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영역에서도 성별(gender)의 문제는 지난 수십 년간 점점 더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현대의 상담 종사자들 가운데 성별이 상담 과정이나 결과에 “실제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성별을 반영하는 철학상담의 필요성에 주목한 피터 라베의 글 「여성처럼 말하기/남성처럼 경청하기」를 중심으로 철학상담 분야의 내담자-상담사 관계에서 성별이 내포하는 문제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논의의 순서와 그 대체적인 내용은 라베의 글에 따르되 필요한 경우 다른 저자들의 논거나 예시를 보충하고자 한다. 이 글의 의도는 철학상담이 성별 편견을 어떻게 피할 것이냐의 물음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담 과정에서 성별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철학상담 회기에서 이루어지는 상담사와 내담자의 만남을 어떻게 풍요롭고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고민에 두어져 있다.
1. 들어가기
1980년대부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한 여성주의철학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둔 여성주의상담은 남성적 가치와는 다른, 이른바 여성의 ‘목소리’를 강조하면서 남성편향적인 전통적 상담이론의 한계에 대한 이해와 반성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상담 관계에서 상담사의 다수를 차지하던 남성들이, 내담자의 대부분이었던 여성들에게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성역할에 적응할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성장을 돕기보다 오히려 방해 내지 억제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입장은 기존의 상담이론 문헌들의 대다수가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여성의 경험 현실과 구체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철학과 상담의 시각은 최근 들어 국내 철학상담 담론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홍경자는 여성주의상담을 철학상담에 도입하고자 시도하면서, “남성중심적 이성이 토대가 되는 철학상담의 방법론”에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고 이해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거나 혹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성 대신에 감정 중심의 몸철학에 기초하는 철학상담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한다. 한편 노성숙은 “철학상담과 여성주의상담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한국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고자 하는데, 그녀는 홍경자와는 달리 이 양자 사이의 “근원적이고도 원칙적인 공통점을 확인”하고 소개하는 데 비중을 둠으로써 그것들의 발전적인 공생 가능성을 희망하고 예상한다. 김선희 역시 철학상담의 방법과 여성주의의 접점을 모색하면서 그것이 여성 내담자가 자아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자유로운 판단”이나 “자발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격려하는 역할, 그리고 “여성 정체성의 정치적 특성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데”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젠더(gender, 이하 ‘성별’)를 반영하는 철학상담의 필요성에 주목한 피터 라베의 글 “여성처럼 말하기/남성처럼 경청하기”를 중심으로 철학상담에서 성별이 가지는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논의의 순서와 그 대체적인 내용은 라베의 글에 따르되 필요한 경우 다른 저자들의 논거나 예시를 보충하게 될 것이다. 철학상담사가 성공적인 상담을 위해 배려해야 할 남녀의 성별 특성은 모든 상담의 기본이 되는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기초 지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상담에서는 아직 합당한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한편에서는 철학상담이 여성주의의 관점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주의와 철학상담 사이에서 “근원적이고도 원칙적인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는 현실도, 성별과 철학상담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우리의 반성적 숙고의 필요성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베는 오늘날 철학상담 문헌의 대부분이 성별 편견의 위험을 의식하여 내담자를 “he or she”라든가 “he/she” 또는 “s/he”로 표현하고 있고 아니면 아예 성과 무관한 단어인 “client”로 적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관행이 오히려 철학상담사들은 그들을 찾는 “내담자들이 남성 지향성이나 여성 지향성에서 자유로운 중성적 심리학을 지녔다는 가정 하에서”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남성 편향성을 피하려는 성별 중립적 시도가 “정치적으로는 적합”할 수 있으나 남성에 어울리는 상담이 여성에게도 어울릴 수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상담이 성별 차이를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반영하고 있고 또 반영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주로 여성주의상담의 접근을 통해 이루어지다 보니 심리상담에서조차 상담과 성별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물음이 성별 중립적인 방식의 관심을 받기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심리치료에서조차 성별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대개 상담에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인” 변수로서 간주되지 못하였고, 남성과는 무관하며 그저 여성의 이슈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상담에서 성별 내지 성별 역할이 가지는 의미를 검토하는 데 있어 제일 큰 걸림돌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 자체가 기존의 사회화 과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 내담자와 상담사의 성별 관계가 상담 과정 자체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에 대한 지적이 심리치료분야에서 점차 부각되는 추세이고, 또 내담자의 문제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성별 역할에 관한 본인의 생각과 주변의 기대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므로 철학상담 역시 성별의 문제를 비켜갈 수는 없다고 본다. 미리 밝히자면, 이 글의 의도는 철학상담이 성별 편견을 어떻게 피할 것이냐의 물음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담 과정에서 성별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철학상담 회기에서 이루어지는 상담사와 내담자의 만남을 어떻게 풍요롭고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고민에 두어져 있다.
