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노화의 시간관과 서사적 정체성

Kant 2022. 8. 3. 14:45

노화의 과정이 출생 이후의 시간[연령]에 의해서만 측정될 수는 없다. 삶의 변화와 그것에 대한 시간적 해석도 생명을 지닌 것이며, 이 같은 시간의 내적 차원도 인간의 노화에서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차이는 Heidegger(1996)가 사실성(Tatsächlichkeit; factuality)현사실성(Faktizität; facticity)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구별과 관련이 있다. 전자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여러 특성들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 몸으로 태어나며, 성별, 체중, 피부색 또는 나이 등과 같은, 특정한 특성들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또 가족, 문화, 교육, 사회 경제적 상황 또는 건강 관리에 대한 접근성 등, 다양한 배경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노화에 관한 경험적 연구에서 기술되고, 분류되고, 분석될 수 있다. 사실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사실성은 이러한 특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경험적 지표임을 상기시켜 준다. 즉, 고유한 인격체들이 존재하는 방식들을 나타내며, 또 그 사람들을 특성들과 상황에 관련시킨다. 예컨대 흑인이고, 여성이며, 17세라는 등의 사실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나타낸다. 사실성과 현사실성 사이의 구별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것 외에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자신만의 의미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표지들 중 하나이며 노화에 대한 접근 방식들을 비판할 때 주요 초점이 된다.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들이 경험하거나 행하는 모든 것이 시간 단위로 측정될 수는 있지만, 그 사람들은 또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고, 그들의 삶이 시간에 따라 조직되고 분류되는 방식과 관련을 맺는다. 이것을 인정하려면 측정 가능한 시간과는 다른 시간적 관점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고려에 의거하여 나는 측정 가능한 시간과 생명을 지닌 시간 사이의 구분(distinctions between metric time and lived time)을 아래와 같이 제안한다(Hoy 2012).

1. 측정 가능한 시간은 과학적 패러다임들 안에 구현되어 있다. 이에 비해 생명을 지닌 시간은 삶의 방식들 안에 구현되어 있다.

2. 측정 가능한 시간은 시계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에 단일한 리듬을 가지며, 생명을 지닌 시간은 상이한 리듬들을 가진다.

3. 측정 가능한 시간에 따르면 시간은 셀 수 있고 날짜를 지정할 수 있는 점과 같은 순간들의 무한한 연속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더 일찍, 나중 또는 동시에 일어났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과거, 현재 또는 미래로 해석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McTaggart 1908; Ricœur 1988). 더욱이 은퇴를 한다든지, 조부모가 된다든지, 배우자를 잃는 등과 같이 중요한 변화들이나 전환점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예상되는 미래 그리고 관련성을 지닌 과거까지도 변화시킨다.

4. 에딩턴의 Arrow of Time(1928/2014) 이래 논의되어 온 물리 법칙의 시간-무관성이나 심지어 시간의 가역성과는 대조적으로, 생명을 지닌 시간은 비가역적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 또는 이미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

5. 마지막으로, 시계 시간은 동일한 연속체로서 아토초(100경분의 1초)에서부터 수십억 년으로 자유롭게 전환할 수 있지만, 인간은 유한한 시간 범위 안의 삶에 직면해야 한다. 즉, 제한된 양의, 생명을 지닌 시간의 되돌릴 수 없는 경과에 직면해야 한다(Baars 2016).

하이데거는 심지어 “인간의 삶은 시간 속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다”(Heidegger 2003, 169)라고 적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으로 존재할(are)뿐만 아니라, 또는 그저 시간을 살아갈(living)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구성할 수 없는 시간적(진화적 또는 역사적) 차원에 제한 받으며(within) 산다는 의미에서도 시간 속에 살고 있다(Blumenberg 1986; Ricœur 1988). 우리는 또한 일련의 세대들을 이어주는 작은 연결 고리이면서 또 동시에 삶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매체이기도 하다. 이 같은 두 가지 시간적 관점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

측정 가능 시간과 경험된 시간 사이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확립하는 일은 어렵기로 악명 높았다. 한편으로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이 없다면 시간 측정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간 경험이 직접적인 인간 경험의 범위를 능가하는 (우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차원의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시간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생명을 지닌 시간 중 어느 것이 근본적인 것인지를 놓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2000년 이상이나 해결되지 않은 논쟁이 이어져 왔다(Ricœur 1988; Baars 2012).

Ricœur에 따르면 이 같은 상황은 시간의 기본적인 아포리아를 반영한다. 측정 가능한 시간과 생명을 지닌 시간은 서로 환원될 수 없다. 그들은 서로를 전제하지만 또한 서로를 배제하거나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이 아포리아에 대한 이론적인 해결책이 주어질 가능성이 희박할 수 있으나, 상호 긴장 관계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시간적 관점들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쾨르는 서사가 지니는 매개적 중요성(the intermediary importance of narrative)을 지적했다.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리쾨르가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적 형상화를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거기서 플롯은 혼란스러운 사건들과 행동들의 잡다함으로 구성되며, 독자가 따라갈 수 있고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

리쾨르의 접근 방식에서 강조점은 바로 서사가 가지는 시간적 성격과 외부 세계를 지시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노화를 더 잘 이해하는 것과 관련성이 매우 높은 특성이다. 이 접근 방식을 정교화하면서 형상화(figuration) 개념이 전형상화(pre-figuration) 및 재형상화(re-figuration) 개념과 만난다.

