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코로나 시대의 철학

Kant 2020. 7. 8. 19:19

 

마이클 샌델을 제외하면 오래 전 이미 고인이 된 존 롤즈, 로버트 노직, 심지어 존 스튜어트 밀까지 소환된 걸 보니 새삼 코로나바이러스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

 

<기사 내용 부분 번역 및 요약>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시험이다. 그것은 의학적 역량과 정치적 의지의 시험이다. 인내심과 관용에 대한 시험이며 신자들에게는 종교적 신앙에 대한 시험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개인적, 사회적 행동을 돕기 위해 선택하는 관념의 힘에 관한 다른 종류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대 유행 전염병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실존에 대한 심오한 질문들에 직면하도록 강요한다. 그것들은 너무나 심오한 질문들이라서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대답되어 왔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한 시험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개인이 사회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사회는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그 반대인가? 그것은 단지 치명적인 질병과 싸우는 데 경제적인 한계를 정하기 위한 것인가?

 

 

롤즈주의: 이 입장은 지금까지 대다수 서방 세계의 관계 당국이 선택한 전염병에 대한 접근 방식을 이끌어 왔다. 그들은 가장 약한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고 폐소 공포증을 낳을 만큼 강력한 격리 제한 명령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롤스 자신은 종교적이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성경의 황금률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조차 롤즈의 ‘무지의 베일’ 원칙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 자신이 버림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정부 역시 그들을 포기할 권리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롤즈주의자들은 정부가 모든 사람, 특히 가장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과 가장 깊이 관련된 공리주의 노선의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들의 총체적 행복이나 유용성을 추구하며, 최대다수를 위한 최대의 선 확보를 목표로 삼는다. 공리주의 원칙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근본 신조였고, 또 최초의 공리주의자들은 열정적인 자유주의 개혁가들이었으나, 공리주의의 계산법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전염병 같은 상황에서는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더 더 많은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계산법에 따른다면, 사회가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와 같은 피해자를 수용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리스 존슨 총리의 수석고문 도미니카 커밍스가 사적인 모임에서 옹호했던 정책은 공리주의적 사고의 전형적인 사례다. 충분히 많은 국민들에게 아플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전국적 “집단 면역을 확보하고, 경제를 보호하며, 일부 연금 수급자가 사망”하도록 하자는 것. 그의 견해는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다우닝 스트리트도 즉각 격한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밀 자신도 돈을 사람들의 생명 앞에 두는 것을 옹호하지 않았을터이지만, 공리주의적 계산은 돈과 삶의 균형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일 경기 침체가 생명의 단축 그리고 광범위한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대전염병으로부터 마지막 생명까지 구하려는 노력을 덜 기울이는 것이 더 큰 행복을 낳을 수 있다.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교의 한 논문은 원자력 산업 안전 조치의 비용 효율을 측정하기 위해 개발한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바이러스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법들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 비교 수치를 계산했다. 그 결과는 12 개월의 격리 조치 후 백신 접종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이는 국내 총생산의 감소를 6.4 % 이하 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BBC가 방영한 이 논문은 경제학자들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일부 연구는 경기침체가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반직관적인 주장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러한 연구에 대해 무덤덤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정부와 보험사가 정책을 세울 때도 실제로 인간의 생명에 명목상의 가격을 책정한다. 최후의 한 환자에게까지 최대한의 보살핌을 제공해야만 할까? 만일 그것이 장기적으로 더 커다란 고통을 야기한다면 말이다. 또는 도널드 트럼프가 말했듯, “아무리 조악한 치유법이라도 문제보다 더 나쁘지는 않는 법”(We can’t have the cure be worse than the problem)일까?

도덕적 문제를 공리주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것, 그리고 위에서처럼 불쾌한 결과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황금률과 충돌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은 직관적이다. 그러나 만일 격리 폐쇄 조치가 수개월 이상 힘들게 이어진다면 공리주의 사고는 다시 표면 위로 부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이 입장은 최소한 계몽주의 철학자 존 로크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대에서는 작가 아인 랜드(Ayn Land), 철학자 로버트 노직에 의해 대변된다. 노직은 개인을 억압하는 어떠한 사회구조도 없는 유토피아라면 사람들이 자기 방어와 개인의 권리 보호에 헌신하는 아주 제한된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구의 코로나바이러스 대응은 국가권력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던 반면, 개인의 권리는 거의 논의도 없이 제한시켜 왔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랜드와 노직이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자유] 박탈(privations) 정책에 동의해 왔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권리 침해를 이유로 폐쇄 조치에 대해 반대해 왔다. 정치권이 그러한 과감한 조치의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전에 미국은 예방접종을 하지 않는 부모의 선택권을, 다른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또래 아이들과 섞이지 않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권리보다 우선시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반예방접종운동’의 결과로 홍역의 대유행을 겪은 적이 있다. 의료장비 등을 사재기하는 많은 사람들은 랜드식의 자기결정론을 따르며 자기 자신을 최우선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몇 주 더 자가격리를 시행한 이후라면 그러한 생각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될 수도 있으리라.

