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Rationalism (번역)

Kant 2007. 8. 21. 14:06
  I. 1. “rationaliste”라는 단어는 16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가장 오래된 기록(1539)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단어는 “empirique”에 대립해서 쓰였으며, 경험보다는 순수 사유에게 인식에 대한 더 큰 의미를 부여한 사람을 지칭했다. 나중에 잉글랜드의 프랜시스 베이컨도 이러한 의미 맥락에서 “Rationalist”, “rationalis”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진정한 철학은 일면적인 입장인 R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가진다고 보았다: “경험적인 철학자들은 개미와 같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의 양식을 비축하고 사용한다. 합리론자들은 거미와 같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들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아낸다. 그러나 나는 벌과 같은 철학자를 좋아한다. 중간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외부로부터 [자료를] 수집하되 그 자신의 능력으로 모은 것을 소화하는 벌 말이다.”

경험론과의 대립은 17세기 및 18세기 초의 모든 철학적 체계들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특징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대립이 일반적으로 R로 지칭되지는 않았다. R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순수 사유와 그것의 자기 확실성에 호소하는 것이, 회의주의가 야기한 철학과 학문에 대한 급진적인 위협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대책으로 여겨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때 R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험으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경험 인식에 대해 우위를 점유하는 인식이 나타난다면, 그러한 인식은 이성적인 확실성을 지니며 필연적 진리의 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또 ‘참된 현실성’을 파악하고 경험 인식에게 비로소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 이성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하는 생득적인 관념들의 종합이거나 선천적인 원칙들로서 이해되었다. R은 특정한 인식 원천 이외에도 자주 특정한 인식 방법, 이른바 연역적인 인식 방법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R은 앞에서 언급된 시기 동안에 인식에 관한 이론에 머물지 않고 모든 사태에 관한 분과 학문에도 해당되었다. 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규범들의 구속성을 신의 의지가 아닌 ‘사물의 이성적 본성’에 근거짓는 경우, 그것은 윤리학에서도 등장하였다; 그것은 법철학에서도 등장하였는데, 역사적으로 성장한 법[권리]에 자연권 혹은 이성의 권리가 대립되었을 경우이다; 그것은 미학에서도 표현되었던 바, 취미판단의 타당성이 경험적 규정근거가 아니라 선천적 근거에 의존한다고 간주되었을 경우이다.


2. 17세기 초에는 R 개념이 독일 프로테스탄트 신학 고유의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이것이 오랫동안 이 개념이 철학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헬름슈테트의 교수 D. 호프만과 그의 제자 J. A. von 베르덴하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은 그들의 철학부 동료들을 폄하여 “rationalistae”, 또는 “ratiocinistae” 라고 불렀다. 이들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계시를 판단하는 능력을 자연 이성에게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에 대한 루터의 불신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비판을 받은 철학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단념하려 했는지는 결코 분명치 않다. 1646년의 한 잉글랜드 증인은 “rationalists”가 장로교와 독립교회파 진영의 한 새로운 종파로서 그 지지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성 위에 모든 것을 구축하려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들의 R은 아마도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심을 포함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다만 성경 해석자들에 대한 의구심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소치니즘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그것의 이성 적합성을 강조하자, 이를 계속해서 초자연적인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신학자들이 그것과 대결했을 때, “rationalista”라는 구호는 이미 일찍부터 변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P. 포아레는, “Rationalismus sive Idealismus”라는 두 개념들의 병렬 사용에 의하여, 오로지 이성 이념들에 의해서만 신에 관해 인식하는 것을 허용하는(“non nisi per ideas ... Rationis Deum cognoscere”) 모든 입장들을 지시하였다; 특히 그는 [이때] 이신론(Herbert von Cherbury)과 소치니즘을 염두에 두었다.

