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2 (홍상희,박혜영 역)

Kant 2022. 8. 17. 17:41

노인의 지위는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러므로 노인 자신은 결코 자신의 지위 문제에서 아무런 진전도 가져오지 못한다. 흑인의 문제는 백인들의 문제이며, 여성의 문제는 남성들의 문제라고 사람들은 말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는 평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흑인들은 억압에 대항해 싸운다. 그러나 노인들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노인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의 문제이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노년에 대한 사색을 했으나, 둘은 서로 상반된 결론에 도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 속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경험이 진보의 요인이 아니라 쇠퇴의 요인이라는 생각이다. 노인이란 길고 긴 인생 내내 잘못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아직 그가 저지른 만큼 많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젊은 사람들보다 우월하지 못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은 노년에 보내는 경고 같다. 즉, 노화의 양면 가능성! = 노년은 추하거나 품위 있거나 둘 중 하나!] ...

 

키케로의 노년론의 역사적 배경: 원로원의 권력이 군인, 즉 젊은 남자들에게 넘어가는 상황에서 노인에 대한 옹호론을 쓴 것. ...

 

우리는 어떤 이해관계가 솔론이나 플라톤, 키케로나 세네카로 하여금 노년에 대해 이러한 찬사를 택하게 했는가를 보았다.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이 찬사들 속에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이 나서 세기에 세기를 거듭하여 이런 찬사들을 되풀이해왔다. 학자들의 객관적인 관점은 이와 매우 다르다.

키케로는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들을 ‘편견’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노인을 증오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 도덕가들은 노인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다. 노인들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인들을 어둡게 그려놓았다. ...

 

6세기에 서고트의 법전은 그 조항[살해당한 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에 관한]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세 어린이는 금화 60전 / 15~20세 소년은 금화 150전 / 20~50세 남자는 금화 300 / 50~65세 남자는 금화 200전 / 65세 이상 남자는 금화 100 / 15~40세 여자는 금화 250전 / 45~60세 여자는 금화 200전 ...

 

몽테뉴는 노년을 멸시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노년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

그는 이렇게 쓴다.

오래전부터 나는 서서히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조금도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지금의 나와 이후의 나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어느 때에 내가 더 나을까? 나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발전해나가기만 한다면 늙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 그것은 비틀거리며 어지러운 술꾼의 불안정한 움직임, 혹은 바람이 제멋대로 조정하는 막대기일 뿐이다. …

그만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 이성은 약해지고 악화된 것이다. 더구나 나는 내 이성이 더 훌륭해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제 내 이성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못하며, 그 이성에는 더 이상 새로운 명석함이 없음을 나는 안다. ...

 

노년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이 신랄하게 써내려간 이 명문들을 30세 때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몽테뉴의 위대함은 그가 능력이 감소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순간 최고의 달한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없었더라면 이런 위대함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자기 만족은 능력을 감퇴시킨다. 몽테뉴는 늙어가면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가 발전을 했다면 그것은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그의 태도가 점점 더 비판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

 

위폐 제조자들에서 지드는 늙은 라 페루즈로 하여금 이렇게 이야기하게 한다. “어째서 책 속에서는 노인들의 대한 문제를 좀체로 다루지 않는 것일까? 노인들은 그 문제를 쓸 능력이 없고, 젊을 때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 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현대 사회에서 노년이 소외되는 이유: 공모성과 상호성:

본질적으로 상호성은 내가 나의 목적론적 차원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의 차원을 포착하기를 요구한다. 노인은 예외없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다. 그는 활동이 아니라 다만 현존으로 정의된다. 시간은 그를 하나의 목표―죽음―로 이끈다. 그러나 이 목표는 그의 목표가 아니며 또한 하나의 계획으로 설정된 것도 아니다. 노인이 활동적인 개체들에게 그 자신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이상한 종’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노년이 생물학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일종의 이 자기 방어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노인을 멀리 내쫓는다. 그러나 이런 추방은 모든 시도 속에 내재하는 원칙적인 공모성이 노인의 경우에는 전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

 

성인들이 노인을 대하는 실제 태도에는 이중적인 특성이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공식적인 윤리의 순응한다. 공식 윤리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몇 세기간에 강화되어왔으며 성인에게 노인들의 대한 존경을 강요한다. 그러나 노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또 노인들에게 자신이 쇠약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 성인들에게는 유리했다. 성인인 아들은 아버지가 정신적, 육체적 결핍과 서투름을 느끼도록 악착같이 설득한다. 그러면 노인은 그에게 모든 일에 대한 지시권을 물려주고, 잔소리도 덜하게 되며, 자신의 소극적인 역할을 참고 따르게 된다. 만약 여론의 압력이 늙은 부모를 도와주라고 강요하면 아들은 부모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라는 뜻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들 생각에 부모가 더 이상 혼자서 행동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될수록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조심성도 덜하게 될 것이다. ...