2. 성별에 대한 접근
라베는 그의 글에서 의사소통적 행위가 성별에 따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칼(Karl) 부부의 상담 사례를 들고 있다.
1년 가까이 라베의 내담자였던 칼은 잘 생기고 건장한 남성으로서, 활동적이고 스포츠를 즐기는, 매우 성공적인 회사의 대표였다. 힐다(Hilda)는 패션모델이었으나 오래 전에 일을 그만 두고 안정되고 편안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15년 동안 육아에만 전념하였다. 칼은 자신의 가족 내 역할이 아이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많은 것에 도전하게 하고 성취하게 함으로써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채찍질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으나, 힐다와 아이들은 남편과 달리 모험적인 야외 활동이나 위험한 스포츠 같은 데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칼은 다른 여성들에게 끌리게 되었고 여러 번의 스캔들을 겪고 나서 그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철학상담을 찾았다. 상담이 약 8개월 정도 지속되었을 즈음 그는 힐다를 상담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 힐다는 당연히 칼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혼란스러워 했으나 동시에 그가 자신의 생활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상담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도 느꼈다. 칼은 자신의 후회를 표현하고 용서를 구했다. 힐다는 분노를 표현했고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 보겠노라 말했다. 그런데 이 순간 칼이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칼이 말했다. “이 모든 일 때문에 너무 미안해요, 힐다. 내가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힐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다려 줘요.”
칼이 재차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무얼 해야 할지 말해 봐요.”
힐다가 대꾸했다. “그냥 날 위해 그 자리에 있어요, 칼. 내말 들어요. 난 시간이 필요해요.”
칼의 시도가 계속 되었다. “알았어. 하지만 난 당신이 내가 그 사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 알고 싶어.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힐다? 뭐든 바라는 걸 말해요.”
힐다가 다시 대답했다. “나도 몰라요. 됐어요.”
칼이 집요하게 물었다. “하지만 난 당신에게 속죄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 내 잘못을 보상하고 싶단 말야.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얼 해줄 수 있을지 말해 줄 수 없겠냐구?”
칼이 잘 해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힐다의 눈물은 좌절의 울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까닭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남녀의 성별에 따라 의사소통적 행위가 다르게 제공되고 수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상담 담론에서 고려되어야 할 성인 남성과 여성의 성별 차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라베는 그러한 차이를 “관점”(viewpoint), “관계”(relationships), “우정”(friendships), “담론 스타일”(discursive style) 등의 범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때 그의 구분 자체나 그 안에 포함된 내용들은 주로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등의 문헌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서술에는 인간에 관한 개별 학문적 접근 또는 여타의 심리치료적 접근과 구별되는 철학상담 고유의 방법론적인 숙고나, 성별에 관한 성별 중립적인-현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접근 가능성에 대한 배려 역시 미흡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상담 분야에서는 아직 성별의 문제를 다룬 시도가 드물다는 점에서 음미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네 가지 범주들 가운데 일단 그가 상대적으로 상세히 거론하고 있는 “관계”(2.1)와 “담론 스타일”(2.2) 상의 성별 차이를 중심으로 소개하고, 이어서(3) 그것이 실제 상담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
<철학 실천과 상담 3집(2012.1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