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독일 통일 직후의 사상적 갈등과 구 동독(DDR) 철학

Kant 2014. 2. 28. 09:17

논문개요: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인, 특히 구 동독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삶의 영역과 관련하여 일어난 변화와 문제들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대전의 종전 이후부터 재통일 이전까지의 동독 지역의 철학적 유산에 대한 적절한 평가 작업이 전제가 된다는 것이 본 논문의 출발점이다. 이 논문의 전반부는 먼저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구 동독 철학의 전개 과정을 정리하고, 재통일 이후 진행된 구 동독의 공식 철학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적 의의에 관한 논의를 요약하고 평가한다. 논문의 후반부는 1989년 동독의 실질적인 붕괴 이후 같은 지역에서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차이와 관련하여 발생한 몇몇 구체적인 문제 사례들로서, 철학 관련 제도의 구조 조정 및 과거 청산 작업을 둘러싼 논쟁, 유사 종교 단체들의 문제, 종교 교과목에 관한 법적 분쟁 등을 소개한다.

 

 

국문 키워드: 동독 철학, 마르크스-레닌주의, 구조 조정, 독일 통일, 시민 철학

 

영문 키워드: DDR-Philosophie, Marxismus-Leninismus, Abwicklung, Wiedervereinigung Deutschlands, Bürgerliche Philosophie

 

 

 

    I. 머리말

 

최근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서도 드러났듯이 한반도의 통일은 이제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에 대한 전망과 통일 이후에 대두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문제들에 관한 관련 학계의 활발한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철학분야에서의 통일에 대한 관심은 아직 미미한 상태라고 여겨진다.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북한의 전체주의적 체제를 고려한다면, 통일은 특히 북측의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커다란 충격효과를 동반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특히 한반도의 통일이 독일의 경우와 같이 급격하게 이루어진다면 가치체계나 세계관과 관련하여 일종의 진공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은 통일 직후 최근까지 과거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 정권 하의 정신적 및 가치관적 유산과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당면한 경제적 통합의 문제 해결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소득 수준을 비롯하여 동서 지역간의 경제적 차이가 많이 극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인 갈등과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판단된다. 그리하여 1990년 통일 당시 우리는 하나다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를 외쳐대며 환호하던 독일인들은 불과 몇 년 뒤에 몰락한 민족Das gestürzte Volk”, “불운한 통일Die unglückliche Einheit”을 운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오시-베시 알력Ossi-Wessi Konflikt”으로 일컬어지는 마음의 벽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002년도의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동독 출신 주민의 63%가 자신들을 서독 출신 주민들과 동족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답하고 있는데, 이 비율은 2000년도의 43%에 비해 오히려 크게 상승한 것이다. 더욱이 통일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거나, 내적 통일 내지 동질화가 불가능하다는 비관론을 품은 독일인들의 수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통일이 메워야 할 동서 주민 간 골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독일 국민이 가치관이나 심리적, 정서적 갈등의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정신적 통합이 뒷받침되지 않은 물리적, 정치적 통합이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문화권 내에서 생활하는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라, 아주 이질적인 가치관에 의해 유지되어 온 두 세계가 하나로 되면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수시로 발생할 수 있을 위화감이나 갈등은, 사회적 차원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인, 특히 구 동독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삶의 영역과 관련하여 일어난 변화와 문제들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대전의 종전 이후부터 재통일 이전까지의 동독 지역의 철학적 유산에 대한 적절한 평가 작업이 전제가 된다는 것이 본 논문의 출발점이다. 물론 이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우 포괄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서, 먼저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구 동독(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 철학의 전개 과정을 정리할 것이다(II). 다음으로는 재통일 이후 진행된 구 동독의 공식 철학 마르크시즘-레닌이즘(이하 “m-l”)의 철학적 의의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III). 논문의 후반부는 1989년 동독의 실질적인 붕괴 이후 같은 지역에서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차이와 관련하여 발생한 몇몇 구체적인 문제 사례들로서, 철학 관련 제도의 구조 조정 및 과거 청산 작업을 둘러싼 논쟁, 유사 종교 단체들의 문제, 종교 교과목에 관한 법적 분쟁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IV).

