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또는 정신, 마음)과 신체 (또는 물체)의 구분은 철학적인 반성 활동보다도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문제가 철학의 중심문제가 된 것은 데카르트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 양자가 서로 구분되고 대립할 뿐 아니라 실재 세계의 전체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그 이전 시대 (예컨대 고대)에도 영혼과 신체의 이분법은 존재했지만 배타적인 이분법은 아니었다. 애당초 양자의 구분이 문제가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신체, 즉 물체 가운데 생명이 있는 물체와 생명이 없는 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인간이 신체적인 죽음 이후에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인지 하는 문제, 또는 연속성 내지 자기 동일성의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도 그 계기를 마련했을 것처럼 보인다.
Homer는 영혼이 신체의 생명이고 숨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적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죽음과 더불어서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신체와 영혼의 분리와 구분은 당연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양자가 인간에게서 결합되어 있다는 것도 당연시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첫째, 분리된 영혼의 존재; 둘째, 신체와 영혼 사이의 서열; 셋째, 신체와 영혼의 결합 방식 등이었다.
1. 피타고라스는 첫째와 둘째 문제와 관련하여 육신만 죽고 영혼은 육신 없이도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영혼이 육체보다 더 가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도 이 견해를 따라 육체를 영혼의 '묘지' 내지는 '감옥'이라 불렀다. 영혼 지속설과 신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설은 플라톤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행사하게 된다. 그는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것들 중 가장 높은 부분인 to logistikon(이성적인 부분)만이 불멸하며 다른 두 부분들인 to epithymetikon(욕구적인 부분)과 to thymoeides(기개적인 부분)은 육신과 더불어 소멸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2. 원자론자와 스토아: 이들은 모든 존재자들은 신체적인 것들이며 따라서 영혼도 좀 더 섬세한 종류의 신체이거나 그것들이 결합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체와 영혼의 결합 문제 내지 그들 간의 상호작용 문제는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자의 결합에 관한 문제를 해결 불가능하다고 보고,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전제를 비판하였다. 영혼은 질료를 육체로 만들어 주는, 즉 organize하는 형식적 원리로서 육체를 유지시켜주고 움직이게 해주는데, 기본적으로 육체와 더불어 소멸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이루는 여러 능력들을 가운데 nous만큼은 불멸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어쨌든 양자의 관계 문제는 말하자면 그의 형이상학적인 관점인 ‘질료-형상’의 통일적 관계 속에서 용해되어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입장은 플라톤의 관점과 더불어서 철학사에서 큰 영향을 남긴다.
4. 플로티노스: 세계 영혼(일자, nous)으로부터 상이한 영혼들이 유출되어 나온다고 하였다. 순수한 영혼이 질료와 섞이면서(침투하면서) 개별 영혼을 지닌 존재자들이 생성되는 바, 인간은 감각의 기만을 벗어나 nous를 지향함으로써 그 질료를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일자’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5. 토마스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하게 여러 능력들 내지 힘들로 이루어진 영혼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 중 식물적, 감각적 영혼을 이루는 부분들은 사라지게 되며, 신이 부여해 준 영혼(지성적 영혼)만 불멸적인 것이라 보았다. 육체 안에 들어 있는 동안 이영혼은 식물적 활동과 감각적 활동을 모두 하지만 신체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는 그것을 수행하지 않게 된다고 보았다.
6. 데카르트: 송과선에서 영혼이 미세한 충격을 가하여 신경을 자극함으로써 신체적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정신적인 실체가 연장적인 실체와 전혀 다른 질서에 따른다는 그의 기본 가정과 양립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7. 스피노자: 하나의 동일한 실체(신, 자연)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 즉 양태들(modi)이 정신이면서 동시에 물체라는, 이른바 그의 심심 평행론(psychophysischer Parallelismus)을 주장했다.
8. N. Malebranche & A. Goeulincx의 occasionalism: 물리적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신의 개입이 일어나 그에 상응하는 정신적 사건을 발생시킨다.
9.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 모나드들 가운데 세력이 약한 모나드가 물질적인 모나드이고, 이보다 강한 모나드가 순수 정신에 가까운 모나드이므로 심심 관계의 문제는 이들 모나드들 사이의 일치에 관한 것이다. 각각의 모나드들은 서로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창이 없는 모나드!) 그것들 사이의 일치는 신이 세계를 창조 할 때 부여한 질서의 의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신의 개입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최초의 개입에서 끝난다.
