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counseling

오이디푸스와 노화의 의미

Kant 2022. 9. 23. 18:44

1. “노년”은 누군가 말하길,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 또는 일부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바위와 같다”고 한다.

1.1 전통적으로 조부모와 어른들은 그러한 역할을 해왔다.

1.2 나의 경우, 아버지의 이른 사망으로 성장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는데, 조부모님들은 내가 30 후반에 이를 때까지 든든한 지지를 보내주었다.

1.21 그분들은 적었던 요구에 비해 많은 것을 내게 주셨다.

 

2. 친할머니는 말년에 여러 소모성 질환을 앓으셨으며 결국 알츠하이머와 시력 상실증을 겪으셨고, 내 한 살짜리 딸애와 똑같이 기저귀를 차고 계셔야 했다.

2.1 둘 다 성인들이 살아가는, 시간적으로 측정되는 세속의 시간을 살아가지 못했다.

2.2 외할머니는 87세에 돌아가셨다. 워낙 난공불낙의 요새 같은 분이셨기에, 난 그 충격으로 거내한 닻줄이 갑자기 풀려 소용돌이에 떠 다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2.21 다시 6 주 후에는 고모 할머니도 돌아가셔서 모두 가족 묘지에 묻히셨다.

 

3. 노년에 관한 바위의 이미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3.1 내 어머니와 계부는 말년에 바위가 놓여 있는 해안선을 두고 협상을 벌이시는 것처럼 보였다. 해안선은 노년에 이르러 부서지고, 분노하고, 외로움의 파도로 그 바위를 위협하게 된다.

3.11 그와 같은 파도 속에서 과연 우리가 온전함과 자기 초월의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3.2 나는 개인적 의미에 대한 탐구에 자극 받아 노년의 지형도를 탐색하고 문화적 형태들을 도표로 정리해보게 되었다.

3.3 나는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물음들을 제기하는 역사가에 가깝다: 어째서 우리는 늙는가? 노화에 내재적인 목적이 있는가? 노년은 인생 드라마의 절정인가, 아니면 쓸쓸한 종말인가? 자녀를 키우고 경력을 쌓은 후에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가? “노령을 위해 [지속적으로] 남겨진 선물”이 있는가? 죽음은 항상 노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노인의 권리와 책임은 무엇인가? 노년의 미덕은? 정말로 “좋은” 노년이라는 것이 있었나?

3.4 대략 19세기 이래 서구 인구의 급속한 고령화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한 방대한 노인학 관련 문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물음들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3.41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왜 늙어가는지,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늙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3.42 노화에 대한 대중적 담론에서 지배적인 목소리를 내는 현대의 생명의료과학이나 사회과학은 노화 과정을 이해하고 제어하기 위해 주로 우리가 어떻게 늙어가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3.421 우리의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의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노화도 과학적 관리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바, 이때 주요 질문은 죽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죽게 한다면 왜 죽게 할 것인가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

3.5 현대 노인학과 노인 의학은 노년의 삶의 질에 크게 기여했으나, 그와 같은 지적인 지배권력은 19세기 후반 이래 인류의 문화적, 상징적 빈곤에 기여해 왔다.

3.51 그것은 노화를 노인의 문제로 한정된 기술적 문제로 간주하고, 과학적 관리에 치중할뿐, 보편적인 참여의식과 연대의식을 거부한다.

3.52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는 영적인 동물이며 음식, 의복, 쉼터, 건강 관리 같은 것들 못지않게 사랑과 의미를 필요로 한다.

3.53 G. Stanley Hall은 1922년에 현대의 진보가 노년을 연장시키기는 하지만 그 실체를 고갈시킨다고 주장했고, 15년 후 Erik Erikson은 문화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노년에 관한 이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 문명이 실제로 삶 전체에 대한 개념을 품어주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3.54 어빙 로소우는 1974년, 많은 연구를 정리하면서 미국의 문화에는 노인들이 의지해 살아가기 위한 의미 있는 규범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보다 최근에 Leopold Rosenmayr는 서구 사회는 노인을 위한 실행 가능한 이상, 실존적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4. 어느 시대에나 노년의 의미는 반드시 삶의 의미에 관한 문화를 이해하는 일과 연결되며, 이는 삶의 전체성과 통일성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포함한다.

4.1 그 같은 직관은 흔히 인생을 시기별로 나누고, [순례] 여행에 비유하곤 했는데, 이 같은 이미지는 적어도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유지되었다.