 

전 세계의 공공장소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와 충돌하고 있다. 예컨대 소셜 미디어는 종종 호화로운 배경의 대규모 사교 모임 이미지로 채워지곤 한다. 플로리다의 한 22세의 젊은이는 "코로나에 걸려도 내가 코로나에 걸리는 거야"라고 말한다. "난 끝까지 파티하는 걸 막지 못하게 할 거야."

코로나 위기가 전개되기 시작하자, 미국 자유시민연합은 전염성 질병과 싸울 때 "이따금" 시민의 자유를 양보할 것을 수용하는 성명, 하지만 "과학적으로 정당화된 방식으로만" 양보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여행 금지와 방역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증거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사람들이 공원에 모여—그들이 인지하든 못하든—자유주의에 대해 동정심을 표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그는 그들의 행동이 “거만하며, 자기 파괴적이고, 타인들에게 무례한 짓이다. 그러니 당장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뉴욕 시민들은 공원 개방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 같은 조건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컨대 우리 사회가 켄터키 상원의원 랜드 폴과 같은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유주의자인 그는 코로나바이러스 양성 반응을 보인 사람과 접촉했다는 말을 들은 후에도 1 주일 동안 정상적 사회생활을 계속했다. 상원에는 고령층 의원들이 많다는 점을 상기하라. 지난 주말, 상원의원회 체육관에서 운동한 후, 그는 자신이 양성 반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동체주의: 이 접근법은 모든 사람이 공동체[적 삶]를 통해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얻는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개인의 권리가 물론 중요하지만 공동체 규범 그 이상으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대에서는 사회학자 애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 철학자 마이클 샌델과 가장 광범위하게 연결된다. 샌델은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에서 정의가 롤즈가 주장하듯 진공 상태나 무지의 베일 뒤에서 결정될 수는 없고, 오히려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공선에 기초하는 정의론을 제시한다.

샌델은 뉴욕타임스 토머스 프리드먼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공선은 우리가 공동체에서 어떻게 함께 사는가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함께 추구하는 윤리적 이상, 우리가 공유하는 이익과 부담, 서로를 위해 하는 희생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선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에 관해 서로에게서 배우는 교훈에 관한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집안에 격리된 사람들이 그들의 공공 보건 서비스 인력에 박수를 보내기 위해 창문과 발코니로 갔을 때, 공동체주의 사상이 잘 드러났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춤추는 간호사들이 병원 침대를 돌면서 NHS를 기렸을 때도 그러했다. 현대 복지 시스템을 갖춘 많은 국가들에서 공중 보건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감사해 하고 지지를 보내는 일은 공동체주의적 의무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의료 돌봄 확대가 큰 쟁점인 미국과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여준다.

 

마이클 왈처 교수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은 모든 의료 공급 시스템은 "의사들 조합에 대한 제한"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 사태가 이 논쟁을 계속 주도해 갈 것이 틀림없다. 공동체주의는 또한 많은 보수적 사회사상에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매우 보수적인 댄 패트릭 공화당 대변인이 폭스뉴스에서 "나라의 젊은 세대들이 노인들을 위해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의 주장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는 또 "당신이 어르신으로서 당신 자녀와 손자들을 위해 모든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미국을 유지하는 대가로 당신의 생존에 기꺼이 모험을 걸 의향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리고 그게 맞교환이라면, 난 전적으로 찬성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따르면, 노인들이 조국에 강제적인 궁핍을 강요하여 손주들의 삶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애국적 의무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적 윤리는 미국 내에서 늘 반향을 불러일으켜 왔으며 소셜미디어에서도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은 지난 1월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등장한 이후 위와는 다른 종류의 공동체주의를 실행해 왔다. 우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공산당과 동일시되는 지역 공동체와 국가의 선을 위해 자신을 감금하고 격리시키라는 강제 지시를 자주 받았다. 시진핑 체제 하의 공산당은,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이지만 자애로운 국가에 대한 복종을 오랫동안 정당화했던 유가사상을 부활시켰다. 중국과 그밖의 아시아 국가들이 코로나 문제를 스텍터클한 규율로 통제하고 있는 양상은 이 지역에 강력한 사회적 연대 개념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모두 롤즈주의자들이다': 현재 서양에서 채택하고 있는 접근법은 롤즈적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보호받고 싶은 대로 모든 사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가정 하에 일하고 있고, 국민들도 남을 위해 자신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판단하면서 황금률을 적용하고 있다. 고로 이제 우리는 모두 롤즈주의자들이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다른 모든 정의 이론들도 나름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언제고 황금률을 따르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다시 시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롤즈와 황금률이 이길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종교가 서양에서 쇠퇴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의식 속에 강하게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 유행 전염병이 더 심각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더 낮은 정도의 분리 상태에 놓이게 되면 될수록—생존자가 줄어서—우리는 아마도 당신의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개념이 훨씬 더 강력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www.bloomberg.com/opinion/articles/2020-03-29/coronavirus-pandemic-puts-moral-philosophy-to-the-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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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YhzugYF6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