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샤를리 엡도와 표현(비판)의 자유 or 불필요한 독설

Kant 2015. 1. 11. 18:47

만약에 인식 행위가 전적으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면, 즉 ‘총체적 오류’와 같은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내 자신의 인식도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자의 인식도 진위(眞僞)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 안 된다. 총체적 오류란, 오류를 저지르는 자 스스로에 의해 도대체 더 이상 오류로서 파악될 수 없는, 말하자면 밀폐된hermetisch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 오류는 또한 항상 내 자신의 오류일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진리를 인식했다고 여기는 나의 신념은 결국 다만 “많은 통찰을 획득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꾸는 것”(인간 탐구, 34쪽), 즉 인식에 관한 환상 그 자체일 수 있다. 확신하려는 모든 시도는 따라서 실제로는 공허한 기도일 뿐일 것이고, 확실한 언명이란 전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총체적 오류에 관한 주장도 결국 스스로 폐기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논증은 칸트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반복되고 있다. 1770년대의 논리학 강의, 예를 들면 이른바 블롬베르크 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되고 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전적으로 틀리게 판단할 수 있다고 할 경우, 이러한 것은 또한 그에게 있어서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의 지성과 이성의 전반적인 사용에 있어 다만 매우 불확실하게 될 것이다”(XXIV 94).

 

이와 매우 유사하게 칸트는 같은 시기에 행해진 논리학 강의에서 다음과 말하고 있다:

 

“인간이 전적으로 틀리게 판단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지성은 자신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지성을 신뢰할 수도 그리고 의지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오류가 있게 되는 모든 경우에는 무엇인가 특별하고 기이한 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기보다 밀도가 높은[무거운] 물체가 공기 중에서 상승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 물리학 전체가 불확실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우리가 지성이 자신의 법칙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인식도 불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XXIV 395).

 

 

이것이, 칸트가 일생동안 그것도 종종 매우 가혹하게 내적 경험, 지각, 감정, 의식, 관심, 관점과 같은 것에, 간단히 말하면 어떤 형태이건 “사적(私的) 판단”(XXIV 396)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최종 근거를 두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이론에 반대한 이유 중 하나 이다. 이러한 모든 판단들은 최종 결론에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확실한 인식에 관한 완전한 포기로 이어지고, 따라서 결국에는 자신의 주장도 반격을 당하게 된다. 만약에 인간에게 원칙에 해당하는 인식 능력이 이미 부여되어 있지 않다면, 즉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인간 이성과 같은 것이 없다면,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사적 판단에 근거를 둔 이론들은 순환 논증에 빠지지 않은 채로 그 근거를 물을 수도 없고 정당화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이론들이 실제로 가능한 경우란, 이 이론들이 그 결과를 의식할 수도 없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힘들 때뿐이다. 칸트는 이러한 배타성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자만심을 날카롭게 조롱한다:

 

“자신만이 모든 참된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은 전적으로 그러한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배타적 판단”은 “자기 자신만을 높이 평가하고 자기 자신 외에는 모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썩어빠질 자만일 뿐이다. // 이러한 자만에 빠져있는 자들은, 다른 모든 것이 이집트의 어둠 속에 잠겨 있음에도 그들의 머리 속에서만 고센Gosen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XXIV 94).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부정적인 논증만으로 결코 논의를 끝내지는 않는다. 이러한 부정적인 논증은 사실 항상 [그 확실성에 대한] 총체적 회의의 여지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논증과 더불어 칸트는 그의 오류론을 근거 지우고 그 토대를 마련하는 일련의 관찰과 분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의 관찰과 분석에 의하면 인간은, 모든 이론적 정초에 앞서, 심지어는 자신의 이론에 반대되는 것들에 있어서도 그리고 실제의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이미 원칙에 해당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과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인식과 진리에 관한 신념은 인간에게서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심지어는 극단적 회의론자도, 실천적 행동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총체적 오류의 이론적 수용을 거부하고 있다.

(…)

 

다르게 생각하는 자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그의 공감을 획득하려는 모든 시도 역시 그가 원리적으로 인식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인간을 다만 그 사람의 건강한 지성의 여력(餘力)에 의해 설득시킬 수 있다. 만약 내가 그에게 이러한 지성이 없다고 부인한다면, 그와 더불어 이성적 숙고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단편 1578; XVI 16).

