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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Y, 고구마, 그리고 Sauerteig(levain) ㅡ 또는 빵굽기의 철학

Kant 2024. 3. 30. 18:30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poiêsis)의 예로, 집을 건설하는 건축가,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는 의사를 들고 있다. 이때 poiêsis의 결과물은 개별적인 물건, 상태, 또는 조건 등이 될 수 있다. 그가 행한 최초의 구분, 즉 외부 목적을 가진 제작과 내부 목적을 가진 행위(praxis)의 구분은 미학과 관련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예컨대 독립적인 예술작품을 만드는 활동은 poiêsis의 예시가 될 것인데 비해, 하프 같은 악기 연주 같은 [역시 예술] 활동은 행위의 사례가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작가의 행위도 내적인 목적을 지닌 praxis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그 최종 결과물은―이것은 행위가 목적론적인 완성에 이를 때가 아니라 오히려 중단될 때 남게 되는 것일 수도 있을텐데―그 행위에 대해 독립적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 행위들도 poiêsis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둘째 의문은 하프 연주를 행위로 분류할 때, 실천적 지혜(phronêsis)가 하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연주는 일반적으로 기술적 전문성(technê)에 더 가까와 보이기 때문이다. …

 

"현재의 상태와와 다른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것에는 제작(생산)을 통한 것과 행위를 통한 것이 있다. 하지만 제작(poiêsis)과 행위(praxis)는 서로 다른 것이며 … 그래서 이성에 따르는 행위의 습성 상태(meta logou hexis praktikê)와 이성에 따르는 제작의 습성 상태(meta logou poiêtikês)는 서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 가운데 어떤 하나는 다른 것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즉, 행위는 제작이 아니며, 또 제작은 행위가 아니다.
이제 예를 들어보자. 건축술은 하나의 기술(technê)인데, 본질적으로 제작에 관한 이성을 포함하는 상태다. 제작에 관한 이성을 포함하지 않는 기술이란 없으며, 또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기술은 제작에 관한 참된 이성을 포함하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모든 기술은 어떤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을 추구한다는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때 그것의 원인은 제작자에 있는 것이지 제작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필연에 의해 존재하거나 존재하게 될 것에 관계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자연본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그 원인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과 행위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기술은 제작에 관한 것이지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가톤은 ‘기술은 운을 좋아했고, 운은 기술을 좋아했다’고 말했는데, 이처럼 어떤 의미에서 기술과 운은 동일한 것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제작에 관한 참된 이성을 포함하는 상태다. 기술의 결여는 그 반대 상태로서, 제작에 관한 그릇된 이성을 포함한다. 이 두 가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
우리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영역에서 어떤 탁월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잘 숙고하는 사람들을 그 영역에서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phronimos)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숙고를 잘하는 사람(ho bouleutikos)은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나 자신의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지식이 논증을 포함하는 것인데 비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을 지닌 모든 것에 대해서는 논증이 있을 수 없다(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필연적인 것들[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숙고할 수 없다면, 실천적 지혜는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천적 지혜가 학문이 아닌 이유는,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기술이 아닌 까닭은 행위와 제작이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실천적 지혜란 인간에게 좋거나 나쁜 것과 관련된 행위와 관련하여 진리를 파악하는 이성적 상태다. 제작은 목적을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두는 반면에, 행위는 그렇지 않으니, 행위의 목표는 잘 행위하는 것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NE 1140a-1140b)

 