4.2 이 같은 이미지는 다수의 문화권에 등장하며, 인간 삶의 시간성에 관한 신비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21 그것은 단편화되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시간”을 통일된 전체로 생각하는 방법을 제공했으며, 노화와 노년을 위한, 일관성을 지닌 장소를 보장했다.

4.22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의 전설과 관습은 인간의 삶을 세 시기로 나누었고, 각 시기는 한 세대에 해당하며, 각 세대는 고유한 자연적 특성과 규정된 행동을 가지고 있었다.
4.23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성장, 정체, 쇠퇴의 시기 구분을 공식화했고, 히포크라테스는 생리학적으로 규정된 4개의 시기를 분류했는데, 이는 중세 후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도식으로 여겨졌으며, 점성술의 영향으로 다시 7개의 시기 분류 체계가 셰익스피어 작품에까지 이어져 불멸화되었다.

4.24 Cicero는 De Senectute에서 인생의 시기 이론의 철학적 기초를 확인하면서, 인간의 수명이 다양한 연령대를 특징짓는 크기, 외모, 능력 및 행동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자연 질서를 구성한다는 믿음을 제시했다.

4.241 그는 “인생의 경주로는 정해져 있다”며, “자연은 단 하나의 길을 가지고 있고 그 길은 단 한 번만 달리게 되어 있으며, 존재의 각 단계에 적절한 특성이 할당되어 있다”고 썼다.

4.3 고로 인생의 시기 구분 이론은 인간의 일생에 대해 광범위하게 통합된 견해를 제공하며, 탄생, 성장, 성숙, 쇠퇴, 죽음의 과정은 유기체적 순환의 부분들이 된다.

4.31 그러나 아브라함 허셀이 일깨워 주듯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과 인간은 같은 것이 아니다(being human is not identical with human being).

4.311 존재의 길은 표시되어 있고 고정되어 있으나, 인간으로 존재하며 통과하는 미로는 어둡고 복잡하여 구조로 간주될 수 없고, 패턴, 규칙 및 형태를 벗어나기 때문에, 인간 내면의 삶은 끊임없이 증가하고 무한히 퍼지는 복잡성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4.32 성장하고 늙는 것은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의해 구조화된 생물학적 존재에 뿌리를 둔 객관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 경험이며, 개인이 살아온 셀 수 없는 일련의 사건, 순간, 행위다.

4.321 내면적 삶의 미로를 통과하는 이 경험은 전통적으로 삶의 여정에, 즉 시공간에서 다양한 경험을 서술함으로써 작동하는 여정에 비유되었다.

4.33 여행은 세계 문학뿐 아니라 민담, 예술, 종교에서 가장 널리 퍼진 주제 중 하나다. 4.331 여행은 본질적으로 학습 과정이며, 종종 매우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그렇게 만들어진 영웅은 조금씩 변화된 사람들로서, 이들의 욕구와 만족은 애송이 청년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4.34 길가메시(Gilgamesh), 욥(Job), 오디세우스(Odysseus) 또는 아이네이아스(Aeneas)의 이야기 등에서 고대의 시인들은 여행의 두 가지 주요 형태를 분명히 표현했다.

4.341 하나는 귀향을 통해 성취되는, 여행자의 갱생이나 보상을 향한 순환적 진행; 다른 하나는 사회적 또는 지적 무질서의 상황에서 질서의 상황으로 나아가는 선형적 진행.

유대인의 구전 전통 기록물인 Pierkei Avot(교부들의 지혜)에 따르면, 삶의 여정은 세 가지를 숙고하면 죄에 빠지지 않게 되는바, 출발지, 목적지, 그리고 누구 앞에서 회계를 해야 할 것인가이다.

4.342 기독교 전통도 하나[느]님을 찾는 “나그네와 순례자”(히브리서 XI:13)의 영적 삶[여정]에 대해 말한다.

4.35 두 형태 모두 삶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각각은 서로의 본질적인 통찰력을 배제한다.

4.351 생애의 시기들은 외적으로 볼 때, 사회적, 생물학적으로 단계 지어진 인간의 생애주기적인 과정으로 보이는데 비해, 여정으로서의 인생은 개별 경험의 유동적이고 독특한 특성, 여행자의 탐색이라는 영적 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운다.

4.352 또 삶의 단계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하는데 비해, 인생의 여정은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환원불가한 서사적이고 개인적인 대답의 틀을 제시한다.

