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국가에서 이제 학문이나 사상의 자유가 종교나 권력자에 의해 억압받는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대신 정치-관료적 시스템이 점점더 학문활동을 구속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시스템 뒤에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 그리고 정치에 뜻을 둔 학자(폴리페서?)들이 있기 마련일 터이다.
수능 영어를 대체하고 국부 유출을 막자며 이른바 한국형 토플 정책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ational English Ability Test, NEAT)을 개발하는 데 400억원을 쏟아붓고도 누구 하나 양심선언했다는 얘길 못들었다.
『서울경제』 2013년 5월 13일자 보도에 의하면, “NEAT는 애초부터 일선 교육 현장의 현실을 도외시한 졸속 정책이었다. 낙후된 영어 교육 인프라를 개선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하기와 듣기가 평가 비중의 50퍼센트를 차지하는 NEAT로 수능을 대체하겠다는 발상 자체부터 탁상행정의 표본이었다”.
어디 행정의 탓이기만 하랴?
온갖 허망한 제도들의 입안과 개발 뒤에 기생하는 학자들이 없었다면 가능했을 일도 아니라고 본다.
어떤 인문학자는 이런 상황을 "아전들 세상"이라 꼬집었다.
자신의 확신을 학자적 양심으로 표현하려 했던 근대의 사상가들이 자주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데 비해 21세기의 학자는 최소한 생명의 위협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 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등 위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박수를 보내는 대다수 민중들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21세기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학 정책을 좌지우지 하는 집단에 대항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대학은 이미 언론 비판의 주요 표적이 된지 오래다. 그리고 어차피 스스로 생각할 필요조자 느끼지 못하게 된 대중들은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이른바 "피로사회"에 대한 책임을 학교, 특히 대학에 전가하는 미디어의 장단에 기꺼이 춤을 춘다.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조차 수학 능력이 부족해 교수가 미적분을 가르쳐 가며 수업을 해야 해도 대학에서 뭘 가르치느냐고 핀잔하며 책임을 돌리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이 정도야 그렇자 치자. 제때 못 배운 건 나중에라도 열심히 만회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원래 대학에서 가르치고 배워야 할 진도야 조금 뒤쳐지겠지만. 그러나 진짜 심각한 문제는 실용주의 학문관에 기댄 교묘한 대학 구조 조정의 논리이다.
2000년대 들어 대학 사회에 불어닥친 당근-채찍 정책은 학문 논리의 자율성을 정치-경제의 논리로 재단하고 있다. BK21, BK21 플러스, 프라임 사업, 에이스 사업, 코어 사업... 이름만 들어서는 그 성격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정책들이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대학을 학문과는 무관한 장소로 만들어 가고 있다.
최근 배포된 <대학 인문역량 강화(CORE) 사업> 안내 자료를 보니,
"지금의 상황은 인문학을 마치 고갈되지 않는 원천처럼 간주하고 대중화에 힘써 향유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고 "공급은 없는데 수요를 늘리는 형국"이란다.
참으로 굴욕적인 표현이다.
한 권의 인문학 서적이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 인문학자들 자신이 먼저 반성할 일도 많다.
그래도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을,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는 실용주의가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희한한 점은 구조 조정 논리가 순수한 자율 시장 경쟁 논리에 기반하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교육 수요 시장이 아니라 교육부의 대학 평가가 사실상 대학의 존속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학 설립이나 정원 증원도 정치 논리, 관료주의 논리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제 다시 정원 감축이나 퇴출도 똑같은 논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어디에도 아카데미의 논리는 없다. 예외라면 대학 내부의 정치 지망생들이 관료주의를 위해 동원하는 논리에 그나마 일부가 포함되어 있을까?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나 붕괴는 내부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이제 나는 순수학문을 하는 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에너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하나는 원래의 학문 연구에,
다른 하나는 아전들의 방해 공작을 버텨내는 일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 이게 사실 제일 어렵고 난감한 일인데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학문의 성격조차 왜곡시키려 드는
아카데미 내부의 Mündel들을 계몽하는 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