 

 “그 누구도, 그가 지닌 지성의 여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가르칠 수 없다”(XXIV 85).

 

 “만약에 다른 사람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한다면, 왜 그와 논쟁을 하는가? 미친 자와 이성적 논쟁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XXIV 397).

 


오류론은 칸트에 있어 매우 근본적인 숙고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에 누가 보아도 명백한 실천적 귀결들이 있게 된다. 즉 이 오류론으로부터, 진지하게 앎과 진리를 문제삼고 있는 모든 사람이 결코 등한히 해서는 안될 중요한 행위 규칙들이 성립된다. 여기서 미리 밝힌다면 이것들은 바로 계몽에서 오류론과 관련해서 거듭 따르도록 명령되고 또 요구되고 있는 규칙들 내지는 “법칙들”이다. 


 칸트에 있어 이 규칙 내지 법칙들을 내용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은, 일단 도덕적인 영역과 같은 곳에서 행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의 정당화하는 작업은 그에게 있어 총체적 오류의 불가능성에 관한 성찰에 그 직접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

 

첫 번째, 가장 특징적인 행위 규칙은, 칸트가 매우 강조하고 있는바, 다르게 생각하는 자의 견해에 대한 신중함과 조심성의 준칙이다. 칸트는 분명한 어조로 “방법에 있어서는 상냥하게, 사태에 있어서는 강력하게”(단편 618; XV 267)라는 오래된 ‘고전적’ 규칙을 언급하고 있다.

비판이 필연적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불필요한 독설을 삼가는 것이 그리고 공동 작업의 기반을 “신랄한” 논박을 통해 파괴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까지의 논의와 직접 관련하여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이야기했듯이 모든 판단은 진리적인 어떤 것 없이는 행해지지 않기에, 이로부터 우리가 다른 사람이 내린 판단의 ... 오류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매우 완화시켜야만 할 것이라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특정한 원리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항상 논쟁한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항상 반대한다면, 그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그 반대로 우리는 “서로 공동으로 사이좋게 서로를 지지해주어야 하며 그래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항상 반대하여 행동하지 않아야만 한다. // 따라서 어떤 것을 반박하는 대신에, 그것에 실제로 진리가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조사해야만 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보충해야만 하는 지를 계속해서 숙고하기 위해서이며, 그런 다음 “오류를 저지르는 자에게 그가 매우 쉽게 그리고 잘 틀리는 것이 어째서 전혀 놀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도록 신랄하지 않게 그리고 호의적인 방식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XXIV 85).


위의 명제들이 지닌 중요한 가치는, 이 명제들을 오류와 비판에 관한 전혀 다른 종류의 견해들과 대비시켜보면, 비로소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한 견해로 이를테면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을 들 수 있다:

 

비판은 “해부용 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적이다. 비판은 적을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멸시키고자 한다.”

 

“비판은 더 이상 자체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수단으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비판의 본질적인 정열을 분노이고, 비판의 본질적인 일은 고발이다.”

 

“이러한 내용과 관계하는 비판은 격투에서의 비판이다. 그리고 격투에서는 적이 고귀한 가문인지 동등한 가문인지 또는 이해관계가 있는 자인지는 상관없고 적을 맞히는 것이 문제가 된다.”

 

 

두 번째, 보다 내용적인 측면을 고려한 규칙 - 칸트 이율배반론의 생성에서 이 규칙이 차지하는 의미는 여기서 다만 극히 간략하게 언급되어야만 할 것이다 - 은 다르게 생각하는 자의 인식 노력에 대해 마음을 열라는 칸트의 준칙이다. 여기서는 결코 단순한 박애주의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충분히 이해된 내 자신의 인식 관심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지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논리적” 의무(XXIV 397), 즉 반대되는 입장에서조차 진리의 계기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의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규칙도 직접적으로 총체적 오류의 불가능성에 관한 성찰에서 기인한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러니까 어떤 판단도 전적으로 틀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진리의 황금을 허위의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내서 분리해야지 둘 다를 동시에 내 던져버려서는 안 된다. // 오류 안에 뒤섞어져 있는 진리를 같이 내던져 버리게 되면 진리의 성장은 심하게 억압된다”(XXIV 396). 아디케스의 연대 추정에 의하면 칸트의 초기 메모들 중 하나인 단편 2187에는 다음과 같은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 편 모두 진리를 향한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견해들간의 논쟁에 있어 상대편이 틀린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만큼이나 그가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만 한다.” “공평한 검사가 확실한 곳에서는, 적어도 몇몇 진리에 관한 추측은 개연적이다”(XVI 263).

