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Teil) 미적 판단력의 비판 / 제2편(Abschnitt) 미적 판단력의 분석 / 제2장(Buch) 숭고의 분석론>
1. 칸트는 취미판단의 대상으로서 미와 미의 대상뿐 아니라 숭고와 그 대상도 다룬다.
1.1 전통적으로 미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다양했는데, 이는 미를 일종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고 그 존재 양식을 구분하여 고찰한 데서 유래한다.
1.11 그 존재 양식은 “ästhetische Kategorien”, “ästhetische Grundgestalten”, “Modifikationen des Schönen” 등으로 표현된다.
1.2 서양의 미이론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미적 범주들이 자주 거론되었다: “우아미•순수미”(the grace, die Anmut / the beautiful, das Schöne), “숭고미”(the sublime, das Erhabene), “비장미”(the tragic, das Tragische), 골계미(滑稽美, the comic, das Komische), “추”(醜, the ugly, das Hässliche)
1.3 칸트가 취미판단을 분석하면서 미와 더불어 숭고를 다룬 것은 아마도 동시대 미학, 특히 숭고 개념을 자주 거론하던 영국 경험론 미학의 영향일 것. 물론 이 개념의 뿌리는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 숭고란 무엇인가? 달을 걷는 인간의 모습이나 히말라야 고봉을 오르는 산악인의 모습을 안방이나 거실에서 새우깡 먹으며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현대에 숭고미는 거의 시대착오적인 미적 범주 아닌가?
2.1 어쩌면 Walter Bejamin이 말했던 “Aura”(Unnahbarkeit, Echtheit, Einmaligkeit)의 상실이나 파괴와도 관련되는 개념 아니겠는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모든 대상이나 사건이 그 고유의 분위기를 잃고 복제품이나 이벤트—졸업식장이나 예식장에 가보라!—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는 신비한 체험은 고사하고 진지한 감동조차 가벼운 자극이나 흥밋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3. 그럼에도 현대철학자들이 칸트의 숭고미를 다시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3.1 포스트모던 계통의 프랑스 철학자 J.–F. Lyotard(1924-98), J. Derrida(1930-2004) 등이 대표적.
Lyotard는 칸트의 숭고 개념에서 현실(사태, 실재)과 그것에 대한 개념 내지 그것의 범주화 사이의 차이가 잘 나타나 있다고 보았다. 칸트의 숭고는 지성이 그 숭고의 대상을 규정할 수 없는데, 이는 상상력이 그 대상의 크기(Alps)나 위력(tornado)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것이 절대적이거나 무제한적인 크기나 위력을 지닌 대상으로서 상상력이 그것을 현시할 수 없다고 했다. 즉, 그것을 포착하고 총괄하여 재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관은 좌절감을 맛보게 되고, 그럼에도 그러한 현시 불가능성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오히려 이념(어떠한 크기나 위력의 표상도 그것에 적합하지 못한 이성개념)의 존재를 환기시켜주는 데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숭고의 감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숭고가 가지는 비규정성, 현시 불가능성은 Lyotard가 보기에 현대의 아방가르드 예술이 의도하는 것과 일치한다. 즉,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시함으로써 복합적인 (묘해서 설명 불가능한) 감정을 야기하려는 의도.
Lyotard는 숭고의 이 같은 특성이 그의 소위 “분쟁”(쟁의, diffrend)의 철학이 지적하려는 것과 유사하다고 여긴다. 분쟁의 철학은 전통 철학이 다루고자 한 사물[태]의 궁극적인 본질이나 원리 같은 것이 그 자체로는 표상되거나 재현될 수조차 없다고 주장한다. Lyotard는 그러한 것들을 다루려 했던 이론들을 “거대담론”(grands récits narratifs)이라 칭하고 거부한다. 예컨대 종교나 인류 해방, 자본주의, 사회주의, 기술 등에 관한 일반적인 주제들을 어떤 하나의 통일적인 이론으로 다루려는 시도들을 말한다. 기독교라면 기독교적인 담론과 그 규칙이, 자본주의면 자본주의적인 담론과 그 규칙이, 심지어 과학기술적 담론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들이 무제한적인 보편성을 주장하는 시대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흔히 과학기술적 관점에서 설명 가능한 것만이 납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과학기술적 담론 자체 내에서도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사건들이나 사태들, 사물들의 독특한 성질은 서로 상대의 성질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차이는 “incommensurabilité”라 표현할 수도 있는데, Lyotard는 그러한 차이를 말해주는 작은 담론들(petits récits)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고로 철학자는 거대 담론 속에 부당하게 갇혀 있는 모순적 요소들을 드러내 주고 까발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그는 이 같은 작업의 선구자를 특이하게도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에서 찾았다.
Lyotard의 입장은 보편적 진리를 편집적으로 추구하는 성향을 보였던 근대 로고스 중심 철학의 폭력과 폐해를 지적하고 벗어나자는 것(나름 건전한 면이 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단초가 숭고론에서 발견된다는 것.
Derrida도 Lyotard와 유사하게 숭고한 대상의 몰형식성이라든가 비규정성이라는 특징은 언어로 표현하려는 대상의 한정[제한]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차연”(différance) 개념이 의미하는 바와 통한다고 보았다. 그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착안한 생각에 따르면, 한 기호의 고유 가치란 무한한 차이 운동을 계속하기 때문에 의미의 확정이 연기될 수밖에 없다(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계속 미루어진다)고 한다. 이것 역시 로고스 중심적인 본질주의 철학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Derrida와 Lyotard는 숭고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을 로고스에 의해 규정하고 고착화하며 그렇게 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소유하고 처분하려는 근대적 의식 주관, 곧 근대성의 좌절을 잘 드러내 준다고 본 것이다 → 이는 물론 사실상 매우 의심스러운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