 

 

II. 구 동독 철학의 전개 과정과 철학사적 자리매김

 

 

2차 대전 직후 소련점령지역 독일의 학계는 파시즘의 잔재 청산과 새로운 체제에의 적응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철학 분야의 경우 과거 나치 시대에 박해를 받았거나 해외로 떠났던 학자들이 학계에 복귀함으로써 연합군 점령하의 서쪽에서와는 다른 독일 철학사의 한 장이 열리게 된다. 통일 이전 동독에서 출판된 철학사나 동독 출신 학자들은, 종전 직후 동독의 철학이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전후 동독 학계에서의 탈 나치화 및 민주화의 과정이 “m-l 철학의 관철과 궤를 같이한다.

 

실제로 마르크시스트들이 과거에 나치 정권의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전후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련의 힘을 등에 업은 이들은 곧 다양한 제도적 수단들을 이용하여 학계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시켰고, 이 과정은 철학자들에 대한 세대 교체 작업과 병행되어 추진되었다. 이들이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라이제강Hans Leisegang이나 야스퍼스Karl Jaspers 등 같은 철학자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평가했는가를 살펴보면, 독일 공산당 및 SED가 반 파시즘 경력과는 무관하게 체제 확립에 비협조적인 철학자들을 우선적으로 배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DDR 정부 출범 이후 동독 지역에는 SED 해석의 m-l 철학만이 유일의 공식 철학으로 확립됨으로써, 그것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떠한 종류의 사상적 시도도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탁월한 마르크시즘 이론가였던 루카치Georg Lukács의 영향으로 독일 고전 철학, 특히 헤겔 철학 등에 대한 해석에서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던 블로흐Ernst Bloch, 하리히Wolfgang Harich, 하베만Robert Havemann 등도 1949년경부터는 스탈린 숭배를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53년 동 베를린 노동자 폭동사건 등 울브리히트Ulbricht 정권의 위기를 틈타 잠시 탈 스탈린주의와 학문의 자유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1970년대까지 동독 철학의 큰 흐름은, 스탈린주의의 지배화(1949-53), SED정치의 이데올로기 m-l의 체계화및 제도화(1957-78)라는 표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한편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 m-l 철학은 소위 시민적내지 후기 시민적이데올로기와 철학에 대한 비판에 종사한 시기로서, 낭만주의 철학, 생철학, 신칸트학파, 실존주의, 실증주의 등이 그 주요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후는 클라우스Georg Klaus의 이른바 사이버네틱 마르크시즘이 주목받았고, 70년대에는 반동적 시민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서구 마르크시즘 내지 네오마르크시즘에 대한 비판이 수행되었으며, 서구의 환경 보존 운동 철학까지 과학 적대주의비합리주의라는 이유로 공격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동서간의 문화적인 접촉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급격한 사회 변화, 예컨대 팝과 펑크 문화, 스킨헤드, 각종 자유 예술 활동 등이 유입되었는데, 이에 대해 기존 m-l 철학의 개념적 도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카퍼러가 사용한 간부철학Kaderphilosophie”이라는 개념은, DDR를 비롯한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의 m-l 철학이 그 전개 과정에서 보여준 특징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지식을 생산력으로 간주하고, 학문과 실천의 일치를 지향하는 m-l 철학은, 모든 학문의 규준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학문은 유용한 것 일뿐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m-l의 철학적 전제들과 법칙에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추진될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개별 학문들은 연구 주제나 중심 개념들, 방법 등에 있어서 m-l 이론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고, 역으로 m-l 이론을 포함하는 모든 개별 학문 종사자들 역시 광범위한 의미에서 철학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m-l 철학의 공식 대변지였던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가 철학자뿐 아니라 정치인, 기자, 경제학자, 사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문예학자, 자연과학자, 엔지니어, 의학자 등의 글을 실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구 동독의 철학은 단순히 하나의 철학 이론이 아니라, 당이 주도한 m-l 세계관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실천적 지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구 동독 사회를 움직여 온 간부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 표현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SED가 해석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m-l의 설명력에 대한 지속적인 확증이었고, 본질적으로 새로운 철학적 통찰이나 이론적인 대안이 제공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좁은 의미의 구 동독 철학은 학문적으로 전개되었거나 발전되었다기보다는, 철학사적 과거나 서방측 철학자들이 새로 제시하는 이론적 대안들에 대하여 m-l 이론이 지니는 우월성을 증명하는 시도였고, 또 그 공식 버전에서 벗어난다고 간주된 마르크시즘에 대한 비판 과정이자 - 80년대 루카치, 블로흐 등의 복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 복권의 과정이기도 하다. 60년대까지 이어진 시민 철학후기 시민 철학등과의 비판적 대결, 그 이후의 네오마르크시즘 및 철학적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이 구 동독 철학사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구 동독 철학의 이와 같은 성격을 잘 확인해 준다.  (...)