제작의 원인(archê)은 제작자에게 있고 그 목적은 그 제작된 것 안에 있다. 이에 반해, 행위의 원인과 목적은 행위 자체에 있다. 기술과 실천적 지혜 모두 영혼이 긍정과 부정을 통해 진실을 파악하는 상태들’(aletheuein)인데, 총 다섯 가지 종류의 이러한 상태가 있다: 기술[적 전문성](technê), 체계[학문]적인 지식(epistêmê), 실천적 지혜(phronêsis), 지혜[철학적 통찰](sophia) 그리고 [직관적] 지성(nous) (NE 1139b). 다른 종류의 ‘영혼의 진실 발견’과는 달리, 실천적 사고와 제작에 관한 사고는 그 진실이 올바른 욕망과 일치하여야 잘 이루어진다. 즉, 그 적절한 방향은 세상에서 출발해 마음으로 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에서 시작해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즉, 행위와 제작은 그것이 목표하는 바를 진실로 만드는 데 있다. 그 목표가 내적인 것이거나 외적인 것이거나 상관없이 그렇다. 따라서 기술은 참된 이성적 지침에 따르는 ‘제작에 관한 습성 상태(poiêtikê hexis)’다(1140a), 이에 비해 실천적 지혜는 행동 영역에서 인간에게 좋고 나쁜 것에 관계하는 이성적 지시가 수반하는 진실된 습성 상태다. 제작의 목표는 그 제작 과정과 별개이지만, 행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목표가 잘 행위하는 것(eupraxia) 자체’다(1140b5-9); 그리고 eupraxia는 ‘행복’과 동의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이성적 지시가 수반하는 습성으로서, 행위에 관련해서 인간적 좋음의 영역에서 진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적 지혜란 ‘일종의 탁월함(aretê)이지 기술적 전문성이 아니다’(1140b20-25).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가 인간적 좋음의 영역에서의 행위임을 감안할 때, 실천적 지혜가 덕, 즉 탁월함이 되고, 반면에 기술은 단지 전문성이며 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제작이 인간적 좋음의 영역에서 진실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제작적 사고, 두 종류의 제작[생산, 산출], 그리고 두 종류의 목표가 존재한다. 첫째 제작 모델에서 목표는 그 제작자와 다른 어떤 것에 관련된다. 즉, 제작물은 외적인, 즉 독립적인 용도를 제공하며, 그것이 제작되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장인이 생각하는 것, 즉 그가 활동을 통해 실현하려는 것이 곧 그 제작 활동의 목표다.

행위라 불리는 전통의 둘째 모델 역시 제작[생산, 산출] 모델로서, 이 모델에서 생산된 것(ergon)은 외적인 용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목적을 지닌 것이다. 다른 것을 위한 어떤 것을 위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도 없이 행위하는 것(to prakton)뿐이다. …

 

 

독립적인 산물을 낳는 활동들은 그 생산 활동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목적인 생산[제작]물에 종속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고전적 생산 모델로서 나중에 [막스 베버, 비판 이론 등에서] 도구적 행위로 이어진다. 그러나 외부 목적이 없는 활동(energeias), 즉 praxeis의 경우, 그것의 좋음은 외적인 생산물이 아니라 활동 내지 활성화로서 이해되는 활동 자체에 있다. 즉, 인간의 우수성이나 덕목(aretai)을 활동시키거나 활성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생산 모델은 현시(manifestation)의 모델이다. 다시 말해 인간 종의 잠재력의 결과물을 활성화시켜 그 종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ergon은 ‘작업’, ‘생산물’ 또는 ‘기능’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NE 1098a의 유명한 ‘기능 논증’에서와 같이, ‘인간의 기능을 종의 한 종류의 생명이라고 가정하는데, 이 생명은 영혼의 활동(energeia)과 이성을 수반하는 실천[행위](praxeis)으로 이루어지며, 이것들을 잘하고 뛰어나게 행하는 것이 인간의 좋음에 속하며 각각의 것이 그 적절한 탁월함을 지닐 때 완성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종의 적절한 기능을 구성하는 우수성(aretai)을 발휘할 때, 그 사람들은 어떤 건강한 생산물을 산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건강하거나 행복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제작의 둘째 모델인 이 현시 모델에서는 목적이 활동의 완료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 안에 존재하고 현시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건강이 건강을 생산한다’는 것(둘째 모델)을 뜻하며, 이는 의사가 환자나 자기 자신에게서 건강을 생산하는 것과 대비된다(첫째 모델, NE 1144a). 둘째 모델에서의 목적은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거나 일반적인 것이다.