 

예를 들면 양로원에 임시로 가 있도록 설득해서는 그를 영원히 버려둔다. 성인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살고 있는 여자나 청소년들은 노인들보다 훨씬 자기 방어력이 강하다. 부인은 봉사를 한다. 잠자리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한다. 청소년은 급료를 요구할 수 있는 어른이 될 것이다. 노인은 세태와 죽음을 향하여 치달을 뿐이다. 그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야말로 거추장스러운 무용지물이다. 사람들은 노인을 하찮은 존재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어머니에 대하여 딸들이 느끼는 감정은 흔히 원한의 감정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지는 태도와 같다. 애정에 있어서 반대 감정의 양립이 가장 적게 나타나는 것은 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아들이나 딸은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로해지면 그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헌신한다. 그러나 아들이나 딸이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배우자가 이런 관대함을 제한하도록 종종 영향력을 행사한다. ...

 

고대부터 수명은 끊임없이 늘어왔다. 로마 사람들이 평균 수명은 18세였고, 17세기에는 25세였다. 당시 ‘아들의 평균연령’은 아버지가 죽을 당시 14세였다. … 100명의 아이들 중 25명은 1세에 전에 죽었고, 나머지 25명은 20세 전에, 그리고 25명은 20세에서 45세 사이에 죽었으며, 10여 명 정도만 60세까지 살았다. … 18세기에 프랑스의 평균 수명은 30세였다. ...

 

상황은 벨기에나 영국, 서독,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위선적인 품위가 자본주의 사회로 하여금 생산력 없이 소모만 하는 ‘쓸모없는 입’을 제거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꼭 죽지 않을 만큼의 도움밖에는 주지 않는다. “죽기에는 너무 많고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금액이지요”라고 한 퇴직 연금자는 서글프게 말했다. ...

 

오늘날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는 노인들끼리만 함께 사는 것이 그들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것이다. 빅토리아 플라자[산 안토니오에 있는 일종의 시니어 타운 빌딩]의 성공은 그 위치가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래서 가족들과 단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노인들만 살고 있는 ‘태양의 도시’들이 여럿 있다 부동산 개발업자, 행정당국들은 노인들이 이렇게 자기들끼리 사는 것을 매우 만족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익성이 큰 사업이며 그들로서는 자기들 상품을 칭찬하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1964년에 이런 도시들 중 하나를 대상으로 뉴욕지에 취재 기사를 썼던 캘빈 트릴린Calvin Trillin은 그곳에서의 ‘행복’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것 같다.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배수진을 치고 많은 돈을 투자하여 그 집을 샀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차피 거기에 머물러야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럭저럭 만족을 찾는다. 그러나 다시 살아야 할 경우에도 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

 

자신의 과거, 주위 사람들과 차단되고, 또 흔히 유니폼을 입게 되면 노인은 모든 개성을 상실, 이제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게 된다. ...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재의 그로 만들어 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이란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든, 혹은 운명적으로 강요당해서이든 퇴직한다는 것,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헤밍웨이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 자살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일이 자기 자신의 성취일 때, 일을 그만 둔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 일이 일종의 제약이었을 경우,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도 해방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에는 거의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일이란 예속이며 피곤인 동시에 관심의 원천이며 균형의 요인이고, 우리를 사회에 통합시켜주는 요인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퇴직에도 반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퇴직을 긴 휴가로 혹은 폐품 처리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

 

남자는 자신의 일과 봉급으로 자기 신분을 정의한다. 그러므로 그는 퇴직과 더불어 자기 신분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전기 기술자는 이제 더 이상 기술자가 아니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퇴직자의 역할, 그것은 더 이상 아무 역할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부르제스는 말한다. 그러므로 퇴직은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 자신의 존엄성과 자기 현실을 상실하는 것이다. ...

 

퇴직자들은 이제 살림을 꾸려나가기에 충분한 돈이 없다. 그는 아내에게 의존하고, 자식들에게 의존한다. 그는 자식[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고, 왜소해졌다고 느낀다. 그는 낙오된다. 집안에서 잔일이라도 하려고 애쓰지만, 그럴 경우 흔히 아내는 그를 귀찮게 생각하고, 차라리 산책이나 나가라고 내보낸다. 어떤 부인은 조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 남편이 있다는 건 정말 견딜 수 없어요. 뭐든지 내가 하는 일마다 걱정을 하고 질문을 해대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일을 그만두게 되면 이런 곳에서는 정말 남자들이 할 일이 없지요. 정원이라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요. 남자들은 일을 그만두자마자 죽어버려요. 나는 남편이 집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

일반적으로 남편은 자신이 귀찮은 존재라고 느낀다. 남편은 아내 앞에서 모욕을 당한다. 현대적인 삶에 더 잘 적응하며, 사회적 지위 또한 더 우위에 있는 아들들 앞에서도 종종 모욕을 당한다. 집안의 폭군이 하루 사이에 너무나 소심해져서 빵 한 쪽도 허락을 얻지 않고는 못 먹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울증에 빠진다. ...

 

나는 문학 작품 속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자기 노년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여자들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아름다운 늙은 여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매력적인 노부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잘생긴 늙은 남자에게는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