 

 

 

IV. 남은 문제들: 갈등 사례들

 

독일의 지난 10여년 동안의 이른바 사회 통합과정을 돌아보면, 40여년 이상 구 동독 사회를 지배해온 m-l 세계관의 유산을 정리하는 작업이 단순히 경제적 비용만의 문제이거나 정치적 결정만으로 완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하 단락에서는 구 동독 철학의 평가 문제를 계기로 발화된 구조 조정 논쟁과, 유사 종교의 사회 문제, 종교 교과목 LER을 둘러싼 헌법 소송 사례 등, 그러한 세계관적 차이가 남긴 사회적 갈등 사례들을 정리한다.

 

 

1) 구조 조정 논쟁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분단 사회주의 국가이던 동독에서는 이념 교육이 상당히 커다란 사회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에 관한 제도적 뒷받침도 잘 이루어져 있었다. 1990년까지 구 동독 지역에는 5개의 도시, 즉 동베를린, 라이프치히, 그라이프스발트, 할레, 예나 등지의 대학에 “m-l 철학과Sektionen für marxistisch-leninistische Philosophie”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중 규모가 컸던 앞의 두 도시들의 대학(훔볼트와 라이프치히)의 동일 학과에는 각각 10개가 넘는 교수직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대학들에 설치되어 있던 철학과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인원을 합하면 구 동독에는 대략 150명 정도가 대학에서 철학 관련 강의와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거의 같은 규모의 인력이 철학 내지 이데올로기 관련 연구소, 예를 들면 동독 학술원의 철학 중앙연구소Zentralinstitut für Philosophie” 같은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통일 이후 이러한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 내지 해체 작업이 불가피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실제로 불과 6년 뒤인 1996m-l 철학과는 모두 폐지되었고, 대부분의 대학에 서독의 대학에서와 같은 철학과 내지는 철학 연구소Institut für Philosophie”가 새로 들어서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 개편이 기존 인력을 서독 출신 학자들로 거의 완전 대체함으로써 이뤄졌다는 점이다. 소위 청산Abwicklung”이라는 명목 하에 동독 출신 상당수 고급 인력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반면, 취업난에 고생하던 서독 출신 학자들은 기대하지 않던 후원Förderung”을 얻게 된 것이다.

 