전형상화(1)는 아무런 설명이 없이도 독자가 어떻게든 이해한 행위와 경험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이해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손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공유된 맥락을 전제한다. 우리는 문맥에 따라 그가 제안에 찬성하는지, 택시를 잡는지, 친구에게 인사하는지, 경매에 입찰하는지 등을 이해한다. 이와 아주 유사하게, 우리는 특정 경험을 일반적으로 노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예컨대 자녀가 부모가 되는 것을 보거나, 젊은 시절의 어리석음을 회상하거나,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한탄하는 등과 같은 경험을 말한다. 이러한 공유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텍스트 자체가 노화를 선언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노화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러한 전형상화적 측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다”(시학 50b3), “행동의 모방이 플롯이다”(시학 50a1)라는 언급으로 이미 포착했던 것이다. 플롯의 구성은 행위가 일어나는 세계에 대한 사전 이해에 기반한다. 즉, 그 세계의 의미 있는 구조들, 상징적 자원들 그리고 시간적 성격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형상화(2)는 Ricœur가 찾고 있는 매개화를 낳게 될 플롯 구성 행위(the act of emplotment)를 뜻한다. 서사의 놀라운 측면 중 하나는 가장 다양한 사건들, 행동들 및 그것들에 대한 평가들을, 느슨하지만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통합하는 능력이다. 플롯을 통해 사건들이야기가 상호 연결되므로, 다른 사건들이나 해석들이 도입되면 이야기가 바뀌게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동일한 사건이 다른 서사에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때 요소들은 다른 강조점을 가지게 되거나 또는 다른 관점에서 다르게 배열된다.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들은 거의 명백한 사실들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상황, 의도, 행위 및 경험이 복잡하게 상호 연관된 패턴인 경우가 많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서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정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서사들도 상황, 경험 그리고 평가가 지닌 잠재적인 풍요로움을 매우 공들여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측정 가능한 시간도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미미한 역할만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떤 방문이나 장기간의 작업이 어떠했냐고 물었는데, 만약 그 사람이 우리에게 서로 관련 없는 사건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상세하게 나열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 단위에 의한 측정은 무엇을 보고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못한다. 서사의 통합적인 능력은 그것이 측정 가능 시간을 대체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측정 가능 시간 또는 연령의 중요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이야기의 맥락 내에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끝부분은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 그 구조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가 이야기의 끝부분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사건의 의미를 이야기의 전체에 비추어서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시간적 특성들이 추가된다. 과거에서 미래로 사건들을 따라가는 대신, 우리는 처음의 끝을 읽거나 [시작된 줄거리가 어떻게 끝을 맺는지를 이해하게 되거나] 시간적 상호 관계의 다른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적 전환을 통해 우리는 리쾨르가 재형상화(3)라고 부르는 것을―이야기를 읽거나 듣고 그 의미를 흡수하는 행위를 의미하는―만난다. Gadamer(2005)의 관점으로는 이것을 지평들의 융합―특히 가능한 경험의 지평을 여는 것으로서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의 융합―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를 재구성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험 세계를 펼쳐 보이는 텍스트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때 경험은 읽는 행위를 통해 독자의 세계를 재형상화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서사가 세계를 다시 개방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한편으로는 항상 이미 서사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 자체를 여전히 서사에 대한 탐구(a quest)로도 볼 수 있다고 리쾨르는 주장한다. 경험은 영구적인 선서사적 성질(a permanent pre-narrative quality)을 가지고 있다. 파편적인 경험들과 혼란스러운 상황이 명료화하고 통합하는 서사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 인간의 삶이 서술될 필요가 있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사를 이야기한다(Ricœur 1991, 75). 이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말에 대한 하나의 반향이다.

고령자는 영구적인 본질에 준하는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서사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온 경험의 의미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서사적인 플롯 구성을 통해서, 연결되지 않은 사건들이나 정보의 작은 조각들로 이뤄진 의미 있는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 형상화는 삶의 이야기에 통합되어야 하는 새로운 질문들과 우발적인 사건들에 의해 계속 도전을 받기 때문에 잠정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자기 이해 또는 자기 해석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로서 노화는, 서사에서 탁월한 형태의 매개화와 명료화(mediation and articulation)를 발견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인상 깊었던 다양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이야기나 비유들, 노인학적, 문학적 또는 영성적 서사들을 활용하게 된다. 그러한 서사들은 중요한 상황들이나 삶의 사건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제안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자아는, 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작가이자 독자가 되는 서사적 형상화를 성찰하며 적용할 때 재형상화된다.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이 모범적으로 수행했던 도전이다. 자아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적 자기 질문의 서사적 형식을 통해 성찰된 삶의 열매로 출현하게 된다. 하나 이상의 이야기들이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인간의 삶은 한 사람의 삶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사적 정체성은 해답을 표시하는 이름인 동시에 문제를 표시하는 이름이기도 하다”(Ricœur 1988, 249)라는 Ricœur의 관찰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는 파편 조각들이나 참을 수 없는 이야기 대신, 합당하게 일관적이고 또 수용 가능한 이야기를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Jan Baars, “Living in a Temporal Perspective. Aging Between Metric and Narrative Time”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