 

단편 2213은 이제껏 언급된 양 규칙들을 간결한 형태로 요약하고 있다:

 

“진리에 관한 우리의 모든 논쟁은 친구들 사이에 있어서와 같이 공동의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따라서 협력하는 식이어야만 하지, 배타적이거나 이기적 또는 자기 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상대편의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XVI 273).


이러한 준칙이 지니는 철학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의미는 명백하다. 바로 두 번째 규칙은 또한 계몽, 비당파성, 관대성에 관한 천박한 이해를 피하게 하는데, 즉 그것들을 단순한 태도 또는 마음가짐의 일로서 오해하는 것을 없애는데 특히 알맞다. 이 규칙은 인식론적 토대, 즉 (페더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와 인간 오성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한 “법칙들” - 이것들에 그러한 태도가 그 기반을 두고 있다 - 을 드러내고 있다:

 

다르게 생각하는 자의 견해는 다만 참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으로서 - 그리 하는 것이 나에게는 어렵겠지만 - 그의 오류에 관해서 조차도 존경되어야만 하고 또는 적어도 ‘관대히 다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하는 자의 견해는 오히려 무엇보다도, 내가 내 자신의 사고의 좁은 시야와 편견을 극복하고 전체적인 그리고 온전한 진리에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그 무엇이다. 만일 내가 반대되는 입장에서조차 진리의 계기를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다면, 나는 보편적 인간 이성의 “보다 큰 재산”(XXIII 195)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점차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계몽의 전개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에 있어 참된지를”(XVI 263) 인식하기 위해서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마치 괄호에 묶여 있는 것과 같은 판단의 주관적인 사적(私的) 조건들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관점”(판단력 비판, B 159)에 서는 것이 필연적이다. 바로 여기서 칸트에 있어 세 번째 중요한 행위 규칙이 산출된다. 그것은 그에 의해 거듭 되풀이해서 이야기되는 “스스로 ... 모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자유로운”(인간학, B 167) 또는 “넓은 사고 방식”(판단력 비판, B 159)이다. 

 

이것은 예를 들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저서를 평가할 때 “저자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저서에 담겨있는 진리의 등급을 오류로부터 분리해내고 그래서 진리를 증대시키는 것을 시도한다. 이것은 논리적이며 도덕적인 의무이다”(XXIV 397). 어느 정도로 칸트가 진지하게 이 “불변의 명령”(인간학, B 166)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아마도 헤르쯔Markus Herz에게 1771년 6월 7일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내가 이성적인 논박을 반박할 수 있는 것으로 얕잡아보지 않으며 오히려 이 논박을 나의 판단에서 항상 숙고하고, 이 논박에 내가 마음에 들어했던 모든 선입견을 허물어뜨리는 정당함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항상 나의 판단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중립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전 것보다는 나은 제3의 것을 획득하기를 희망합니다”(Nr. 67; X 122). 그가 이러한 준칙을 준수하지 않았더라면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규칙은 항상 자신의 오류를 함께 계산하려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하려는 용의(用意)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자신의 명예에 대한 단념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의 중요한 시금석이다”(XXIV 397).

 

유명한 자서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단편 5116은 칸트 자신의 사고에서 이 준칙이 어느 정도로 강하게 작용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것이 유효하다. 즉 이 준칙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칸트는 이 단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누군가 진정으로 진지하게 진리를 발견하려고 숙고한다면, 그는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숙고 결과를, 이것이 학문에의 공헌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보호하지 않는다. 그는 배운 것과 스스로 생각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비판에 종속시킨다”(XVIII 95).

 

 

 

N. 힌스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중에서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저자
노르베르트 힌스케 지음
출판사
이학사 | 2004-03-2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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