 

Henry W. Pickford, “Poiêsis, Praxis, Aisthesis: Remarks on Aristotle and Marx” in Aesthetic Marx, edt. b. S. Gandesha and J. Hartle, London: Bloomsbury, 2017, 23-48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노동[제작]의 의미를 과소 평가한 결과를 잘 보여주는 글 같다. 예술 활동이나 예술 창작 활동을 순수한 내적 목적을 지닌 행위로 볼 것이냐 아니면 제작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도 문제지만, 암암리에 드러나는 제작에 관한 대철학자의 편견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유한한 목적에 봉사하는 제작은 무한한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위[자기 목적적 실천]에 비해 그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여긴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후자야말로 당연히 철학자가 가장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이가 조금 들어보니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다마는 …

위의 논문을 읽다가 문득,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 중학교 다니던 아들 녀석에게 압력을 행사해 간단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게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배경화면으로 내걸었던 그림이 다시 생각난다. 렘브란트의 <명상 중인 철학자>the Philosopher in Meditation. 그 그림 한쪽 구석에서 벽난로의 불씨를 보살피는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나중에 옥스퍼드 오리엘 컬리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들을 때 <정치학>에서 노예에 관한 그의 숙고된(!) 견해를 직접 접하고부터였다. 그림 중앙의 철학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올랐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그 그림에서 간과했던 존재는, 그 철학자가 먹고 사는 문제로 마음 졸일 일 없이 philosophieren 내지 느긋하게 theorein(명상)할 수 있게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일상의 노동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었던 자, 즉 그의 노예였다고 말이다.

 
(https://philkant.tistory.com/entry/The-Philosopher-in-Meditation%EA%B3%BC-%EB%85%B8%EC%98%88-%EA%B7%B8%EB%A6%AC%EA%B3%A0-%EC%9E%A5%EB%AC%B8%EC%9D%98-%EA%B0%81%EC%A3%BC)

 

생업으로 삼지 않는 한ㅡ아니 생업일지라도ㅡ가구를 직접 제작할 때나 화초를 키우거나 텃밭을 가꾸어 무언가를 수확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즐거움은, 그저 그 활동을 통해 원목 식탁이나 장롱을 얻는다든지, 고구마 몇 박스, 배추 몇 포기 손에 넣자는 게 유일한 목적인 그런 성취에 관한 것이 아니리라 단언할 수 있다. 암튼 내 경험에 따르면, 무언가가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가며 서서히 내 눈 앞에 나타나는 과정 자체가, 추상적인 사유 놀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논문 쓰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만족감을 주었다. 언젠가 <나는 자연인 … > 어쩌구 하는 프로에 보니―난 이 프로를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출연자가 하는 말이, 태어나 처음 채소 씨앗을 심고 나서 몇날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어느날 밤 떡잎 하나 올라온 걸 발견하곤 혼자 펑펑 울었다던데, 그 사람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내게 다시 주택에 거주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난 예컨대 반려 동물을 키우기보다는 채소 가꾸는 걸 선택할 것이다. 물론 기꺼이 반려동물의 부모나 집사 노릇하려는 사람들을 흉볼 생각은 없다, 아파트 단지며 학교 캠퍼스 등지에서 자기네 “아그“들 배설물만 잘 치워준다면.

 

언젠가 정년 이후 계획을 여쭈어 보니, “‘국산사자음체’만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라 반문하셨던 어느 선배 교수가 생각난다. 추측컨대, 독서, 금융 공부, 사교, 자연 벗하기, 악기 연습, 운동 같은 활동들을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한다. 최근에 난 여기에 하나 더 보태기를 격하게 추천하고자 한다. 바로 “실과” 과목이다. 요샛말로는 “기술-가정”인가? 왜냐고? 이스트 없이 일주일 남짓 천연 효모(Sauerteig) 길러서 제대로 된 호밀빵을 만들어 보니 그 성취감이 유기농 채소 텃밭 가꿀 때와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바로 그 철학자”는 경험해보았을리 만무지만 말이다.

텔레스형, 빵굽기[제작]도 그 자체로 행복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건강한 빵까지 제공해준다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