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불만을 치료하기 위한 여행에 대하여(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28번째 편지)

Kant 2022. 11. 27. 18:07

자네만 그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그처럼 오랜 여행과 수많은 풍경의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우울함과 무거움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치 신기한 일처럼 놀랍다는 말인가? 모름지기 기후의 변화보다는 영혼의 변화가 필요한 법이라네. 자넨 광대한 바다를 건널 수 있었겠지. 마치 베르길리우스(Vergil)가

“땅과 도시가 뒤로 지나간다”

고 언급한 것처럼 말일세. 하지만 자네의 결점은 자네가 여행하는 곳마다 자네를 따라갈 테지. 소크라테스도 자네처럼 불평하던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네. “당신이 항상 자기 자신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째서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궁금해 합니까?”

새로운 땅을 볼 때마다 자넨 어떤 즐거움을 느끼는가? 아니면 관심이 가는 도시와 장소를 돌아볼 때면 즐거운가? 자네가 여행에서 겪는 모든 번잡함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지금 내게 그러한 여행이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를 묻는 겐가? 그건 자네가 자네 자신과 함께 도망가기 때문이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어떤 곳도 자넬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네. 자네의 현재 행동이 Vergil이 묘사했던 여성 선지자의 행동과 같다고 생각하시게.

“여사제는 어쩌면 흔들릴지 모른다고 소리친다,

위대한 신이 그녀의 마음에서.”

자넨 자네에게 지워진 짐을 없애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그것은 자네의 안절부절 못함으로 인해 더 골칫거리가 될 뿐이지. 즉, 선박에 실은 짐이 고정되어 있으면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지만, 만일 그 짐이 한쪽으로 움직이면 선박이 가라앉는 방향으로 더 빨리 기울게 되듯이 말일세. 자네가 하는 모든 일이 자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자네는 불안으로 인해 자신을 다치게 만들지. 다시 말해 자네는 마치 병든 사람을 흔들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일세.

일단 자네의 문제가 제거 된다면, 모든 장면 변화가 즐거운 것이 될 걸세. 비록 자네가 지구 끝까지 쫓겨나더라도, 또 자네가 발견할 수 있는 미개한 땅의 어느 모퉁이에 내버려지더라도 그곳은 자네에게 친절한 거처가 될 것이네. 자네가 가는 곳보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니까. 그런 이유로 우리는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예속시키지 말아야 하는 법이지. “나는 우주의 어느 한 구석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 온 세상이 나의 나라다”라는 믿음으로 생활하시게.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본다면, 오래된 장면에 지쳐서 매번 돌아다니면서도 만나는 신선한 장면에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것일세. 처음 보는 것을 자네가 전적으로 자네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매번 각각의 경우가 자네를 기쁘게 할 것이네. 그러니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자네는 여행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네. 자네가 추구하는 것, 즉 '잘 산다는 것'은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다니면서 표류하고 쫓기고 있었던 것뿐이지.

광장만큼 혼잡스러운 곳이 또 있을까? 그러나 필요하다면 그곳에서도 조용히 살 수 있다네. 물론, 만일 누군가 내게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광장이나 그 근처에서 멀리 도망쳐 살겠네. 역병이 도는 곳이 가장 강한 체질을 지닌 사람까지도 공격하듯이, 병에서 회복되기는 했지만 아직 온전하지 못한 건강한 정신에게 해로운 곳도 있을 것이네. 나는 큰 파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폭풍의 존재를 환영하면서 삶의 문제들과 영혼의 고집스러움 속에서 매일 씨름하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네. 현명한 사람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내겠지만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들의 잘못들과 계속해서 다투어야만 한다면 자기 자신의 잘못을 내던져 버리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니까.

누군가 말하길,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30명의 폭군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의 정신을 꺾을 수 없었다”고 했네. 그러나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주인을 가졌는가가 무슨 상관이겠나? “노예상태”에는 복수형이 없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을 멸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지. 그가 얼마나 많은 거대 군주의 무리 속에 서 있든 상관없이 말일세.

이제 이 글을 멈출 시간이네만, 내가 아직 내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군. “죄를 아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에피쿠로스의 이 말이 내게는 고귀한 말로 들린다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교정을 바라지 않지. 자넨 자네 자신을 개혁할 수 있기 이전에 자네 자신의 잘못을 발견해야 하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자랑하기까지 하지. 자신의 악을 미덕인 것처럼 여기는 그런 사람이 자신의 방식을 고칠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가능한 한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증명하고 자신에 관한 혐의를 찾아내시게. 처음에는 고발자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는 재판관, 마지막에는 중재자 역할을 하시게. 때때로 자신에게 가혹해 지도록 하게. 잘 지내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