4.36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물학적인 동시에 영적이며, 사회적인 동시에 개별적이며, 실존적이면서 역사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애 시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이러한 테제들을 어느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상상을 통해 병치할 것을 요구한다.

4.361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 그리고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Oedipus at Colonus)에서 그러한 역동적인 비전을 성취했는데, 우리는 그에게서 20세기 후반 우리의 고령화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노화, 죽음 및 세대 계승에 관한 심오한 통찰력을 발견한다.

4.4 고대는 근대와 달리 평범한 개인의 경험에는 거의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 작가들은 삶의 여정을 그리면서 비범한 개인이나 영웅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4.41 예를 들어, 고전 아테네 문화의 절정에서 개인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안전한 가치와 구별되는 특별한 운명을 가진 사람, 즉 영웅, 특히 남성적인 영웅을 의미했다.

4.5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전설을 사용하여 세대 갈등의 슬픈 필연성을 강조했다.

4.51 갈등은 각 세대가 흥망하고, 쇠퇴하고, 죽고, 새로운 세대로 대체될 운명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긴장이다.

4.52 프로이트는 어린 오이디푸스에게 비난의 손가락질을 해댄 반면, 최근 주석가들은 그의 비극이 그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4.53 어린 오이디푸스는 죽도록 산비탈에 버려졌지만 자비로운 목자가 그를 코린토스로 데려가 코린토스에서 자신의 친부모라고 믿었던 부부에 의해 양육된다. 라이우스의 행동은 죽음과 세대 계승을 부정하려는 시도로서 자신의 운명을 임시로 봉인하는 데 그쳤을 뿐, 그의 운명은 15년 후 아무것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손에 넘겨진다.

4.54 우리는 오이디푸스 역시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의 살해를 통해 테베의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4.541 오이디푸스는 왕위 문제 이전에 수수께끼에 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죽이는 괴물 스핑크스로부터 도시를 구하는데, 수수께끼는 인간이 세 시기의 삶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움직임을 요구하는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움직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것이다.

4.55 소포클레스는 수수께끼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취약하고 의존적인 어린 시절에서 독립적인 성인기로 나아가며, 다시 노년기에 취약성과 의존으로 나아가는 개인적인 여정을 살면서 삶의 시기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4.551 무대[단계]에서 무대[단계]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4.552 광채가 나는 그 모든 모습에도 불구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대답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 테베를 구할 수 없었다.

4.553 자신의 기원이나 운명과 관련이 없는 그의 대답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앎에 관해서도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도리어 자신이 자신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인생에 관한 이론적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대상도 아니고 인생에 관련한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오히려 득보다 실이 될 수 있다!!!]

4.56 오이디푸스는 인간을 매일 태양이 뜨고 지는 것과 같은 삶을 사는 생물로 확인하면서 인간 조건의 지울 수 없는 한계와 세대 연속성의 필요성을 긍정하는 듯 보인다.

4.561 그러나 이 위대한 문제 해결사는 시간 속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를 충분하게 이해하기 전에 먼저 자기 인식이라는 비극의 길을 시작해야만 한다.

4.562 라이우스가 죽고 오이디푸스가 왕위에 오르자 곧 테베 시는 옛 왕에 대한 해결되지 못한 살해 사건 때문에 신들이 보낸 역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때 보여준 것과 같은 지적인 자신감으로 살인자를 찾아 테베에서 추방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기원에 관한 신비, 즉 실명, 공포, 자기 추방으로 이어지는 친족 살해와 근친상간의 실화를 천천히 풀어낸다.

4.6 우리 대부분은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89세에 이 비극 작품을 완성한 소포클레스에게는 자기 스스로 눈 멀게 하고 추방의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의 행동이 통찰과 내면의 지식―나중에 Thomas Mann이 “영원한 것에 관한, 미소 짓는 지식”으로 묘사한―을 향한 긴 여정의 시작이다.

4.61 딸 안티고네가 이끄는 20년의 방황 끝에, 늙고 장님이고 수염이 난 누더기 차림새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 자신의 출생지인 콜로누스에 있는 분노의 성스러운 숲에서 마지막 안식처를 발견한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자신을 영접하는 자에게 축복이 될 것이라고 신탁이 예언한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랜 유배 생활을 통해 나이 든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이 신탁의 예언에 따라 평생을 살았고 이 운명을 피하려는 시도가 그를 지배하는 힘을 강화할 뿐임을 깨닫게 된다. 소포클레스는 그의 축복받은 죽음이 자신의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할 만큼 오래 살았던 사람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4.7 스파르타와의 오랜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기 직전 노인이 된 소포클레스가 쓴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는 나이 든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유일한 그리스 비극이다. 노년의 결점을 강조하고 노인을 사악하거나 약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리스 비극에서 노인들은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4.71 오이디푸스는 눈 먼, 더럽고 늙은 거지로 무대에 등장하는데, 전혀 비극적 영웅의 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쇠약해진 몸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약하고 정념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소포클레스는 이 작품에서도 오이디푸스를 “사방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바위”로 묘사한다.

