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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진흥법 논의를 바라보며

Kant 2015. 2. 17. 16:44

 

 

 

실무 담당자의 이틀에 걸친 설득 전화에 마지못해 응한 작업이었지만 이 정도 내용의 발표도 수용 못하고 수정을 요구하는 행사라면 그에 대한 책임은 응했던 내 판단 착오에 있었던 것 같다. 언제나 나잇값을 하려나?

 

 

 

 

 

인문학 진흥법 제안에 대한 소견

 

 

 

위기의 발단 혹은 성격

 

여전히 인문학의 고사위기운운하는 일은 이제 충분히 식상한 감이 없지 않다. 인문학 종사자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시기가 인류 역사에 있었는지를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혹시 소크라테스가 활동했던 고대 아테네 시대?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편은 철학자들이 얼마나 사회에 무용한 인간 부류인지를 너무도 단도직입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지 않은가?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철학의 열렬한 애호자들이 그 학문을 젊은 시절에 교양의 일부로 접하다가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너무 오래 연구하게 되면 거의 항상 별난 괴짜가 되고 맙니다. 아예 불한당이 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죠. 그리고 가장 탁월한 정신의 소유자조차도 당신이 추천하는 것[철학하기]을 추구하다가 사회에 무용한 자가 되고 마는 실정입니다.”(book 6, 487c-d)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그 출발점부터 일반인의 시선에는 쓸모없는, 현실로부터 소외된 학문이었다. 어찌 보면 인문학은 위기를 먹고 사는 학문이고 늘 시대착오적인(또는 반시대적인) 작업이다. 나는 수년 전부터 위기론의 확산 때문에 인문학자들이 응석받이로 비칠까 두렵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 현실을 보면 인문학이 실존의 위기를 넘어 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체계적인 도살 위기에 몰린 것이 아닌가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전후 6-70, 80년대 경제 부흥과 대학의 비정상적 팽창기를 지배하던 정치적 질서와 논리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자신들만의 고담준론 리그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인문학자들의 안일한 학문 태도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겠다. 그러나 여기서 그 책임 소재와 경중을 따질 필요도 여유도 없다.

 

 

2. 법률 제정과 기구 설립의 취지와 관련하여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법안 제안 사유와 일부 구체화된 서술 내용에는 그 핵심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인문학이나 인문정신문화”, “인문콘텐츠등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인문강좌”, “대중화”, “사업화”, “산업화등과 같은 표현은 입법의 의도 내지 주목적이 인문학 활동 자체의 장려 내지 진흥보다는 인문학으로부터 부가가치를 창출하거나 그 가능성 모색활동을 독려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어차피 철학은 개념을 중시하는 학문이니,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먼저 진정으로 인문학 연구와 인문학적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법안에 사업화산업화같은 표현 사용은 자제했으면 좋겠다. (구체적인 지원프로그램 안에서는 사용이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인문적 가치가 무엇을 위한, 즉 실용적인 가치, 도구적인 가치로 여겨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실용성은 지난 정부에서 내걸었던 핵심 가치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자체만으로는 존립할 수 없는 가치다. 주지하다시피 인문학은 사람, 즉 인간 자신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서 출발한다. 물론 정책 입안자나 입법 관련 실무자가 현실에서 직접 효력을 증명할 수 있는 법안을 기안하는 데에는 추상적인 가치 개념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법이 관여하는 대상의 본질을 손상시키면서 그것을 진흥시킨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인문정신문화든 인문학연구 성과물이든 인문콘텐츠든 그것의 대중화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대중화개념 역시 사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의 공식 직함은 “Professor for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였다. 나는 “Public Understanding”대중화보다는 공공 [또는 공적] 이해가 더 적합한 번역이라는 어느 인문학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대중화는 자칫 대상 학문을 비전문적인 수준에서 보급하는, 말하자면 엄밀한 학문적 연구에 대립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중화의 진행은 언제나 그 반대급부로서 그만큼 더 치열하고 더 엄밀한 순수 학문적 탐구의 뒷받침을 전제한다. 법안은 반드시 이 정신을 담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인문강좌를 널리 보급하자는 취지에는 적극 찬성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보여주기식 내지 이벤트식 지원으로는 곤란하다. 먼저 상설 시스템화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대중의 인기 수요에 끌려가는 무원칙적인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마땅히 보급되고 진작되어야 할 인문가치를 체계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인문학적 담론의 습관화 내지 생활화를 지향해야 한다. 예컨대 즐거움[또는 위안]을 주는 인문학이라는 모토는 인문학에 대한 반쪽짜리 이해이다. 어떻게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진지한 학문적 모색이 즐거움만 혹은 따뜻한 위로만 약속하겠는가? 오히려 실존의 고통을 직시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의 계발이 인문학의 불가피한 과제가 될 것이다. 대다수 청중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표현과 이른바 에듀-테이너를 원한다고 그 분야 전문가(?)를 줄대기할 것인가?

