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철학상담의 관점에서 본 어빈 얄롬(Irvin D. Yalom)의 ‘지금-여기’ 활성화 기법

Kant 2020. 6. 10. 18:44

I. ‘지금-여기활성화 기법의 연원과 게슈탈트치료

 

심리치료 분야에서 지금-여기의 경험을 강조하는 입장으로는 게슈탈트 상담이론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현상학과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철학적 기원은 최소한 세네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네카는 심리적 불안과 관련하여 인간만이 가지는, 미래를 투기하고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였고, 인간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는 한 불안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철학자다. 인간의 마음이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선구하거나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으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능력은 본디 인간에게만 허용된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 저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같은 철학적 관점은 게슈탈트치료뿐 아니라 인지치료나 합리정서행동치료 같이 여러 방향의 심리치료에서 구체적인 기법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게슈탈트치료는 환자의 마음속에 있는 중요한 감정들과 자신의 환경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쳐서, 모든 상황에 이성적으로 대처하도록 돕는다. 환자는 자신의 주관적 지각에 대한 이를테면 일종의 현상학적 검토 작업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치료자는 삶에서 의미 있고 중요한 부분이 지금-여기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바, 환자는 이전에 억압되었거나 확인되지 않은 욕구와 감정들이른바 미해결 과제혹은 미해결 게슈탈트을 전면에 등장시켜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결과 환자는 전반적인 인식이 향상되면서 새로운 자신감과 책임감을 얻게 된다.

 

게슈탈트치료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펄스(Frederick S. Perls)가 환자에게 지금-여기의 감정에 집중할 것을 주문할 때 그는 무엇보다 신체적 감각을 중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 치료이론이 게슈탈트 심리학이 개별 학문으로서 전제하는 몇몇 가설적 개념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게슈탈트치료이론은 정신과 신체라는 이원론적 입장을 거부하여 인간의 경험을 본능적 욕구 해소를 추구하는 유기체접촉차원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펄스가 신뢰하고 강조한 유기체의 지혜역시 인간의 정신활동을 생물학적 생존과 성장을 위한 생물학적 신진대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나아가 그가 심리적 장애를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유기체적 성장장애로 간주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욕구와 감정의 해소를 위해 필요한 게슈탈트의 형성 자체를 생물학적 자연현상으로 이해할 때 인간 정신활동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과 자기 책임성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게슈탈트치료이론이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수용하려 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과연 이 철학적 요소들이 그 이론 내에서 이질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신과의사인 얄롬은 지금-여기에 초점을 두는 기법에서 마음의 문제에 대한 한층 더 포괄적인 역할을 발견한다. 그의 출발점은 환자의 문제란 결국 치료적인 관계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신념에 기반을 둔다. 예컨대 친구와 가족에게 배반당했다는 느낌을 가진 여성 환자가 있다면 그녀는 아마도 언젠가는 자신이 치료 중에 자신의 치료자에게도 배신당하는 느낌을 느끼게 되리라는 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노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결국 치료 과정 중에도 자신의 화를 표출할 것이기 때문에, 상담사가 환자와 함께 그 치료 현장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적절하게 다루는 것이 치료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본다. 이에 상응하여 얄롬의 치료는 환자의 특정 이슈 자체에 대한 대화를 줄이는 대신, ‘지금-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더 많이 집중한다.

 

나아가 치료자의 권위나 한계에 대한 성찰 없이 지금-여기의 감각과 감정에서 이른바 미해결 게슈탈트를 해석하고자 한 게슈탈트치료 이론가들과 달리, 얄롬은 지금-여기개념을 통해 치료자-환자 관계를 보다 근본적으로인문학적 솔직함의 관점에서재정립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그 현장, 그 시점에 일어나고 있는 일 전반에 대해 치료자와 환자가 그들 자신의 생생하고 정직한 느낌과 생각을 나누는 것에 치료의 핵심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치료자와 환자 모두가 그들 자신에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지금-여기에 대한 토론이 위험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이슈가 곧 환자의 문제적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자칫 환자 편에서 상담 과정 자체를 문제 삼아 상담 회기를 종료하고자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얄롬은 그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를 발휘할 경우 거의 언제나 치료 상의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하에서 본 연구는 단단한 철학적 배경을 갖춘 얄롬이 상담치료에서 사용하는 지금-여기의 활성화 기법을 철학상담과 관련지어 정리, 평가하고자 한다. 먼저 얄롬이 자신의 저서여기에는 치료 이론서뿐 아니라 소설 형식의 다양한 작품들도 포함된다에서 설명하고 있는 지금-여기의 의미를 살펴보고(2), 그것이 효율적 치료 수단으로 자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제로는 어떤 것이 있으며, 지금-여기활성화 기법의 구성 요소들은 무엇인지를 정리한다(3). 마지막 절에서는 지금-여기에 초점을 두는 작업의 어떤 특징이 철학상담과 유사한지, 또한 그럼에도 치료에 관한 얄롬의 서술에서 철학상담과 조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무엇일지 간단히 짚어본다(4). ...

 

(철학논집 (61), 2020, 9-35,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