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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가 성공하려면..

Kant 2007. 12. 29. 17:34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실용주의를 등소평의 실용주의와 비교하는 칼럼을 읽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2/28/2007122801057.html)

문화혁명이 끝나고 1978년 말 권력을 장악한 등소평, 호요방 등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의 좌경적 착오’를 비판하면서 내세운 주장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다’라는 실용주의였다는 것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남쪽으로 오르든 북쪽으로 오르든 언덕만 오르면 된다” 라는 게 그들의 모토였고 그 성과가 오늘의 중국 경제란다. 유세 기간 내내 “좌파 정부 10년의 종식”을 내걸었던 한나라당의 이명박 당선자가 지난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국민은 이념이 아니라 실용주의를 선택했다”고 선언했다 한다. 남북관계를 비롯한 외교 정책에서도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실용주의적 외교”를 추진할 계획도 밝혔고.


정권이란 게 워낙 바뀔 때마다 나름대로 통치철학이란 것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고 또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벌어지기 일쑤이긴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이른바 “창조적 실용주의”라는 개념은 어쩐지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탈이념성이라든가 성장과 복지 사이의 갈등 해소 등을 표방하는 것이야 그 자체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과거 정부의 시대착오에 대한 수정의 의미 이상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실용주의 자체도 이미 정치적으로 선택(고안?)되어온 이념들 중 하나가 아닌가? 참고로 서양에서도 중국보다 앞선 1970년대 전반 이미 독일의 사민당 정권(헬무트 슈미트)이 실용주의 정부를 표방했던 적이 있다.


‘실용적’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어떤 주장이나 지식이 ‘삶에 유용하다’거나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벌써 실용주의의 한계가 드러난다. 먼저 실용주의는 자기 목적적인 가치나 입장을 대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어디로부터인가 주어져 있는, 그 중요성이나 의의가 인정된 어떤 가치나 입장을 인간의 삶 가운데서 실현하고 적용하는 태도에 관여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거나 확립되어 있는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가치, 즉 일종의 도구적 가치를 지닌 것이지 그 자체 본래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한시적으로야 (예컨대 실천력이 시대적 사명으로서 간절하게 요구되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후자의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겠다.


철학자 칸트는 실용적인 행위 원리를 “영리의 충고”(Ratschläge der Klugheit)로 보고, 이러한 원리는 행위자가 "타인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조정하는 능력"에 관여한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실용적 행위자의 근본 목적은 그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는 행복주의 윤리학을 거부하고 의무론적 윤리설을 주장한 철학자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기’보다는 ‘행복을 누릴만한 가치를 지니기’를 더 중시하며, 그 결과 그에게서는 진정한 행복이 도덕적 행위와 가치에 종속된다. 실용적 행위가 도달하고자 하는 행복은, 그 행위자가 도덕적 가치 실현을 명령하는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게 칸트 실천철학의 결론이다.


한편 20세기 미국의 실용주의적 진리설은 진리, 즉 참된 것은 ‘효율적’이라는 기준을 취한다. ‘유효하거나 효율적인 것이 참’이라는 실용주의 진리설이 내포한 문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실용주의적 진리 기준보다는 ‘참된 것은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실재나 사실에 대한 어떤 주장이 아무리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그 주장의 진실성은 얼마든지 우연의 소산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다뤄지는 오류추리 가운데 ‘도박사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동전 던지기에서 앞면이 나올 확률은 1/2이다. 그러나 9번을 던졌는데 모두 앞면이 나왔다면, 10번째는 뒷면이 나올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라 추리하기 쉬운데, 바로 이러한 추리를 도박사의 오류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추리가 돈내기에서는 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도박사의 가정보다는 ‘모든 사건은 앞에서 일어난 사건과 독립해 있다’는 확률이론의 가정을 참으로 간주하는 것이 당근 더 합리적이다. 만일 실용주의가 어떤 주장이든지 그 주장의 참 또는 거짓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이 오로지 실천적 유용성밖에 없다고 본다면 나름 의미 있는 철학적 입장일 수는 있겠지만...


결론?


❶실용주의는 자기 독립적인 지위를 지니기 어려운 정치이념이며, 그것이 실현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를 자기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❷국민 통합에 유용하거나 경제 성장에 효율적이라 해서 거기에 동원되는 모든 수단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