10. 로크와 흄: 영혼이나 신체의 본성에 관하여 경험을 통해 알려지는 바가 거의 없어서 그것들의 상호작용 역시 무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입장. 흄은 일종의 예정 조화와 같은 질서를 자연 사물들과 우리의 관념들 사이의 질서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11. 버클리: 존재자는 단지 지각된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사유된 것에 해당하므로, 즉 정신이므로 심신 문제는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2. 프랑스 유물론자들: 모든 지각 능력, 의식 등이 물질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13. 칸트: 심신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이 실체로서의 마음과 신체를 전제하는데 반대하여, 그러한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것은 내부 감각과 외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경험적 자료들뿐이고 그것에 의해서는 물자체로서의 자아(마음)와 신체의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상 차원에 국한해 본다면, 내부적 경험 사실, 즉 의식의 진행 과정과 신체적 과정은 아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우리의 '몸 전체가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경험을 넘어서는 (인식을 넘는 차원에서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의 불멸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여긴다.
※ 심신 문제는 단순히 철학사적 문제일까? 골동품적 가치만을 가질 수 있는?
‘그렇다’고 대답 한다면 현대의 심신 이론가들의 작업은 설명하기 곤란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여전히 흥미로운 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이거나 이론적, 사변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관점에서도 중요하고 (영혼의 불멸을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자라면 살인을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수업 중에 졸 수는 없지 않는가?) 실용적인 응용 학문의 관점에서도 그럴 수 있다. 뇌신경학, 인공지능학, 심리학, 특히 인지심리학 심지어는 장기이식과 같은 응용윤리 분야에서도 그러하다.
※ 유물론적 해석의 도전
유물론은 매우 설득력, 호소력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론이다. 과학적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유물론자들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물질뿐이며 의식이나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물질적 존재에 의존하는 것으로 본다. 현대 유물론자들은 흔히 물질주의자(physicalist)로도 불리며 대개 정신 과정(mental process)과 두뇌 과정(brain p.) 사이에 동일성(논리적 동일성은 아님!)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금성’과 ‘샛별’ 사이의 동일성과 같이,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외부로부터 기술할 경우 물리적 (두뇌) 과정이, 내부(이것의 존재 자체를 인정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로부터 직접 파악할 경우 정신적 과정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스피노자의 범심론적인 세계관 내지 형이상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피노자의 자연 역시 능산적 자연으로 보면 신과 같은 창조의 원리이자 정신적 원리라 할 수 있으며, 소산적 자연의 관점으로 보면 만들어진 것, 즉 이 물질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물론이든 물질주의든 그 관점이 타당한가이다.
타당 측면: 생명체가 출현하기 이전의 우주의 상태를 가정할 수 있다면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급진적 유물론의 관점이 그 상태에 대해 타당할 것.
부당 측면: 생명체와 더불어 새로운 질서가 성립되었다. 생명체의 기원이나 생명의 모든 현상조차도 물질적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을까?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단백질의 기본 성분인 아미노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지만, 이것이 생명체의 ‘소재’ 이상인가? 분자 생물학적 관점이나, 생명체의 기본 단위를 염기(물질)의 차원에서 찾고 그 배열 내지 조합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생명현상의 모든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까?
[생물학 분야의 발달이 준 충격: 게놈 프로젝트와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19세기의 마취제 개발의 충격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브 이래 여성들이 겪어 온 산고를 경감시키는 일은 신의 영역에 대한 침범이고 자연법칙과 인간의 도리를 거역하는 일이며, 산고에 의한 모성의 발로를 방해함으로써 인간관계를 파괴한다는 시각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시험관 아기는 오늘날 거의 아무런 이견 없이 일반화되었다. 당시는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물질’ 개념 자체가 지닌 애매성: 양자 역학의 등장 이래 고전적 ‘물질’ 개념 (특정한 크기의 고정적인 입자를 기본 단위로 한다는)의 동요 내지 붕괴가 일어남. 유물론자들은 물질만이 참으로 실재한다(real)고 하지만, 그 ‘실재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껏해야 그 기본 단위가 일반적인 경험 세계에 간접적으로 주는 어떤 영향력을 통해 그 실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의미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이점을 인정해야만 한다면, 의식 내지 정신적 과정, 더 나아가 그것의 산물로 간주되는 것(이론적 세계, 상상·예술 세계, 수나 논리적 세계 내지 관계 역시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K. R. Popper). 더구나 이것들 중 어떤 것은 정신이 만들어 낸다기보다 발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들이다. 수, 논리 세계, 과학적 이론들의 세계 등.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하든 말든 자신들만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그것들을 우리 자신의 두뇌의 어떤 성향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유물론자들의 주장을 일관되게 적용하자면, 그들의 이론이나 주장도 결국 그들 자신의 자아가 주체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 두뇌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 성분이 그 성향을 표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셈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인간 두뇌 (물질 과정으로서)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물질적 과정으로부터 정신·의식 과정으로의 일방적인 인과 관계만을 상정하려는 유물론적 태도를 근본적으로 교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