“Rationalist”나 “R”라는 단어가 비록 신학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다시 말해 근원적으로는, 변론적인 의미를 지녔었다 할지라도, 나중에 그것들은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성으로부터 도출하는 신학자들이 자기 자신들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때] 그들은 계시를 단지 역사적으로 제약된 가르침의 수단으로만 간주하였고, 그들이 신앙을 신적인 기원에 관한 이성적인 증명 위에 세울 수 있는 한에서만 그 [신앙의] 요구에 순종하였다. 처음에 주로 변증론 신학의 요구에 의해 지배되었던 이러한 태도는, 신앙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역사적인 모든 것들은 도덕적인 것을 위해 위축되었으며, 신앙의 명제들 자신이 하나의 체계적인 연관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L. 메이어의 저술 “철학 성경의 해석자” 이래, 그리고 이것에 의해 야기된 논쟁 이래 “Théologiens rationaux”와 “non-rationaux” 또는 “Anti-Rationaux” 등이 언급되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rationalist”가 회의론자와 신앙철학자 등에 대립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정통 신학자들이 때때로 자신들을 다양한 변종들(이신론, 자연주의)의 R와 구분하고 있었으나, 먼저 “Neologen”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었다. 18세기 말 경에 R와 초자연주의의 대립이 공고해졌는데 칸트가 그 엄밀한 정의를 제시했다: “단지 자연종교만을 도덕적-필연적으로 ... 설명하는 사람은 Rationalist(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라고도 불릴 수 있다”, 반면에 “초자연론자”는 계시에 대한 신앙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로써 R가 지녔던 오래된, 변론적 의미는 “자연주의”라는 용어 (모든 초자연적인 신적 계시의 현실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의미에서]) 안에 포함되었다. 1790년부터 1840년까지 R는 프로테스탄트 신학 내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학파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동시대의 철학은 R와 초자연주의의 대변자들 사이의 신학 내부 토론들을 계속해서 주해하였다. 그래서 헤겔은 “R는 ... 철학에 ... 대립한다; 그것은 내용을, 하늘을 비워버렸으며 모든 것[무한한 것, 총체, 우주]을 유한한 관계들로 폄하했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의 실질적인 거리감으로 인해 R가 한편으로는 진정한 기독교를 “편안하고 ... 계몽된 프로테스탄트 목회자들을 위한 종교로” 왜곡했으며, 그들의 “펠라기우스주의적인 상식”이 원죄설과 같은 중심 교리를 제거했다고 확신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R가 합리성의 기준을 일관되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확신했다: “합리론자가 되려는 자는 철학자이어야 하며 그러한 한에서 온갖 권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나 ... 특정 지점까지만 철학하며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 - 이것이 R의 근본 성격을 이루는 불충분성이다”.


3. 신학적 운동으로서의 R가 소진되고 이 용어가 다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게 되자 철학사 서술은 17, 18세기의 위대한 철학 체계들을 특징짓기 위해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던 자유사상가들과 무신론자들은 19세기 이래로 R를 구호로 사용했는데, [이때] 그들은 자신들이 전통 종교의 미신과의 대결에서 이성과 과학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이 개념을 고대와 중세에까지 확대해 나아가던 역사 서술은 19세기 중반 이래 이 R 개념을 일반적인 의미로, 특히 계몽주의 시기를 특징짓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R는 오성비판, 낙관주의, 진보에 대한 신뢰 등의 결합을 뜻했고, 모든 인간 상황의 근본적인 개선이 계몽된 교육과 방해받지 않는 경험과학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R”라는 용어는 자주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표현하기도 하며, 계몽주의의 유산을 현대에로 이끌어 들이려는 노력을 차단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때 R는 추론(Räsonnement)의 원리로 이해되는데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삶 가운데에서 이성이 수행하는 역할을 과대평가하여 아무런 도움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II. 20세기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R와 Irrationalismus는 (이와 연관해서는 ‘R’의 대립 개념인 이 후자 개념을 참고할 것) 때때로 인플레를 야기하며 사용된 투쟁개념들이다. “단지 합리적 사유뿐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인식 가능성들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입장들의 대변자들 역시 R를 “일면적”이라고 비판했던 게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R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부담을 좁지 않은 의미의 철학적 문화비판 분위기 속에서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O. 슈펭글러는 “도시”의 “R”에게 “농촌”과 그 농촌의 “혈통 및 그 혈통에 들어있는 전통의 힘들”을 대립시켰다. A. J. 랑벤의 통속적인 저서, ‘교육자로서의 렘브란트’에서는 R에 대항하는 변론이 Moderne로부터의 원칙적인 전향으로서 등장한다: “오류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은 우선 그가 길을 잃기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즉 R가 출현한 곳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여기서 분명하게 보이고 있는 반-서구적 악센트는 R를 특히 프랑스의 ‘오성-문명’에서 발견하는데, [그러한 악센트는] 1933년 이후부터 강화된다: 그래서 F. 뵘은 프로그램적인 제목을 가진 자신의 저서 ‘Anti-Cartesianismus. Deutsche Philosophie im Widerstand’에서, “전개되고 있는 Rationalität”에게 “세계관의 성숙한 근거”(이것의 대표자들로서는 대(大) 알베르트, M. 에크하르트, J. 뵘, 파라셀수스, 라이프니츠 등을 거론하고 있다)를 대립시켰다. 이때 그는 이 세계관이 “새로운 나치 학문” 속에 구현되어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E. 크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뵘에 의거하여) 철학 전부를 “합리적인 원리의 절대주의”와 동일시하였고, 이 절대주의의 끝과 더불어 “철학의 끝”이 온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 인종의 한 기능”이었다.

이에 반해 실존철학의 대변자들은 R와 Irrationalismus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F. 하이네만은 그래서 “인간의 합리적이지 않은 층들(충동, 감정, 본능, 정서)과 마찬가지로” “삶의 합리화”에 대해서도 “실존의 새로운 원리”가 승리하도록 했다. 철학적으로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하이데거가 “Stimmung”과 “Befindlichkeit” 같은 실존분석 범주를 그러한 대립의 피안에 위치시켰다는 점이다: “Der Irrationalismus는 - R의 대립항으로서 - 그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을 그저 곁눈질로만 말한다”.

(G. Gawlick u. F. Böhling, H. W. d. Phil., Bd. 8, Sp. 4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