 

 

3. 제안

 

 

입법에 관한 구체적, 기술적 사안은 원래 법학이나 정치학, 행정학 등 실용학문 전공자들의 몫이겠으니 순수 학문 전공자가 왈가왈부할 영역은 아니다. 따라서 법안 구체화 과정에 반영될 수 있을지 짐작조차 어렵지만, 몇 가지 생각을 옮겨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인력양성과 활용에 관한 문제이고, 일부 의원의 제안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다른 발표자들도 이미 지적한 내용이지만 전통적으로 인문학이 사회 속에서 수행했던 역할은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일, 즉 스승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수년간 인문학도의 교사나 교수로서의 진출은 거의 제도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저 간혹 인문학은 전공으로서보다는 일반교양의 역할로 만족하라는 목소리가 들릴 뿐이다. 대중화와 관련해서 이미 언급했듯이 전문연구의 심화 없는 교양화는 자기모순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연구의 심화는, 특히 인문학의 경우 프로다운 학문후속세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수의 서울 소재 대학에게 그 임무를 맡기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교양 전담 강사(강의 전담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묻고 싶다. 연구와 교육에 안정적으로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방해하는 제도적 장벽을 쌓아가면서 인력양성을 운운하는 것은 역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만일 순수 학문 분야의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꼭 서울대를 비롯한 소수 대학이 떠안고자 한다면, 교육부가 먼저 그들 대학을 명실상부한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학원에 대한 지방대 출신 학부생들의 진학과 학위 과정 이후의 학문적 진로와 생업 문제를 개선시켜주어야 할 것이다. 사범대학도 대학원 대학으로 전환시키든지 해서 인문학 전공자의 교사직 진입의 숨통을 터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전공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의 심화 과정과 그 안정적인 운영에 대한 배려 없이 인문학의 결과물만을 대중화시킨다는 발상은 뿌리 없는 나무가 커가기를 바라는 공염불이며, 인문학을 살상하는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인문학 또는 일반교양 개념 등에 대한 다 학문들 사이의 학제적인 개념 설정을 위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대의 인문 교양 교육 역시 고전적 후마니타스개념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주축으로 해야 할 것이지만, 상아탑의 현실은 이미 온갖 실용학문들과 기예 관련 전문 영역들 사이의 세력 다툼의 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고 전통적으로 인문교양의 주역이었던 문··철만이 인문적 가치 연구와 보급에 대한 독점권을 되찾겠다고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존의 문화예술진흥법이나 학술진흥법등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차원에서도 인문적 가치 추구를 표방하는 다양한 전공 영역 종사자들이 그것의 핵심에 대한 일정 부분의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재원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일반인을 위한 인문강좌 행사는 여느 교양강좌보다도 그것이 이뤄지는 장소에 대한 각별한 배려가 요구된다. “심포지엄의 의미나 유래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인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단순히 지식 전달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동참자의 “개”(conversion)과도 같은 전인적인 변화를 꾀하는 학문이라는 점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인문학적 담론이 오가는 장소가 그저 물리적 공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집행기구가 인문강좌나 인문콘텐츠를 보급하는 시설이나 문화공간을 지정할 때 그 기준으로 이러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려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것은 일반인의 인문학적 담론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필수전략이다.

 

마지막으로 인문학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법을 제정하고, 기구를 설치하는 일 자체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없을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모두()에서 말한 것처럼 인문학은 위기를 자양분으로 삼는 학문이다. 법제화와 기구화가 적지 않은 수의 인문학자들의 자율성을 해칠 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양심에 기반하는 진리 추구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이 제도화된 서비스에 탐닉하다 자칫 엉뚱한 길로 새지는 않을까? 이것이, 인문학자의 능력조차 연구논문이나 저서의 편수, 연구비 수주액이라는 기준을 정하여 평가하고 그에 따라 봉급 통장의 숫자를 달리 찍어주며, 일생일대의 전문 연구에 몰두하는 시대착오적 학자보다 차라리 연구비 신청용 페이퍼 작업에 몰두하는 교수를 원하는 대학 현실과 무관하게 드는 기우일까?

 

입법 활동이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한 잣대가 될 수는 있겠지만, 명색이 인문학자가 '입법의 양적 증가는 국민생활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의 부담을 늘릴 수 있다'는 여론의 지적에 눈감아버릴 수는 없다. 제도를 운영하는 데 드는 재원 부담은 누가 떠안게 되겠는가? “문화예술진흥기금처럼 인문진흥기금을 설치한다? 그 돈은 결국 누구 호주머니에서 나오나?

 

 

2 주 전에도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수재들만 다닌다는 카이스트에서 한 20대 대학원생이 목매어 자살했다. 같은 기숙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본 기숙사는, 그곳 관계자분들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귀신들이 둥지를 틀만해 보였다. 주로 20대 학생들이 거주하는 곳(문자 그대로 한낱 물리적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 공간)이 우리 미래의 먹거리를 책임질 그들의 넘쳐나는 생기와 끼를 우중충한 아우라로 억누르고 있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려웠다. 만일 그 영재들에게 인문정신을 체험할 기회를 주자라는 주장에 거부감이 든다면, 피어나는 꽃과 같은 그 친구들이 자신들의 자유로운 발상을 자신들의 생활공간에 반영할 수 있게 그냥 놔두기만 해도 기숙사의 모습과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뮌헨대 기숙사(Olympiazent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