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응급한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면, 내면적으로뿐만 아니라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반응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소진과 번아웃은 매우 강력한 스승이 될 수 있다. 소진과 번아웃은 여전히 우리가 그것에 놀라곤 하지만, 분명 신체적이자 심리적인 과정이다. 특히 의료 현장에서는 이 점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통받는 신체들과 함께 일하고 있고, 그 고통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몸에도 흡수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적 반응 역시 우리 몸을 통해 흐르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신체상으로도 드러나게 된다. 고통과 온전히 함께하는 것은 신체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훈련하여 감정적 반응에 대처할 수 있을지를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단지 “참아라”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대부분의 의료 분야에서 교육받을 때나 그 이후에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조언이다. 그리고 심리적 차원만 탐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생리적 역학도 존재한다. 도덕적 고뇌와 관련된 소진과 번아웃을 깊이 있게 다루고 그리하여 변형적인 치유를 이끌어내려면 그 과정에 신체적인 대비 작업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
이제, 환자의 취약성과 그것에 대한 치유자의 반응으로 시작하는 복잡한 치유의 춤을 상상해 보자. 이 춤은 선물, 역량, 그리고 상처를 포함하고 있는 춤이다. 그 가장 발달된 형태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하면서 인간의 방대한 취약성과 고통, 그리고 연민과 존재감을 하나의 공동의 움직임 속에서 포용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를 수 있다. 나에게 치유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란 바로 그런 것이다. 즉,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교차하는 그 균형의 지점이 바로 중심축이다. ...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로 선택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특권 중 하나는, 그 중심축의 지점에 함께할 수 있다는 초대이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세상의 한계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 경험의 전 범위를 파악할 수 있는 곳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엄청나게 직접적이고, 솔직하며,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순간에 함께 존재하게 된다. 호스피스 간호사인 나의 친구 프리실라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호스피스 일을 하는 이유? 거기서는 헛소리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지. 넌 완전히 그곳에 있어야 [즉, 몰입해야] 하고, 진실을 말해야만 하거든.”(I do hospice work because there’s no time for bullshit. You have to be fully there; and you have to speak the truth.) 극단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이들은, 한 의사가 묘사한 것처럼, “온 세상이 사라지고, 오직 당신과 환자만 남게 되는”(The whole world falls away. It’s you and the patient there together.) 그런 순간들을 인지하게 된다고 한다. 시간마저도 그 강렬한 유대감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서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들을 위해서다.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의 취약함과 고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
이상하다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취약성을 더 키우고, 스스로를 더 개방하여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고통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기 위해 그 일을 한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것에 의해 개방됨으로써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지만, 봉사에서 발견하게 되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결국, 질병과 고통은 존재하는 것,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불가피한 일부다.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상처를 경험한다. ...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통의 장이 곧 치유의 장이라는 진실을 자신의 내면과 몸 속에서 깊이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란 취약성, 고립, 고통이며, 이는 모두 상호적 의존성과 상호적 존재의 측면들(aspects of interconnection and interbeing)이다. 반면 치유는 성장, 나눔, 역량인데, 이 또한 상호적 의존성과 상호적 존재의 측면들이다. 치유의 소명에서 이어지는 여섯 국면들 그 각각의 도전과 그것에 대한 개방은,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것이다. 즉, 상처를 치유하고 고치는 것, 상처로 인해 무력해지는 것, 상처로부터 배우고, 상처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는 것을 말한다. 이는 더 깊은 수준에서, 치유와 고통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어느 쪽이 우세한가? 두 가지를 어떻게 함께 품을 수 있는가? ...
소명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연민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과 그것이 제공하는 자원에 대한 감각이 점점 더 커질 수 있다. 돌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과 그 돌파를 준비시키는 소진을, 우리의 역량이 확장되는, 고통스럽지만 궁극적으로는 보람 있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분명히 아픔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확장되고 있으며, 더 극심한 고통을 마주하더라도 연민의 태도와 균형 잡힌 상태로, 온전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로부터 끔찍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도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갈등과 고통, 심지어 고뇌가 우리 주변을 휘돌더라도 일관되게 고요한 중심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우리의 삶에서 도전적이거나 고통스러운 부분들을 벽으로 차단하지 않았을 때, 그것들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 함께 존재하는 일부가 된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함께한다. 그리고 그 부분들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수준과 범위의 연결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David Schenck & Scott Neely, Into the Field of Suffering. Finding the Other Side of Burnout, Oxford University Press 202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