4.72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는 마지막 안식처를 찾는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는 추방되고 방황하는 거지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에게 신성한 선물과 세속적인 선물을 모두 선사하는 영웅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소포클레스는 노인 오이디푸스를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하면서 노화를 도덕적, 영적 여행으로 간주한다.

4.73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처음으로 무대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분노의 성스러운 숲에 침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는데, 오이디푸스의 말투에는 젊은 영웅 시절에 어울리던 지성과 능력에 대한 자만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늘 저녁 누가 오이디푸스에게 친절을 베풀꼬?

그리고 누가 이 방랑자에게 적선을 베풀꼬?

고통과 시간

장구한 세월, 만족을 가르친 스승이었구나.

 

4.74 겸손과 묵종만이 한계에 이른 이 노인 영웅의 유일한 미덕은 아니며, 큰 노력과 지속적인 고통을 대가로 지불할 경우 다른 덕목들 역시 실천 가능한 상태였는데, 먼저 아테네인들로부터 받아들여져야 했다.

4.741 낯선 사람이 오이디푸스에게 금지 된 숲을 떠나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자신의 여행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고, 예언이 말한 마지막 휴식 장소에서 여신들에게 기도하고 이렇게 선언한다.

 

난 이 곳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

 

4.75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긍정하자, 마침내 새로운 힘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변화가 시작된다. 그는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를 보기를 요청했다. 그는 그 낯선자에게 그가 자신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면 아테네가 큰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장로들(신성한 숲의 수호자들)이 합창으로 방랑자의 정체를 알리자, 그들은 그를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철회하고 추방하려 든다. 도시가 저주받은 자로 말미암아 오염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경건함에 관한 아테네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에 대해 강력히 도전하며 응수한다. 그는 장로들이 고통에 시달리는 이방인들을 위한 피난처로서 누렸던 아테네의 명성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꾸짖는다.

 

사람들은 아테네인들이 경건함에서 뛰어나다고 말한다네.

비참함에 처한 다른 나라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줄 수 있다 하네 ...

그러나 내게 주어질 아테네의 피난처는 어딜꼬?

이 바위에서 나를 끌어내고 쫓아내니

이 모든 게 명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렸다.

 

4.751 그는 자신의 과거사가 실제 일어났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며, 자신의 과오가 도덕적 타락보다는 불완전한 지식과 통찰력의 부족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오이디푸스의 도전이 보여준 고결함과 힘은 합창단으로 하여금 재고하게 만든다. 그들은 신들이 오이디푸스를 처벌했기 때문에 그를 추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었으나, 오이디푸스는 신들의 심판을 알고 있다고 추정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가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신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은, 자신을 신에 의해 오염된 자라고 생각하려는 태도를 초월하고, 그저 불완전한 지식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결함으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오이디푸스는 악에 관련된 자신의 평판을 아테네인의 공감(compassion)에 관한 평판과 비교함으로써 아테네의 도덕적 이상들의 심장부를 공격한 것이다.

4.752 오이디푸스의 도전은 합창단에 깊은 인상을 주어 테세우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역시 망명 생활을 경험했으므로 이방인에 대한 보호 약속을 승인하며 오이디푸스가 아테네에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허가한다. 오이디푸스는 그의 아들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가 테베의 왕좌를 놓고 서로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탁이 오이디푸스의 죽은 시체를 통제하는 사람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에테오클레스와 동맹을 맺은 크레온이 아테네로 와서 오이디푸스를 데려가려 한다.

4.753 오이디푸스의 도덕적 고결함과 힘은 아테네인들의 호의를 얻었지만 그들이나 장로들도 크레온의 무장한 경비병들로부터 그를 보호할 수 없었다. 오이디푸스의 다른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오이디푸스는 마지못해 그의 청을 주기로 동의하지만, 아들의 체력과 자신의 쇠약함이 마음에 걸린 오이디푸스는 먼저 테세우스에게 그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한다. 테세우스는 성스러운 숲에 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오이디푸스를 보호하기 위해 두 명의 병사를 남겨두고 떠난다. 이어 울려퍼지는 합창단의 강력하고 우울한 송가는 노인이 지은 것으로서, 노인들이 임종을 앞둔 노인에게 불러주는 시인데, 인생의 시기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이해의 틀에 따라 노년의 가혹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점잖은 나이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음에도,

사람은 때때로 여전히 세상을 갈구하나니.

