 크기의 최고치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 → 절대적 크기에 관한 주관의 이념이 그것인데, 칸트는 이것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 감동의 상태와 결부된다고 주장한다.
3. 칸트는 최대의 크기 평가 시 상상력이 처하게 되는 상태를 ‘포착’과 ‘총괄’로 설명한다. [앞이서 이미 설명했던 내용]
• 포착(apprehensio): 서로 다른 직관 a, b, c가 주어질 때 이것들을 모두 한꺼번에(동시에) 의식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것이 포착 또는 ‘각지(覺知)’. Ex) 붉음, 향기, 신맛 등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 KrV 초판(A 98)에서는 이것을 “직관에서의 각지의 종합”(Synthesis der Apprehension in der Anschauung; synthesis of apprehension in intuition)이라 하여 직관 차원, 즉 감성 능력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언급했다.
• 총괄(comprehensio aesthetica): KrV 초판(A 100)에서 “상상에서 재생의 종합”(S. der Reproduktion in der Einbildung; S. of reproduction in imagination)이라 불렀던 것과 유사함. 상상력의 본래 역할로서 간주되었던 것. 즉 b를 의식할 때 a를 잊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이 총괄의 능력. 포착이 진행되면 최초에 지각되었던 직관 표상이 상상력 안에서 점차 소멸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상상력이 자신의 총괄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 숭고의 감정과에 관계.
3.1 Kritik der Urteilskraft에서는 이 양자를 마치 서로 교환해서 언급하고 있는 듯함. 즉 총괄이 오히려 동시적인 직관을, 그리고 포착이 계기적인 직관을 의미하는 것처럼 설명함. 물론 이 양자는 본래 분리 불가능한 작용일 것.
4. 미적 판단의 대상으로서의 숭고의 대상은, 그것이 자연의 대상이든 인공의 대상이든 모두 개념에 의해 그 목적이나 본성이 규정되어 있는 대상이 아니라, 천연 그대로의 자연이며, 인공적 대상이라 할지라도 아무 개념도 전제하지 않고 판정되어야 한다.
4.1 또한 아무런 감관 자극이나 감동과도 무관하게 판정되어야 한다.
4.2 개념을 전제로 한 엄청난 크기는 “Ungeheuer”(monstrous)라고 표현한다, 즉 크기가 개념을 구성하는 목적을 파기하는 [반목적적으로 큰] 경우의 크기. Ex) 손 크기가 보통 사람 손 크기의 서너배일 경우, 가마솥만한 밥그릇.
4.21 개념의 현시 자체가 지나치게 커서 그 현시가 성취하려는 목적이 달성되기 어려울 경우의 크기는 “Kolossalisch”(colossal)하다. Ex) 독재자의 동상?
5. B 90 이하(=V 253 이하)에서 칸트는 숭고의 판단 시 작용하는 주관적 합목적성은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원래 “성질”의 계기에서 다뤄야 할 것으로 보임.
5.1 그 합목적성은 형식의 합목적성이 아니고, 수 개념, 즉 척도에 의한 크기 평가(규정)에 관한 것도 아니다.
5.11 지성이 수 개념을 통해서 상상력을 이끌(leiten, guide) 경우, 논리적인 크기 측정에 해당하며, 모든 측정이 그러하듯이 [객관화 과정이 이뤄지는 것이므로] 객관적으로 합목적적인 무엇이 있다고 할 수는 있으나 미적 판단력에 대해 합목적적이며 만족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5.12 그렇게 수 개념으로 주어진 것에 부합하는 직관 표상은 상상력이 총괄하여 제시하기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어떠한 수 개념일지라도 그 수 개념을 산출하는 규칙성이 발견되기만 하면 상상력이 그것에 상응하는 직관을 제시하는 데 곤란을 겪지 않는다는 것]
5.12 수 개념에 의해 평가된 크기는 주관적 합목적성의 근거가 아니다.
5.2 그러한 합목적성의 근거는 숭고의 대상이 오히려 일체의 개념적 평가를 초월하는 크기에 대한 (무한한 것에 대한) 사유를 촉구한다는 데에서 성립한다.
5.21 그런 크기는 직관으로 총괄되어 주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이성은 그러한 직관 불가능성 내지 현시 불가능성에 구애받지 않고 그것에 대한 개념(이념)을 제시하고 사유하고자 한다.
5.22 감성이나 상상력, 지성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도 없고 평가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이성은 그러한 무한한 크기를 자신의 개념 안에 완전히 포섭하여 사유할 수 있다 → 이는 인식능력 차원의 한계가 실천적 능력 또는 실천 차원[in anderer (der praktischen) Absicht; from another (practical) point of view]에서는 초월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다.
6. 숭고의 대상, 즉 단적으로 큰 것은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서 큰 것이므로 이것의 척도는 자기 자신 이외의, 즉 다른 곳에서 주어질 수 없는데, 이는 자기 모순적 개념이다.
6.1 그것은 무한한 크기의 총체성을 뜻하며, 이는 인식의 끝없는 진행과 동시에 그것의 완결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로 감성적 현상계의 차원이나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것,
6.11 그러나 이성은 그러한 개념을 필수적인 것으로서 요구(청)하고 있다.
6.12 “초감성적 기체”(ein übersinnliches Substrat; a supersensible substratum): 우리의 이성은 자연에 대해서든 우리의 사유능력에 대해서든 이러한 것을 고려하게 만든다. 즉 이는 감성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세계, 그러나 이성이 바로 그러한 인식의 완결을 위해, 즉 인식의 궁극적 전체를 확립하고자 할 때 상정하게 되는 세계다.
6.13 자기 자신의 내부의 초감성적 기체(이념으로서)를 돌아본다는 것은 상상력과 이성의 충돌에서 이성이 주도권을 갖게 됨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 → 도덕적, 실천적 행위에서와 같이 감성의 좌절과 이성의 자부심 내지 긍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고로 불쾌의 감정 뒤에 쾌의 감정(동)이 일어나게 됨.
[칸트는 미의 영역을 인식이나 실천의 영역으로부터 독립시켜 다루면서도 지속적으로 미나 숭고의 감정을 야기시키는 마음의 상태와 도덕적 행위를 수행할 때의 마음의 상태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나중에는 아예 미를 “도덕성의 상징”으로까지 간주한다.]
※ 칸트가 숭고 개념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숭고의 감정이란 감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이성적(초감성적•예지적) 존재자인 인간이 엄청남 크기나 위력(힘)의 경험에 직면하여, 그러한 감성적 존재자로서의 유한성에 절망하지만 곧 그 좌절을 초감성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돌아보고 (자각함으로서) 극복할 때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