대학마다 청산 작업을 담당하는 전문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인력 구조 조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6년부터 신속하고 매끄럽게 진행된 작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서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만을 제기하는 쪽의 주장은 한마디로 퇴출Entlassung”승진임용Beförderung”의 과정이 은밀한 방식으로 이뤄져 투명하고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구 동독의 철학이 철학적인 검토와 평가 절차를 밟도록 하는 대신 오로지 효율적인 관리를 우선시한 정치 논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 동독의 철학이 보여준 정치와의 순수하지 못한 야합을 청산하고 철학에 학문으로서의 자유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정부의 대학 정책 심의 기관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다시 정치 논리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편입된 주들의 행정부가 거의 대부분의 전문 위원을 서독 출신 교수들로 위촉하였는데, 이 위원들이 기존 학자들의 재임용 여부를 심사할 때 사용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구 동독의 비밀 정보 기관이었던 국가 안전부의 기밀 서류Stasi Akten”였다는 것이다. 국가 안전부는 학자 개개인을 그들 학문의 내용과 업적과는 무관하게 단지 이념적인 신뢰도나 그들의 서방측 인사들과의 접촉에 관한 정보에 의해 그들을 분류하고 평가했을 뿐이었으므로, 그러한 자료가 철학자 개개인은 물론 거의 반세기를 지속해온 한 국가적 규모의 사상적 업적에 대한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치와 긴밀한 유대 관계 속에 있던 학문의 지적 풍토를 쇄신하는 일은 그 학문에 종사하던 인물들을 교체하는 일과 동일시되었고, 일반인들도 그러한 물갈이 인사를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기 개혁의 성공 정도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지표로 간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 주도의 개혁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이전에 몇몇 대학들에서는 이미 독자적인 개혁 의지에서 만들어진 위원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 정화 노력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위원회들 역시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한 내부적 개혁 의지는 여러 부작용에 시달렸는데, 예컨대 배신, 비방, 음해, 기회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 청산 작업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 물론 그들을 위촉한 것은 주 정부의 관리들이었지만 - 서독 출신 학자들은 그 과정이 공정했을 뿐 아니라 사안의 복잡성에 비추어 볼 때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반박했다. 그들의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청산 작업이 은밀하고 불투명하게 이루어졌다는 비난은, 그러한 종류의 심리 과정과 그것에 관련된 제도적, 법률적 문제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것은 심리의 대상 자체가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고 지루하게만드는 것인지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50대의 철학자는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 1968년이래 줄곧 17세기 독일 법학자 한 사람만을 연구했고 그래서 단 두 개의 논문만을 출판했노라 주장하기도 했고, 또 어떤 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문화철학자로 분류되어 20년 동안 중국 문헌의 번역에만 종사토록 허가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국제적으로 저명한 마르크스 철학 전문가는 통일 직후 아주 일반적인 철학 주제만을 연구하는 등 변신에 혼신의 힘을 쏟기도 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의 짐을 스스로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벗어 던질 기회를 주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학대를 강요하는 짓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동독 출신 철학교수들은 그들 스스로 정치적인 변혁의 의미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학문적인 기준에서 볼 때 자신들이 대학에 계속 남을 수 없으리란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인사 위원회의 심리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쪽을 택했고, 또 구 동독 시민들로만 구성된 명예 위원회의 심리도 포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퇴직은 당사자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결정한 선택이었으며 다른 어느 누구나 세력 집단의 부당한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구 동독 지역의 빈자리에 새로 진출한 서독 출신 학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뒷소문들 - “그들은 서독에서는 희망 없던 자들이다”, “경험이 부족하고 동독 지역 학계를 재건할만한 능력이 없다”, “낡은 연구 프로젝트로 자리를 얻었다등등 - 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들이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들이 동독에서의 임용에 응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들의 경력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무언가 좀더 위대한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과 책임 의식, 그리고 위대한 철학적 전통에 동참하겠다는 명예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변론이 제출되었다. 또한 새로운 체제로 다시 출발하는 구 동독 지역의 대학들에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경험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며, 오히려 앙가주망과 순발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라는 옹호론도 시도되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조 조정의 주체 역할을 담당했던 정치가 및 관료들, 그리고 다수의 서독 출신 학자들은, 구 동독 철학과의 대결을 근본적으로 학문 이론상의 문제 이전에 도덕적인 문제로 파악했다. 이것은 그들이 구 동독 철학을 m-l 정치 이데올로기나 세계관과 구분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극히 예외적으로만, 다시 말해 비공식적인 철학이나 체제 저항으로 불이익을 경험한 철학자들의 경우에만 그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구 동독의 철학자들에게서 정치적 관점을 배제한 채 순수하게 학문적이고 교육학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받기를 요구할 실질적인 권리를 박탈한 것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만일 그렇지 않고 그러한 권리를 충분히 인정했어야 했다면 그 적절한 범위와 한계는 어떻게 결정되었어야 했는가 라는 물음이 여전히 독일 철학계의 짐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구조 개편 작업의 주체 세력에 대한 특혜 시비도 우리가 참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1996년이래 구 동독 철학의 평가 논쟁에 적극 가담해 오고 있는 게르하르트 등의 주장, 즉 구 동독의 빈 자리에 새로 진출한 서독 출신 학자들이 역사적인 과제에 대한 책임 의식과 선구자 정신으로 무장한 유능한 인재들이었다는 주장은, 실제로 그 자신이 서독의 한 스포츠 전문 대학 C2 교수직에서 통일과 함께 훔볼트 대학의 C4 교수직으로 약진한 경력 소유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끝으로 구조 조정의 정당성을 적극 옹호하는 학자들조차 시행착오로서 시인하고 있는 것으로서, 구 동독 지역의 학문 후속 세대에 대한 양성 및 지원 대책이 부족했다는 점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일 것이다. 통일 직후 학술 위원회의 권고로 동독 출신의 학자들을 위한 통합 프로그램Wissenschaftler-Integrationsprogramm” 고등교육개선 프로그램Hochschulerneuerungsprogramm”이 실행되었으나 실질적인 효과보다는 구색 갖추기에 불과했다는 평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구 동독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학자들의 지식과 능력, 예를 들면 그들의 슬라브어를 비롯한 동구권 언어 및 지역 문화에 관한 이해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제도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했던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야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유사 종교 단체들의 문제Sektenproblem

 

 