맹세컨대, 그에게서 지혜라곤 보이지 않는구나.

끝없는 시간들로 쌓여만 가는 고통의 표류

날들과 함께 더해 간다. 즐거움은 어떤가,

과도한 나이 속으로 침몰해 들어가면,

기쁨은 어디서도 만날 수 없으리.

 

4.754 노년은 청소년기 그리고 인생의 주요 시기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본성적인 한계와 특성을 가지며 이를 받아 들여야한다. 청소년은 경박하고 어리석은(feathery follies) 시기인데 비해, 중년은 무거운 부담을 지는 시기다.

 

질투, 파벌, 다툼 그리고 전투 ―

전쟁의 피, 전쟁의 슬픔.

 

… 힘 잃은 나이에 다가오네,

모든 인간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동료도 없이,

바로 그 극도의 황혼에 벗도 없이

살아내야 하는 모든 아픔들.

 

4.755 이러한 감정이 남들 이야기, 젊음의 허영심에 관한 이야기일 수는 없다. 소포클레스와 합창단에게 그것들은 살아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나만을 위한 진리가 아니라,

이 눈 먼 자와 망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4.756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구원이며 삶의 과잉은 고통만 가져온다. 합창단은, 그들이 반신반의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평범한 그리스 격언, 즉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일단 태어났다면 “둘째로 좋은 것은 … 우리가 왔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라고 노래 부른다.

4.8 오이디푸스의 삶은 이러한 비관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는 세 시기의 고통을 모두 겪었다. 아기 때에는 언덕에 버려지고, 기어다니지 못하게 발목이 고정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왕이 되어서는 위대함에서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는 망명지를 떠도는 신세였다. 그러나 합창은 그의 인내와 생존에 대한 연민뿐만 아니라 칭송도 표현한다. 합창단은 그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떠올리게 하는 어휘들로 폭풍우가 난타하는 바위투성이의 북부 곶에 비유한다.

 

그렇게 그에게도, 파괴적으로

끔찍한 파도를 일으키며

후려치는 재앙들, 결코 멈추지 않네.

일부는 일몰로부터

일부는 일출로부터

일부는 대낮의 광선을 통해

일부는 밤에 둘러싸인 북쪽으로부터.

 

4.81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데, 그는 폴리네이케스의 청을 듣고 두 형제가 서로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제우스의 천둥소리는 오이디푸스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린다. 이때 오이디푸스의 영웅적이고 신과 같은 지위를 인지한 테세우스가 그의 지시를 받기 위해 도착한다. 아테네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테세우스와 그의 후손들만이 오이디푸스의 매장지에 관한 비밀 장소를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신비롭게도 데메테르의 신성한 숲으로 가는 길을 인도한다. 그곳에서 그의 딸들이 그를 목욕시키고, 죽음을 준비하는 옷을 입힌다. 그는 딸들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고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합창단은 죽음이 그의 고통을 제거해주기를 기도한다.

전령 하나가 선언한다. 오이디푸스가

 

… 한탄 없이 떠나갔다고,

질병이나 고통 없이;

실로 그의 최후는 필멸의 것들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고.

 

4.82 오이디푸스는 문자 그대로 “신성을 향한 교두보”가 되면서 자신의 길고 비극적인 삶의 절정에 이르지만,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가족이 최종 승리자라는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4.83 안티고네에서 오이디푸스의 딸들은 인간의 시간성의 세계를 특징짓는 과도한 고통, 불가해한 운명의 신비를 살게 된다.

 

5.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자신의 비극적 고통과 무력함을 초월할 수 있게 해준 지혜는 무엇일까?

5.1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즉 시간 속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를 나이 든 영웅으로서 살아 내었다.

5.11 젊은 영웅이던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세 시기를 단 하나의 대답으로 통일함으로써 시간을 지배하려 했는데, 그의 가족이 보인 행동은 시간을 통제하려는 이 지적인 시도와 평행을 이룬다. 친부 살해는 아버지의 자리를 너무 빨리 차지하도록 허용했고, 근친상간 또한 “세대들 사이에 필요한 시간적 구분을 붕괴”시킴으로써 시간을 말소했던 것이다.