맥브라이드는 구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에서 m-l을 대체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성향의 움직임들로서 자유 시장 경제 체제, 포스트모더니즘, 신비 내지 초월 사상 등 [유사] 종교의 유행, 민족주의 등을 열거하고 있다. 필자 견해로는 이 중에서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은 구 동독 지역보다는 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해당되는 현상으로 판단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는 구 동독 젊은 세대의 보상심리에 따른 것으로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즉 후자는, 헨리히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8,90년대 프랑스와 서독에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또 누구나 손쉽게 익힐 수 있는 유행 사상에 다가감으로써 그 만큼 자신들이 서쪽화되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싶어 하는 동독 지역의 젊은이들의 즉흥적인 몸짓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시장 경제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 붕괴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지만, 동구권에서 유행하고 있는, “하나의 유물론[= 역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다른 유물론[= 물질적 황금 만능주의]에로의 이행 이라는 체념 섞인 표현이 말해주듯이, 그것이 함유하는 바가 단순히 경제 활동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늘날 동구권 다수 국가들 국민의 삶이 보여주는 역설은, 그것이 마르크시즘과의 결별 후 더욱 철저하게 물질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시즘의 상-하부 구조론은 동구권 구 질서의 몰락을 통해서 그 다소간의 진실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 만큼 물질적 경제적 욕구만이 그 지역 사람들의 무한 관심사이며, “이익 효율성efficiency-for-profit”이 모든 가치들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렸다. 맥브라이드에 의하면, 새로운 유물론은 이기주의의 수행, 즉 가능한 한 값비싼 장난감들을 소유하고 부를 축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적인 만족을 극대화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그에 의하면, (...)

 

 

그러면 문제가 되고 있는 유사 종교 단체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독일 교회와 언론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는 단체들에는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크리슈나 운동등이 있다. 이들 중 독일의 언론 매체를 통해 가장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체는 1954년 미국의 공상과학소설 작가 허바드Lafayette Ronald Hubbard가 출발시킨 것으로 알려진 사이언톨로지이다. 이 단체는 이미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여러 나라에 상당한 규모의 가입자들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카톨릭 및 개신교 교회와 가장 큰 알력을 빚고 있다. (...)

 

 

V. 맺음말

 

 

브란트Willy Brandt 정권의 동방정책이 실시된 이후 최소한 18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동독의 붕괴로부터 통일조약의 체결까지 불과 1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진행된 독일의 통일 과정은, 워낙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행된 까닭에 여러 문제점들을 양산했다고 할 수 있다. 흡수 통합은 당시 서독 여당이던 기민-기사당 연립정부의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정부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불만이 극에 달했던 동독주민들의 강력한 요구 사항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서독의 기본법은 두 가지 방식의 통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예컨대 제 146조는 기본법은 독일 국민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헌법이 발효되는 날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하여, 동서독 국민이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의회를 구성하여 새 헌법을 제정한 다음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반해 제 23조는, 기본법의 유효지역을 서독으로 한정하고 동독은 서독 편입 이후 유효 지역 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흡수 통일의 가능성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원했던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를 선택한 결과는 특히 동독인들에게 많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동독인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고 열등감을 심화시킨 요인을 법률적인 편입, 경제적인 종속과 흡수에서만 찾으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소박한 발상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제 막 취득한 학위가 휴지조각이 되고, 25년 이상 그 안에서 편안히 작업할 수 있던 연구소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도 견디기 어려운 비극이었겠지만, 가장 커다란 충격과 동요는 아마도 지난 반세기 동안 그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결정해주던 신념과 규범이 통일과 더불어 무너져 버렸다는 근원적인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적 가치의 기초에 동독의 철학, m-l이 있었던 것이다. M-l의 철학은 SED의 이데올로기로서 단순히 정치 이론에 그치지 않고, 학문, 세계관까지 지배한 동독의 유일무이한 공식 철학이었다. 한편 SEDm-l 해석 독점권은 철학을 정치의 시녀로 만들어 그것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하한 신념 체계도 근본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동독의 경우는 같은 동구권이었던 러시아나 폴란드와는 달리 국가 이데올로기의 소멸과 더불어 그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거의 모든 철학적 작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양상을 보였다. 이는 통일 독일의 대학 개조 작업에서 구성 인력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철학 분야만큼 철저하게 과거의 전통과 결별한 학문 분야가 없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단절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단절 작업이 과연 얼마나 정치 논리로부터 자유로이, 그리고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 즉 동서독 철학자들 사이의 - 학문적이고 윤리적인 대결의 결과를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냐가 중요할 것이다. 앞으로 독일 철학자들에게 주어질 중요한 역사적 과제는, 일차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부분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일일 것이고, 나아가서는 철학 본래의 중요 임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체계의 생산과 비판 기능을 통해 구성원 개개인의 의식 수준과 사회통합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