5.12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의 모든 조건을 통해 순차적으로 살았을 때 그는 아테네에 도착해 인정 받는다. 고뇌에 찬 그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하여 조급하게 세 발로 걷도록 자신을 강제하였으나, 긴 망명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도 나이 든 영웅의 표식인 내적, 외적 지식 둘 다 소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할 만큼 오래 살고 나서야 지적인 역량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실존적 지식을 습득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의 칼날은 인간의 생애 주기에 대한 추상적인 진실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낸다. Abraham Heschel은 “관념들을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삶을 조사하여, 한때 강렬하게 소중히 여겼던 필요와 욕구들의 무덤터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실존의 시간성에 친숙해지고 그것을 인식하게 된다”라고 적는다.

5.2 “시간, 광대한 시간, 고통”이 오이디푸스에게 “만족을 표시한 스승들”이었다면, 그들은 또한 오이디푸스에게 그 자신의 부족함, 그리고 그가 타자를 필요로 함을 보여주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 안티고네와 아테네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5.21 그는 아폴로 신전 입구에 새겨진있는 명령 “너 자신을 알라”를 고통스럽게 이행함으로써 이러한 이해에 도달했으나, 소포클레스는 이 격언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스 이해를 넘어 우리를 데려간다. 즉, 너는 인간이며 죽을 존재이지 신이 아니라는 것.

5.22 따라서 나이 든 영웅이 운명을 성취하는 데 핵심은, 자기 지식의 획득이다. 영웅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개인적 지식을 통해 사랑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된다.

5.23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는 추방된 노인 영웅과 사회가 서로 구원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동체에로의 재통합은 섬세한 상호주의를 요구하는 어려운 과제다. 나이 든 영웅은 자기 지식을 향한 비극적인 길을 버틸 수 있어야 하는 반면, 공동체는 미지의 것, 두려운 이방인[특히 노인]을 용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오이디푸스 자신의 개인적인 고결성은 아테네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들은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조건과 씨름한 개인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개방성과 공감을 확인한다.

5.24 따라서 소포클레스는 노화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여정으로 묘사했다. 노화의 놀라움, 공포, 신비, 승리는 겸손과 자기 지식, 사랑과 공감, 죽음에 대한 수용,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감각을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섞일 수 있다고 암시한다.

5.25 우리 시대의 과학 문화는 자신의 위대성의 실존적 근거를 소홀히 했던 영리한 문제 해결사, 젊은 영웅 오이디푸스를 닮았다. 젊은 오이디푸스처럼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 인간 존재에 관한 사실들을 통제하기 위해 생애 시기들을 연구하며, 젊은 오이디푸스처럼 생애 순환의 실존적 영역을 기술적인 문제로 해석하여 억압해왔다. 그 결과 우리 문화에서 노년은 너무 자주 목적 없는 “계절”처럼 보인다. 노인들은 너무 자주 순례자가 아니라 낯선 사람들로만 나타난다.

5.3 그러나 그 모든 힘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의 승리는 여전히 문젯거리를 남긴다. 그가 생애의 끝을 주도했지만, 안티고네에서 그의 가계는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 그는 아들 중 한 명조차 용서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서로 죽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딸들은 과도한 운명의 신비를 살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이디푸스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대가를 치른 것일까? 그가 자손들의 미래의 삶에 대한 의무보다 자신의 영적인 복지를 우선시했던 걸까? 인생의 여정이 성공적인 절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티고네처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의 과도한 희생이 필요한 걸까?

5.31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모든 지혜는 불완전하며 모든 승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같은 물음들에 대한 답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나이 든 오이디푸스가 나를 내 운명에 직면하도록 움직인다는 것이다. 내 딸과 할머니 사이에 서서 나는 아침에는 네 발, 한낮에는 두 발, 오후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로 나를 인식한다. 어린 시절에 정박해 있던 오래된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Anne Sexton 시인(1928–1974)이 “신을 향한 끔찍한 노젓기”라고 부르는, 순진하고 장난기 있는 지혜를 찾아 나선다. 그 길에서 난, 내 노년이 그것에 대해 내가 중년에 가졌던 이상형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고 싶다.

 

Thomas R. Cole, "Oedipus and the Meaning of Aging. Personal Reflections and Historical Perspectives" 중에서 정리

 
간만에 읽는 내내 먹먹해지는 에세이.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이런 의미를 읽어내는 저자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